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사랑이란 무엇인가 (2)

원평재 2005. 9. 29. 19:51

사랑이란 무엇인가 (2)

 

"그동안 만날 기회를 그토록 피하더니?”

최 교수가 의문문으로 답장 메일을 띄었다.

 

그녀의 답신은 다시 진지한 평서문이었다.

“그랜드 테턴 마운튼을 보면 지난날들의 방종과 일탈이 가슴 아파요.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이 영봉들은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상징으로 나오는 바로 그 산정

이지요. 고개를 들어 그 산정들을 보면 지고지순한 감상이 들어요.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서 그런가 이 산록을 끼고 살면서 옛날 일들은 다 해탈했어요.

아버지도 벌서 돌아가셨어요.

사람들을 많이 괴롭혀 그런가, 제 머리는 일찍 하얗게 셌어요.

사람들 사이에서 못 찾겠으면 흰 머리칼 동양인 여자만 찾아보세요.”

 

 

(그랜드 테튼 산맥은 카트리나 태풍의 영향으로 영봉들이 보이지

 않아서 유감입니다.)

 

답신을 받으며 최 교수는 눈시울을 붉혔고 왈칵하는 심장의 동계를 느꼈다.

부정맥도 두서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론 아내에게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부인이 여행을 막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뉴저지의 누이 집에 오던날 최 교수는 즉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나 잘 도착했소. 시누이 가족들도 보니까 다 잘사네.”

“당신 집안이 모두 당신 닮아서 허랑해요. 시누 한사람만 빼고. 시누는 야무지니까

살겠지요. 단디 하소.”

 

“뭘 자꾸 단디하라는 건가?”

“내가 돈 때문에 카능게 아니라요. 단디 하소. 내가 다 알아요.”

최교수의 가슴이 다시 철렁하고 고동쳤다. 이 마나님이---.

“여보, 사랑하오.”

엉겹결에 나온 최 교수의 말이었다.

 

“세상에 살다보이 별 말을 다 듣네, 각중에---, 듣기 싫소 마. 심장도 좋지 않은

양반이---. 실없는 생각 말고 단디 하소.

혹시 그 아가씨 만나거들랑 내 안부도 전하이소. 인자는 유감없다고.

하기사 그 사서 아가씨도 인자는 마이 늙었겠네.” 

 

마누라가 귀신이구나---.

새벽의 케네디 공항에서 최 교수는 누이가 싸준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탄식하였다.

그 새벽, 솔트레이크 시티 행 델타항공을 타는 동양인은 최 교수 혼자인듯 하였다.

요즈음 미국 항공사의 사정이 어려워서 네 시간 이상의 여정이지만 식사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누이가 싸준 샌드위치였다.

 

비행기는 만석이었으나 다행히 창 측이어서 그는 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주스와 크래커를 제공하는 스튜어디스의 손길에 잠이 깨어보니 옆 좌석에는 초로의

백인 할머니가 두꺼운 책의 초반을 읽고 있다가 눈인사를 보냈다.

 

그녀도 주스를 마시려고 덮는 책을 보니 제목이 “Love"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역시 비슷한 나이의 백인 할아버지가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편안한 자세의 잘 생긴 얼굴이었다.

하긴 할머니도 한 때는 지역사회의 대표 미녀였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노인네가 무슨 사랑 타령으로 'Love'라는 책이람---.

그래도 놀랍군, 저 나이에---.

두서없는 생각에 뒤채이며 그가 다시 그 책의 작가를 보니 놀랍게도 “토니 모리슨”

이었다.

토니 모리슨이라면 미국의 흑인 여류작가이자 노벨 문학상을 몇년 전에 받은 사람이

아닌가.

 

그녀의 작품에 “비라비드(Beloved)"가 있었고 그 작품은 흑인 여성들이 대를 이어

겪는  고난과 증오와 용서의 역사가 영혼의 세계, 영교의 경지로 엮어지며 전개되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런 역사성이나 영교의 부분들이 평소 최 교수가 연구하는 민속학의 변경에 맞물려

있는 작가이자 작품이어서 그는 움찔하였다.

