(프롤로그)
그동안 써오던 "팩션 소설"이라는 장르에 집착하지 않고 '단편 소설'로 다시 돌아와
봅니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불명료한 이 전자 미디어의 시대에 새로 생긴 "팩션" 장르를
수입하여 연습하다보니 필요없는 오해가 부담스러웠지요---.
최인호 작가의 부인이 "별들의 고향"에 나오는 "경아"라는 소문에 시달렸다는
옛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여기 올리는 것은 단순한 창작일 뿐입니다.
아, Exorcism of Emily Rose는 전미 시네마 박스에서 1,2위를 다투는 영화입니다.
내일 새벽에 다시 여행을 떠났다가 며칠 후에 뵙겠습니다.
(단편 소설) 42번가의 엑소시즘
대기업 본사의 임원직을 섭렵하고 이제는 자회사의 대표이사 자리 정도는
누리다가 나오리라는 기대와 확신을 갖고 있었던 정 필수 이사가 갑자기
불명예스러운 '명예 퇴직'을 한 사연은 주변 사람들 사이에 알듯 모를듯한 호기심을
던진다.
하여간 졸지에 백수가 된 정 이사는 그래도 일찌기 주재원 시절에 미국에 심어놓은
아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 할 일 없이 "뉴저지 트랜싯(NJ Transit)" 버스를 타고
아침마다 일단 '42nd Street'로 나오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아내는 볼보 S80을 사놓고도 뉴올리언즈 재난 탓에 기름값이 너무 올랐다고 아무도
그 차의 핸들에 손을 못대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맨해튼 다운타운 들어가는 편도 버스비 2불 30전도 아깝다고 자주 따라
나오지 않아서, 정 이사가 매일 친구들과 나누는 잡담 일과에는 차라리 축복이었다.
그러나 가끔 복잡한 맨해튼으로 터무니 없이 볼보가 움직일 때는 부인의 거창한 쇼핑
충동이 도모되는 날이었다.
모름지기 자나깨나 차 조심이었다.
'42nd Street'라고 하면 정 이사에게는 젊을 때의 뉴욕 주재원 시절부터 익숙한
곳이었다.
본사의 임원들이 출장을 오면 이 동네는 반드시 정필수 이사가 몸소 모시고 나가서
구경을 시켜주어야 하는 필수 과정에 속하였다.
그의 이름과 맞물려서 '정필수 코스'라는 농담이 통용될 정도였다.
정필수 코스를 조금 더 설명하면 42번가를 둘러보되 좀 지저분한 핍 쇼 같은 데를 한번
눈 요기로 둘러보고 나서 이윽고 32번가의 한인 타운으로 가서 수입 소주에 갈비와
쌀 밥도 먹고 노래방까지 가야 이 VIP 과정은 끝이났다.
42번가와는 무슨 인연이 그리도 또 많은지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아들 내외가 직장을
잡은 회사들도 바로 이 거리에 있었고,
명퇴를 당하기 직전에 있었던 어떤 가까운 친구의 성대한 결혼식장에서도 이 거리
이름이 또 튀어나왔다.
신부인 그 댁의 며느리가 바로 '42nd Street'라는 뮤지컬의 주인공이라는 말이
하객으로 온 친구들 사이에서 즐거운 화제로 등장한 것이었다.
더블 캐싀팅에서도 더 중요한 주연 역할이라고 언론에서도 크게 소개된 그 신부의
친정 댁에는 매스컴과 연예 쪽으로 진출한 사람이 많아서 언니 한 사람은 또 이름있는
아나운서라고 하였다.
이 날 웨딩 드레스로 등장한 신부는 큰 키에 큰 체형에 얼굴까지 아름다워서 국제적으로
진출하여도 나라를 대표하여 제 몫을 단단히 할 재목이겠다고 하객들은 입을 모았다.
아닌게 아니라 그 방면에 조금 조예가 있는 동기의 말로는 이 신부가 평소에도
성량이 높고 음역대까지 넓어서 한국의 뮤지컬 계의 톱 리더급에 속한다는 전언까지
나와서 모두들 자기 딸이라도 되는듯 대견하고 즐거운 얼굴들을 하였었다.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음악이니 미술이니 예술 쪽에 일가견을 폈던 정 이사는 그동안
무심히 지내왔던 분야에서도 이 나라 이 민족이 이렇게 모르는 사이에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구나 하는 생각에, 진심으로 축하를 보내는 마음이었다.
우리 시대는 맨날 폭탄주에 가라오케 수준이었지만 다음 세대의 비즈니스는 바로
42번가의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보고 들으며 상담을 나누는 시대로 업그레이드
되어야겠다고 그는 동기들끼리 2차로 자리를 옮긴 그날 저녁에 흥분하여 좀 떠들었던
기억도 있다
다만 이런 좀 고상한 생각을 저녁 늦게까지 저 잘났다고 떠벌인 얼마 후에 갑자기 명퇴를
당하고 그 42번 거리로 쫓기듯 내몰리게 된 처지는 아이러니가 되어서, 흥분했던 그 날
저녁을 다시 기억해 내기에는 일말의 씁쓸한 정서도 있었다.