 

“이 책의 착가 토니모리슨이 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여류작가가 아니던가요?”

흑인이라는 표현은 얼른 혀 바닥으로 말아올려버리며 최 교수가 말을 걸었다.

“그래요. 훌륭한 작가이지요.”

그녀가 반갑게 동의하였다.

 

“이 책이 신간인가요?”

그가 진정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글쎄요---.”

두 사람은 표지를 이리저리 함께 뒤적였다.

2005년도 2월 발간이었으니 최 신간이었다.

“Brand new!!"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로맨스 같은 내용입니까?”

이윽고 최 교수가 물었으나 물론 그런 건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달리 물어볼 재간이 없어서 그랬을 뿐이었다.

 

“아이구, 천만에요. 어떤 남부의 남자가 자기 손녀 딸의 친구와 사랑을 했는데

그 늙은이는 죽었고---.

소설에서는 그 이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다루고 있답니다.

나도 겨우 삼분의 일 밖에 읽진 못했지만---. 휴먼 드라머가 항상 복잡해요.

특히 사랑이란---.”

그녀가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자기 영감님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그렇겠군요. 단순한 러브 스토리나 로맨스 이야기는 아니리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부인께서는 행선지가 옐로우스톤인가요?”

“아니오. 우리는 선 밸리로 간다오. 젊은이는 솔트 레이크 시티에 내려서 어디로

가시오?”

“고맙지만 저도 젊은이는 아니랍니다. 옐로우스톤으로 관광을 갑니다.”

“좋군요. 혼자서 가나요?”

“아니, 솔트레이크 시티 공항에서 많은 코리언들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LA 사는

분들이 제일 많을 것이고 서울에서 온 분들도 있을 것이고---. 저는 일시적이긴

해도 뉴욕, 뉴저지의 한국 대표인 것 같군요. 이 비행기 안을 둘러보니 아시안은

뿐인 것 같아서요. 하하하.”

 

“하하하.”

할머니도 웃더니 말을 이었다.

“선 밸리는 50년 만에 처음 간답니다. 처음 간 게 1950년대 중반이었어요.”

“신혼 때 가시고 이번에 50년만의 금강혼 기념인가요?”

“아니오. 이 신사 하고는 중년에 만난 두 번째 결혼이라오. 사랑이란 누가 무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잖소.”

 

백인 할머니가 자신의 이혼과 재혼 경력을 너무나 당당하게 이야기 하여서

듣는 최 교수가 오히려 좀 민망해졌다.

그는 앞의 시트 포켓에서 “스카이 델타 9월호"를 꺼내면서 표지를 펼쳐보았다.

“모뉴먼트 밸리가 표지로 나왔군요.”

할머니가 화보를 보고 얼른 알아내었다.

 

“이게 그 모뉴먼트 밸리입니까?”

최 교수는 커버스토리가 실린 페이지를 찾아가 펴면서 물었다.

“그렇지요. 애리조나와 유타에 걸쳐있는 대장관이지요.”

그녀가 대단하다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하면서 대답하였다.

그 설명문은 “유현하기 그지없는 기시감(erie deja-vue)"이라는 표현도 부제로

달고 나왔다.

 

장옥희 사서는 이메일에서 말하기를, 남편과 공저한 책의 사진은 대체로 자기가

모두 찍었는데 특히 애리조나의 호피와 나바호 부족이 사는 '모뉴먼트 밸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혹시 최 교수도 아느냐고 물어보았었다.

당시에는 모른다고 답을 했는데 이제 보니 예전에 그랜드 캐년 갈 때 그리로 돌아서

들어갔던 지역이었다.

아, 기시감이라---, 그제서야 최 교수는 갑자기 혼령에라도 씌인듯 몸을 떨었다.