사실 정 이사는 대학에서 문학 쪽을 전공했지만 어쩌다가 먹고 살기에 바빠서 평생
종합상사에서 장돌뱅이처럼 지내오느라고 뮤지컬이라는 말조차 그 동안 딴세상의
이야기처럼 생소한 어휘가 되었는데, 친구 댁내의 혼사에서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감회를 느꼈던 것이다.
'42nd Street'라는 그날의 화두는 이렇게하여 잃어버렸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서 무슨
예지의 암호문처럼 그에게 순백의 꿈을 가끔씩 떠올리게 하더니 주술처럼 갑자기
브로드웨이로 그를 표착시킨 것이었다.
이 뮤지컬은 원래 1980년에 미국에서 상영된 같은 이름의 영화를 각색한 것으로
오히려 영화의 인기를 압도하여 이 42번가의 브로드웨이에서 장기 공연을 했다고
정 이사가 찾아본 인터넷 검색은 설명하고 있었다.
작품의 내용은 1930년대, 그러니까 미국과 세계가 대 경제 공황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에 브로드웨이로 진출한 어떤 코러스 걸이 역경 끝에 마침내 뮤지컬의 대 스타로
성공하는 감동적 스토리를 담고 있었다.
한 때 정 이사가 부인 몰래 한 눈을 팔았던 아름답고도 가련한 미혜는 왜 이 작품의
주인공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단 말인가,
정 이사는 그 답지않게 눈시울을 붉힐 때가 요즈음 많았다.
'콜드 블러드' 혹은 '냉혈의 정 필수'라고 불리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가 눈물을 흘리다니, 세상이 참 많이 변했고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그 예식장에는 이름만 듣던, 아니 이 나이에는 이름도 생소한 이 시대의 대 스타들이
많이 몰려왔었고 매스컴에서도 무심하지 않았다는 당시의 떠끈따끈한 리포트를
정 이사는 미국에 사는 친구들에게 한동안 전하고 다녔다.
미국에 있는 동기나 친지들은 항상 이런 생방송에 목말라하고 있어서 명퇴 후 미국으로
다시 건너온 정 이사가 한동안 받아 마신 환영의 소주 값은 톡톡히 해 냈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그 생생한 현지 보고도 구문이 되었고 사람들은 조금 더
무언가를 원했지만 그런 방면의 밑천이 짧은 정 이사는 생각을 더듬다가
그날 예식장에서 똑똑하고 잘난 신랑이 감격에 넘쳐 흐느끼는 신부의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주더라는 이야기를 디저트로 내놓았다.
반응은 찬반 양쪽이었으나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편에 섰다.
"우리가 시대 운이 좋아서 마누라 한테 큰 소리치고 살았지만 앞으로의 세대는
지구상 어디에 살건 여기 미국 풍속 비슷하게 될텐데, 맘 따로 행동 따로 해봐,
당장 부부간에 힘든 상태가 태풍이나 쓰나미 처럼 닥쳐 올테니까---."
그런 대세의 흐름을 읽고 아내의 심리 변화에도 깊은 관심과 서비스를 해야된다는
누군가의 의견에 정 이사도 아낌없이 찬성의 한 표를 던졌다.
그날의 신랑은 미국에서 MBA를 마쳤고 홍콩과 싱가폴의 외국계 투자은행에서
주요 업무를 맡아서 하다가 지금은 미국계 컨설팅 회사의 한국 책임자가
되었다니까, 새 시대의 매너와 가치관에는 도가 텄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신부에게 진심으로 사랑의 표시를 한 것이었다,
정 이사 세대라면 그런 표현은 나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정 이사는 미국에서 자리잡은 아들 내외의 사는 모습을 보아도 신세대의 표현
양식은 구세대와 판연히 다르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 부부가 1.5세대라서 그런지 부모에 대한 공경이랄까 예절에 손색이 없음도
그의 세대가 누릴 수 있는 천우신조인지도 몰랐다.
가족간의 세태도 급격히 변할 것이다.
하긴 아직 손주를 안겨주지는 못했으나 그때를 대비하여서 부모에게 최선을
다하는 속셈이 있는지는 몰랐다.
더우기 정 이사가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소위 듀플렉스라고 하는, 두 가구가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하고 아들 내외를 불러들인 내공이 아직은 효험을 발취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어느날 정 이사의 아들은 영화관 티켓을 갖고 왔다.
"아무 영화관에나 다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여기 뉴저지의 몰에 있는 영화 관이나,
맨해튼이나---."
며느리는 영화관이 있는 42번가를 종이에 그려주기도 했다.
"뉴저지 트랜싯 버스 종점에서 길을 건느셔서---."