 

“나이 들면 선 밸리로 와서 한번 지내보시면 좋을 것이오. 헤밍웨이도 인근에 있는

케첨에서  지내다가 자살하였다오.”

“아, 아이다호의 케첨!”

 

최 교수가 평소 좋아했던 불패의 화신, 헤밍웨이가 자살한 곳이 마이애미의

키 웨스트나 북 미시간이 아니고 하필이면 아이다호의 케첨인지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결국 용맹스러웠던 그도 노인들의 천국에서 요양원 신세를 지다가 사라졌구나---,

최 교수는 탄식하였다.

 

 

 

“오, 솔트 레이크!”

할머니가 창 밖을 보며 소리쳤다.

허연 소금 끼가 잔뜩 낀 푸른 호수가 여름에 내린  흰눈처럼 신비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정상 바로 밑 산록으로는 계절을 잊은 노란 단풍이 수채와의 붓질처럼 쓱쓱 문질러진

모양을 보이고 있었다.

 

에어컨 때문인지 서늘한 한기를 느끼게 하는 공항 로비에 한국인들이 모여서서

뉴욕, 뉴저지 대표 선수인 최 교수를 기다리고 있다가 초면 인사들을 나누고

예정에 따라 서둘러 모르몬 교회의 본산으로 향하였다.

그렇지, 여기 솔트 레이크 시티는 모르몬 교의 본산이 아니던가,

 

 

 

 

큰 성전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신도들과 봉사자들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예약이 된 한국 출신의 젊은 안내여성은 자신을 전도사의 직분이라고 하면서 

모르몬 교에 대한 설명을 하고나서 그들의 성전 이곳 저곳을 안내해 주었다.

오래 전 최 교수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에 이곳에 있는 명문대학 “브리검 영

유니버시티”의 합창단 학생들이 찾아와서 공연을 하고 학생 대표들과 좌담회를 했던

기억이 났다.

 

그들의 선한 얼굴 속에 신의 사랑을 향유하는 만족감이 가득하여서 대학 신문사의

기자로 참석했던 최 교수는 얼마나 감동이 되었는지 몰랐었다.

그들이 받는 일반적 오해, 곧 일부다처에 대한 교리에 관하여서 모르몬 교도들은 

그때나 이제나 열심히 해명하였다.

결국 서부 개척시대에 남자들이 자연 재해나 인디언과의 전투에서 많이 죽는데,

이때 생기는 과부들과 버려진 아이들을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데에

공동체의 책임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능력 있는 남성 생존자들의 밑에 이들의 피난처를 마련한 수단이었다는

설명이었다.

고난의 시대에 생긴 공동체 의식이었으며 이제 시련은 가고 그런 제도도 사라졌다고

한다.

교리에 관한 시비는 최 교수의 관심이 아니었고 사랑의 본질과 형태에 대한 그들의

대처 방식에 인간적 고뇌가 담겨있어서 인상적이었을 따름이었다.

아, 장옥희 사서는 무엇으로, 어떤 사랑으로, 어떻게 사는가에 최 교수의 관심이

다시 몰아쳤다.

 

이제 유타에 도착하였으니 저 드넓은 아이다호주의 감자 밭 속과 그랜드 테턴 밸리를

지나서 와이오밍의 잭슨 홀 롯지(Jackson Hole Lodge)에 빨리 도착하여 그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최 교수를 안절부절 못할 지경으로 몰아갔다. 

 

사실 얠로우스톤 국립공원의 하이라이트는 와이오밍의 “올드 페이스풀 간헐천”이었지만

최 교수에게 그런건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모르몬 성전을 관광하고 나온 관광객 스물다섯 명을 실은 대형 리무진은 빨리 달렸다.

솔트레이크 시티의 염분 가득한 호수가 주변의 산들을 병풍처럼 두르고 앉은 모습은

항상 분지에서만 자란 최 교수에게 고향 생각을 떠올리게 하였지만 그 규모에서는

어른과 아이의 차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국토의 크고 작음 때문이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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