"그건 나도 잘 안다. 42번가에 맨 극장 투성이 아니냐. 42nd Street라는 뮤지컬도
있었잖니---."
"와우, 아버님은 참 멋쟁이셔요. 요즈음은 올리지도 않는 그 이름 난 뮤지컬을 어떻게
아직도 다 아시구요---."
1.5세대 며느리의 진정어린 비명이었다.
"네 시아버지 친구 며느리가 한국에서 그 무슨 노래하는 연극의 주인공을 했단다.
그때부터 그 이름을 아시고나서 괜히 문화인 행세를 하시는거지. 속지말아."
정 이사 부인이 다리를 걸고 넘어졌다.
문화와 교양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부인의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다.
부인이 여러해 전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는데 그 어려웠던 시절, 진단과 수술과 치료의
혹독한 과정 속에서 정 이사는 그만 견디지 못하고 탈선을 했던 것이다.
한눈을 팔았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 사건을 말한다.
상대는 미혜라고 하는 협력회사의 청순가련형 사원이었는데 가난한 집의 딸이었다.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의 상품 디자인은 매스컴에도 떴고 놀라운 경지가 있었다.
순수 미술에 대한 열정도 만만치 않았던 그녀와 두 사람이 어디까지 갔는지는
두 사람만 알 일이지만 병실에 있던 부인이 어떻게 알고 소녀같은 그녀를 박살내고야
말았다.
더 상세한 자초지종은 당사자들 만이 알뿐 주위에서는 병석의 부인이 어느날 자리에서
기적처럼 일어나 한바탕 전쟁을 치룬 것 밖에는 잘 모른다.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은 끝났고 옹골차고 대차고 거구에 살까지 찐 부인이
코스모스 보다 약하게 보이는 젊은 여자 예술가를 완전히 처치하고 말았다.
병고의 부인으로부터 어디에서 그런 힘과 지략이 나왔는지, 전쟁이 끝나자 부인은
그 치명적인 병까지 다 나아버렸다.
오래 살려면 수도사같은 마음의 수양도 필요하겠지만 이렇게 전투적일 필요도
있는 모양이라고 주위에서는 쑥덕거렸다.
특히 부인들의 말이 그러하였다.
하여간 지상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 왔건만 전투를 치룬 성곽은 다시 수축할 길이
없었는지, 정 이사의 부인은 목소리가 더욱 남성적이 되었고 그 때로부터 쇼핑
메이니아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이 백화점 저 쇼핑 몰로 실성한 것 처럼 다니며 물건을 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홍콩의 신정 세일, 싱가폴의 디스카운트 몰로 친정 식구와 친구들을
몰고 다녔다.
그 바람에 정 이사는 동기들로부터 비난도 많이 받았다.
부인의 구매 충동 영향력이 돌풍처럼 동기회 부인회에 불어왔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정 이사는 술을 사며 동기들에게 일갈했다.
"내 시집간 누이도 새언니 물건 사는거 챙겨보고 말리고 돈 간수도 잘하라고
나한테 와서 잔소리 하더라만 마누라가 복수한답시고 맞바람이나 피우는 것보다
물건 사는걸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게 된게 무슨 잘못이냐. 그 바람에 병도고쳤다
이 말씀이다!"
그의 대갈일성에 동창회의 뒷소리 불만은 쑥들어갔다.
그건 어쨌건 거구의 부인은 식성도 좋아져서 물건 사기와 음식 먹으러 다니는
행사가 하루의 일과로 정착 되었다.
"어머니도 이제 문화생활 좀 해 보세요. 백화점만 다니지 마시고---."
영화관 초대권을 몇 장 갖고 왔다고 자신감이 붙었는지 정 이사의 아들이 잠시
방심한듯 흐트러진 말을 흘렸다.
원래의 취지야 좋았으나 어쨌든 휴화산 깊은 속의 '마그마'나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을 겁없이 건드린 꼴이었다.
"얘가 무슨 마음 먹고 날 훈계하는거냐? 네 댁이 시킨 말이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하여간 동서양의 성현들도 모두 말씀하셨다. 물건 사는게 남는거라고---.
내가 물건 산다고 돈을 달라고 했냐, 짐을 실어달라고 했냐. 그런데도 무슨 참견이냐,
너 누굴 가르칠려고 작정했니?
그래, 좋다. 나 이 무슨 영화 티켓인지 뭔지 구경 가지않겠다.
내가 영어로 하는 자막없는 영화를 볼 만큼 문화적이지도 못하고---."
정 이사 부인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거의 문짝 부서지는수준으로 삐거덕 거렸다.
"아이구, 영어 잘 하시잖아요. 집을 흥정하여 사실 때 보니까 여기 1.5세대인 저와
며느리 보다 훨 났습디다."
아들이 사랑스런 제 처를 위기에 몰리니 적장의 앞에서 희생양으로 목을 치며 백기를
매달았다.
며느리 보다 낫다는 말이 사태를 급기야 수습하였다.
"내가 하긴 뭘 잘하니. 기껏 '하우마치?'와 '디스카운트!' 밖에 모르잖아."
정 이사 부인은 인토네이션을 올리고 또 낮추었다.
"여보, 당신 리펀드란 말도 잘하더만. 물건 샀다 바꾸는데는 당신 영어만한 사람이
없어요."
정 이사가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아슬아슬하게 토를 달았으나 이제 장수 축에도 못끼는
그의 말은 국지전의 불똥 역할도 되지 못했다.
대첩을 거둔 부인의 심기를 조심스레 아우르면서 정 이사는 다음날 아침
버스를 타고 링컨 터널을 거쳐 종점인 42번가의 '오소리티 버스 스테이션'으로
부인을 모시고 나왔다.
아들이 원수구나,
이 녀석 때문에 소주 마시며 즐기는 잡담도 오늘은 포기해야 하는구나---.
정 이사는 연방 혀를 찼다.
"내가 예전에 뉴욕 출장 오면 여기 제일 밑 지하층에 가서 보스톤 가는 그레이
하운드를 타고 큰 놈 학교를 찾아갔지."
"아이구, 열번만 더 들으면 백번이오. 그 소리! 버스 값이 80불이나 했지, 그러면서
끝내는 레파토리 아니요?"
"늙고 보니 그 시절이 그립소."
정 이사의 진심이 담긴 술회였다.
"무슨 소리, 늙은이가 바람만 잘 피우더니만---. 앗 저거봐요."
부인은 비수를 꺼내다가 말고 머리 위의 전광판을 쳐다 보며 소리를 질렀다.
"월?".
"오늘이 13일이네. 재수 없는 날이잖아요."
정말 액정 전광판에는 13일의 11시라는 표지가 선명하였다.
"당신이 미국 사람이야? 우리가 그린 카드는 어쩌다 갖게되었지만, 결국은
대--한민국 종자 아니오---. 13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야."
"에이, 그래도 기분 내키지 않네요. 오늘 물건 사면 바가지나 쓰겠네."
"그건 그렇겠소. 물건은 사지말고 그러니까 영화 구경만 하고 갑시다."
정 이사는 '13일에 바가지'가 우려된다는 부분에는 서둘러 동의하였다.
"아니야요, 영화보고 나와서 물건도 못산다면 그냥 돌아갑시다. 물건도
못는데 무슨 재미로---."
"밥은 먹어야지 않소."
국면 전환 책략이 '먹는 일'에 있음을 백전노장 정 이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요. 밥은 먹어야겠네."
부인이 그 책략에는 얼른 속아주었다.
밥 시간이 조금 이르다는 핑게로 정 이사는 부인을 데리고 거기에서 가장
가깝고도 상영관이 많이 들어 차 있는 '로스 극장(Loews Theater)'
건물로 들어가서 영화 상영시간을 알아보았다.
대체로 오후 한시에 첫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들은 다시 가까운 델리 점으로 밥을 먹으러 들어갔다.
정 이사는 작은 푸드 박스에 식물성을 주로 담았으나 부인은 라지 박스에
고기류를 담기 시작하였다.
계산을 금방 마친 그는 이층 식탁으로 올라가서 그녀를 기다렸다.
20분도 더 경과하여서 그녀가 나타났는데 쇠고기, 돼지 고기, 닭고기에
찹수이, 라자니어, 없는게 없었다.
먹는 시간도 그녀는 한정없었으나 정 이사는 탓하지 않았다.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기꺼이 참아주는 가운데에서 불쌍한 이 뚱뚱보 아내에
대한 자신의 과오가 다소라도 감면된다면 그는 바퀴벌레라도 덤으로 씹으며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것은 무슨 생활의 불편을 모면하자는 생각에서도 아니었다.
젊은 시절부터 큰 키에 다이어트와 피트네스 관리까지 그렇게 정성을 쏟던
그녀가 이렇게 망가진 것은 오로지 자신이 벌인 죄와 벌이 아니겠는가.
정 이사는 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지다가 이어서 자신도 불쌍하다고 생각되었고
무릇 중생이 모두 가이없이 가련하게 느껴졌다.
이 시대의 성자 탄생이 아니라, 세월과 나이가 성자를 키워냈다.
정 이사의 부인은 다이어트 코우크까지 라지로 마시고나서야 겨우 점심이
끝났다.
시계는 이미 1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들은 '로스'로 서둘러 갔다.
그들의 발걸음을 관심있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시니어 경보 시합에 대비하는
동양계 늙은이들의 모양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티켓 박스 앞에서 그들이 스무개도 넘는 프로그램을 검토하여 보니 대부분이
이미 시작하고도 한참이었다.
"무얼 볼까?"
정 이사가 물었다.
"밥 먹으며 그런 생각도 못해두었어요? 아무거나 볼래요."
부인의 말이었다.
"시작한지 가장 가까운 프로에 Exorcism of Emily Rose라는게 있네,
그게 돟겠어. 옛날에 우리나라에도 엑소시즘이라는 영화가 속편까지 들어
왔지 아마. 그러니 내용 짐작도 편할 것이고 구경하기에 제일 편하겠네.
이게 퇴마록 같은 내용일꺼야---."
"오 마이 갓, 난 그런 무서운 영화는 못봐요. 이 양반이 여자들 입장은 생각지도
않는다니깐. 이런 양반이니 그 젊은 년도 내말 듣고 잘 떠났지---."
"이 사람아, 뉴욕까지 와서 또 그 미혜와의 전쟁 이야기야. 하여간 상영 시간으로
봐서 그거밖에 없네."
"미혜 이름까지 기억하는걸 보니 내가 지옥까지 따라가서라도 그 사고 친 이야기는
계속 해야 내 반분이라도 풀리겠네."
정 이사는 못들은체 하고 중앙에 있는 티켓 박스의 아가씨에게 초대권을 내
밀며 '엑소시즘'이라고 말하자, 아가씨가 표를 주면서 "업 스테어즈, 룸 써틴 이라고
일러 주었다.
오 마이 갓, 13일의 13번 상영관이네---.
정 이사는 차마 그 말은 부인에게 미리 못하고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탔다.
업 스테어즈라고 하더니 타고 보니 상영관은 3층이었다.
"여보, 팝 콘과 아이스 크림 사와요."
부인이 또 먹는 것을 주문하였다.
잘되었네, 그런 걸 잔뜩 사서라도 어떻게 국면 전환을 해보자.
정 이사는 먹거리를 양손에 잔뜩 들고 말없이 13번이라는 숫자가 있는 쪽으로
가서 조용히 문을 밀었다.
"오 마이 갓! 13일에 13번 관이네. 여보, 나 안들어갈래요."
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쉬이!"하는 소리가 안내하는 흑인 여성으로부터 나왔다.
부인은 할 수 없이 검은 커텐 안으로 따라 들어와서 정 이사가 앉은 옆에 털퍼덕
주저 앉았다.
얼마 안되는 관객들이었지만 어둠 속에서 시선이 내리 꽃혔다.
영화는 이미 시작하여서 누군가가 이미 죽었고 용의자인 신부님은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재판도 이미 상당 수준 진행되어 있엇다.
그 사이에 벌써 피고가 되어 죄수복을 입은 신부님을 변호하고 있는 변호사는
뜻밖에도 여성이었는데 다만 의지와 신념같은 것에 찬 단호한 얼굴만은 일단
관객들에게 안도의 숨을 쉬게하였다.
다만 날카롭고 빈틈없어 보이는 남자 검사가 좀 마음에 걸렸으나 누가 이 시대에
남자 법조인을 두려워하랴.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 이사는 피식 혼자 웃었다.
벌써부터 누구편인가---.
재판장도 이 페미니즘 시대에 걸맞게 배려가 되었는지 여성이 맡고 있었다.
특별히 앞뒤가 트인 여성의 이미지가 부각되어서 남자 검사와는 대조가 되었다.
그러나 재판은 신부님 측의 입장에서 보면 난항일 뿐이었다.
검사가 증인으로 세운 의학계의 권위자들은 하나같이 신부의 유죄를 주장하였다.
의사의 치료를 신부가 중단시키고 피해자인 에밀리라는 여대생의 몸에서 악마를
쫓아내야한다고 엑소시즘 의식을 강행한 것이 죽음의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음산한 음향효과와 여주인공의 끔직한 연기는 이 영화가 어쨌든 공포영화임을 실증
하기 시작하였다.
여자 변호사가 고용되어 있는 로펌의 대표 이사는 지금까지의 재판 상태가
불리하게 돌아간다며 이 재판에서 패소하면 그 여자 변호사는 파면감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었다.
이런 설정도 이 시대의 또 하나의 악마성의 재현이라고 정 이사는 속으로 움칠하며
생각해 보았다.
"이건 한창 때의 내 모습인데---."
늙으며 약해진 그는 속으로 탄식하며 스크린을 바로보지 못하였다.
여자 변호사는 재판의 전략이나 작전과 전혀 무관치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삶과 관련한 일반적인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여자 변호사는 신의 존재에 관한한 "불가지론자"라고 신부에게
고백을 하였다.
불가지론자라는 설정에 정 이사는 자신의 입장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영화 속에서의 이러한 설정은 이야기의 진행에 도식화를 막기 위한 사려깊은
장치이자 배경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떠나서도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 불가지론적이지 않을까.
과학 시대의 도래와 함께 한 때는 무신론자들이 판을 쳤고
니체 같은 철학자는 조로아스타를 시켜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라고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였지.
그런데 이번 루이지아나 쓰나미 현상을 보라구---.
이게 인류에 대한 신의 어떤 경고는 아닐까.
아이구 머리 아파, 불가지론이야---.
그리고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악마와 천사의 대결장에 출전하는 변호사라야
관객의 공감과 동의를 더 잘 얻어낼게 아니겠는가.
영화 제작자들이야 이런 시대정신과 대중의 정서를 파악하고 영화를 만드니까
관객을 모으는 게임에서 승자가 되는게 아닐까.
아니지, 어림도 없는 소리 말라구.
브로드웨이에서 도박판을 벌이는 제작자들이 얼마나 많이 흥행에 실패하여
깨어져나가나.
역시 불가지론이야.
장사군의 세계를 이제 벗어나 다시 청년 시절의 순수 열정 같은 것을 찾아가는
길목에 서있는 자신을 애써 강조하며 정 이사는 적어도 보편적이만은 아닌
어쩌면 현학적 의미라도 영화 속에 부여하고자 애를 썼다.
기괴한 영화의 영상이 진행되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부인은 정 이사의 팔을
꼭 끼고 있었다.
보고있는 영화가 오늘날의 막가파 수준으로는 기괴성이나 공포감의 조성에서
어림없었고 또 그럴 의도도 없는 것 같았으나,
어쨌든 예사로운 영화는 아니었고 애초에 끔찍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들어온
영화라서 부인 입장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었다.
어쨌거나 묵직한 몸을 구성하는 근원인 부인의 푸실푸실한 살이 정 이사의
반소매 맨살에 밀착되자 그는 닭살 같은게 돋으려는 본능을 꾹 눌렀다.
"너 자신을 알라---."
그런 이상한 환청이 영화의 배경음악과 섞여서 돌비 시스템 사이로 들리는듯
하였다.
고대 희랍 시절, 델포이의 신전에 붙은 잠언이 바로 그런 말이 아니었던가.
"저기 자꾸 나오는 퍼제션(possesion)이란 소리가 무슨 뜻이야요?"
그녀가 남편의 귀에다 대고 낮은 음성으로 물었으나 장 이사에게는 천둥처럼
들려왔다.
"조용히 좀 하게. 빙의 현상이라던가 뭐 그런거야. 신들렸다는 이야기---."
"어마나, 그럼 귀신이 씌였다는 이야기 아니야? 나 도저히 끝까지 못있겠네.
먼저 나가 있을테니 당신은 다보고 나와요."
"멀리 나가지 말어."
정 이사는 건성으로 답을 하며 대사에 귀를 모았다.
미국 주재원 생활 기간도 짧지 않았건만 귀국해서 너무 오래 되었나,
나이 탓인지 자막없는 영화가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공포와 괴기의 화면으로 승부를 낼려고 한 영화가 아니라 신의 문제,
성경의 욥기와 같은 무거운 주제를 안고있는 내용이어서 이거참 주제 파악을
못하고 들어온 셈인지 아니면 명퇴 이후의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그에게
오히려 딱 맞는 영화인지 하여간 이야기는 한치의 오역이나 오인을 허용치 않으며
본론과 결론을 동시에 이끌어 끝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증인으로 나온 이름을 드날리는 정신분석학자들은 신부의 엑소시즘을 인정할
수 없는 원천적인 한계가 있었다.
근대 심리학이 종교의 영역을 가로 타넘은지가 벌써 한세기도 더 지났지 않은가.
이 황금 알을 낳는 내면 심리 세계, 이 철밥통을 하느님의 이름으로라도 양보할
교수나 학자들은이 결코 아닌 토양의 이 황야에서 신부와 여자 변호사는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자, 이제 배심원들을 설득할 마지막 경주에서 검사는 정황과 이론에서 단연코
앞서고 있었다.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들의 딸일 수도 있는 젊은 처녀가 약간의 심리적 방황을
하다가 정신과 의사의 현대적 약물 치료를 받으며 거의 다 나아가는 도중에 엉뚱하게
또 억울하게도 신부가 그 현대 의학의 치료를 물리치라고 하고 엑소시즘 시술을 하다가
이 젊은이를 죽게 만든 것입니다.
이 가련하고 청순한 처녀에게 무슨 마귀가 씌었다니 하는 건 하느님의 세계 자체를
오독, 모독 하는 것입니다."
배심원들의 마음이 출렁거렸다.
그러나 변호인 측에서도 더 많은 반론을 위한 증인들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새로 나타난 증인들은 에밀리가 평소에 앓고 있았던 정신 이상이 단순치가 않았음을
차례로 증언한다,
에밀리의 부모조차도 그런 점에서는 억지를 쓸 입장이 못된다.
마침내 에밀리의 보이 프렌드가 마귀에게 짓눌려 괴로워했던 그녀의 처절했던 고통의
장면들을 생생하게 증언함으로써 이야기는 단순치 않은 국면으로 들어간다.
이제 문제는 다시 평행선 상에 놓이고 관객들은 양극단의 중간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당장은 영화 속의 배심원들이 그 한 가운데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때 정신분석학, 심리학, 그리고 심령학의 모든 분야에서 권위자로 통하는 학자가
에밀리를 치료한 증거를 갖고 증인으로 나와주게 되었다.
특히 그가 갖고 있던 악마의 부르짖음이 수록된 녹음 테이프와 에밀리의 처절한 자기
고백 같은 고통의 목소리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악마의 조화인지 증인이 되기로 약속한 그는 바로 그 전날 변호사가 보는
앞에서 교통사고로 죽는다.
어쨌든 재판정에서는 증인이 없어져 버려서 다소 설득력과 신뢰도가 떨어지긴 해도
그 녹음 테이프가 새로운 증거로 채택되어 모든 사람들이 직접 듣게 된다.
녹음의 내용은 일단 악마의 존재에 관한 설득력을 갖는다.
문제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어찌하여 이 평범하고 죄없는 처녀의 몸에 악마가
들어가 서식하여 마침내 그 숙주가 되는 처녀를 파멸게 했느냐 하는 점이었다.
사실 이 주제는 욥기를 위시하여 신,구약에서의 수많은 의문, 인간적 인식의 한계를
넘는 헤아릴길 없는 의문의 한 예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 때 성모께서 나타나 메밀리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 섭리는 말하자면 이런 억울하고도 터무니 없는 상황을 세상에 알려야 악마의
실재적 존재를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에밀리에게는 선택의 기회도 주어졌다.
이 섭리를 위하여 그대로 죽음에 이르는 길로 나아가겠느냐, 아니면 다시 옛날의
평범하고 평탄한 길로 돌아가겟느냐는 선택이엇다.
에밀리는 이 섭리를 받아들여서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존재 이유, 레종 데트르를
찾고자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서원을 하며, 그것이 바로 죽음에 이르게 한
전말이었다.
이런 내용의 술회가 테입에는 모두 들어있었다.
'믿거나 말거나'는 물론 관객, 아니 배심원들에게 첫번째로 돌아가는 몫이었고
그것은 곧 평결로 나아가는 근거가 된다.
배심원들은 평결 쪽지를 재판장에게 넘겼다.
"유죄 평결이 나올거다, Guilty! I bet million bucks"
평소 도박을 좋아하는 정 이사가 몸을 부르르 떨며 단정했다.
부인이 옆에 있었으면 당장에 패를 걸었을 것이라고 그는 아쉬워했다.
욕하면서 배운다고 맨날 도박판에 코를 박고 있는 정 이사를 나무라면서 어느듯
부인도 고스톱은 기본이고 카드 놀이, 슬롯 머신 등 기웃거리지 않은 도박판이
별로 없었다.
과연 평결은 유죄였다.
검사는 차가운 미소로 결과를 즐겼고 여변호사와 신부는 낭패와 실망의 심정을
표정으로 감추지 않았다.
이제 폐정이 되려는 순간 배심원 대표가 발언을 신청하였다.
"권유의 말, 리커멘데이션"을 하겠다는 것이다.
검사는 즉각 이의를 제게했으나 재판장은 이를 수락하였다.
규정과 전례가 모두 있다는 것이다.
배심원 대표가 진지하게 무어라고 권유의 말을 하였다.
"제일 텀 크레딧 어쩌구 저쩌구 블라 블라 블라---"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아니 무슨 크레딧 카드 까먹는 듯한 소리를 주리 대표가
하자 여판사는 만면에 미소를 띄고 그것을 수용한다며 방망이를 쳤다.
장면은 완전히 역전되어 여변호사는 신부와 얼씨안았고 검사는 벌레를 씹고 있었다.
로펌의 대표가 얼른 여변호사에게로 와서 이제부터 회사의 "파트너" 지위를 제의하는
것도 이 순간이었다.
파트너라면 최고 임원진을 뜻하는게 아닌가, 보드에 함께 앉을 자격을 말하는
것이지---.
정 이사는 공연히 셈이 나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 마지막 권유의 말이 무슨 뜻이었지.
무슨 뜻이 담겨서 갑자기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평결이 뒤집혀졌단 말인가.
정 이사는 알 수 없었던 마지막 말의 내용과 파트너로 승진한 여자 변호사의 행운에
공연히 짜증과 셈이 나서 느릿느릿 객석을 빠져나왔다.
둘러보아야 내용을 물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영화의 본고장, 브로드웨이라고 해도 평일날 낮에 극장에 들어와 앉을 한가한
사람은 별로 눈에 뜨이지않았다.
그런데 마침 명찰을 단 지적인 얼굴의 마르고 키큰 흑인 여성이 나타났다.
정 이사는 그녀를 불러세우고 다짜고짜 엑소시즘을 보았느냐고 물어보았다.
요근래 마른 사람만 보면 눈길이 가는 정 이사였다.
그런 새로 생긴 습성이 용기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웃으면서 그 여성은 보지 않았노라고 했다.
다른 여러가지 로맨틱 한 영화가 많응데 그런 무서운 영화를 왜 보겠냐고 하더니
사람을 불러 세운 이유를 물었다.
"내가 저 '에밀리 로즈의 엑소시즘'이라는 영화를 방금 보았는데 피의자인 신부가
유죄 판결을 받고도 이상하게 상황이 역전되면서 무죄 상황이 되니 곤혹스럽다---.
나 좀 살려주시오, 하하하."
정 이사가 너스레를 떨었다.
살려달라는 농담에 그 여인이 관심을 보였다.
그 지적인 흑인 여성은 마침 13번 상영관에서 늦게 나오고 있는 젊은 남녀 한쌍을
불러세우더니 마지막 장면을 좀 설명해 보라고했다.
"블라 블라 블라---."
두서없이 줏어섬기는 남자 녀석의 말을 끊더니 흑인 여성이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대목에서 '크레딧 카드' 비슷한 이야기가 또 나왓다.
빌어먹을 크레딧 카드---, 정 이사가 우리말로 이죽거렸다.
"당신 여기 사람이오? 외국인이요?"
그녀가 정 이사에게 물었다.
정 이사는 그린 카드는 있는 사람이지만 지금 당장은 외국인으로 방금 온 여행객에
다름아니라고 했다.
"아, 그러니 사법제도가 다른 나라에서 왔군요. 설명을 좀 해줘야 알겠군요---."
이 때쯤 되자 정 이사도 무언가 대충 짐작이 가기 시작했으나 정확한 것은 역시 그녀의
설명과 함께 따라왔다.
설명은 대략 이러했다.
배심원들은 일단 전문가들의 증언에 따라 신부를 유죄로 평결한다.
이것은 사람이 만든 법률, 즉 사실 위주, 증거와 증인 채택주의 정신의 산물이다.
변호사가 변론을 하면서 "Facts leave us no possiblity"라고 처절하게 부르짓던
구절이 정 이사의 귓전에 메아리쳤다.
"그런데 배심원들은 마지막으로 리커멘데이션, 즉 권유문을 채택하였지요.
그것이 곧 jail term crdit으로 지금껏 재판을 받기 위하여 감옥에 들어가 있었던
기간만큼만 형량을 선고해 주기 바란다---, 그런 내용입니다. 명 평결이네요.
하하하."
"아하, 이제 알겠소. 고맙소. 명 설명이오, 하하하."
두 사람은 분위기가 살아서 로비 쪽으로 슬슬 걸어나오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정 이사의 부인이 도끼 눈을 하고 나타났다.
"무슨 작난을 치고 있어요? 그 사이에!"
흑인 여성의 마른 몸매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아, 부인이시군요. 그럼 여기에서 방금 들은 내용을 부인께 한번 설명해 보세요.
특히 jail term crdit 내용을 꼭 넣어서---."
"아니, 이 여자가 무슨 크레딧 카드 이야기야?"
부인이 또 쌍심지를 돋우었다.
그녀도 또 크레딧 카드, 아니 크레딧이라는 말에 걸려 자빠질 판이었다.
정 이사는 얼른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서 영화 이야기와 끝 부분의 반전을 두
사람이 다 알아듣도록 설명했다.
흑인 여성은 만족한 듯이 사무실로 사라졌다.
"이 놈의 동네는 영화 프로 설명서도 안 파네. 옛날에 우리 그런거 많이 모으기도
했잖아요?"
"당신같은 쇼핑 도사가 못 찾았다면 확실히 안파는 모양이구려. 글쎄 뉴욕 타임스
일요판이나 연예 오락 신문 같은 데에 상세히 나오니까---, 장사가 되겠어?
그런데 당신 그 사이에 또 쇼핑했구나!"
정 이사가 붉은 별이 찍힌 쇼핑 백을 든 부인의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메이시 백화점"의 표시가 찍힌 두툼한 쇼핑 백을 그녀가
들고 있는것이 아닌가.
"내가 전에 보아둔 것이 있었어요. 택시 타고 갔다오니 금방이대요---. 백화점이
오늘 까지 세일기간이라 특별 할인 카드까지도 써먹었고---, 호호호."
"놀라자빠지겠네. 무얼 얼마나 주고 샀누?"
"당신은 내가 뭘 얼마주고 샀건 알 권리가 사라졌잖아요. 하여간 천불은 훨씬
넘어갔으니 그렇게 아세요. 천불어치만 사면 13일날 천벌을 받을 것 같아서
그 보다는 훨씬 더 많이 샀다오."
"맙소사, 하여간 나는 속에서 천불이 나네. 오늘이 13일인건 틀림 없구나---.
내가 불명예 퇴임을 한 것도 이 사람 짓이 틀림없어."
정 이사의 체념이었다
"자아, 그걸로 오늘의 엑소시즘이나 되었으면 좋겠소."
정 이사가 그 정도에서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데 어림도 없었다.
"왠걸요. 세일 텀 크레딧(sale term credit)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요?
이제 블루밍데일 백화점으로 가요. 택시!"
부인의 부르짖음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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