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무엇인가. (1)
지방대학에서 민속학을 가르치는 최세출 교수가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옐로우스톤'
관광단에 끼인 것은 외관상으로는 일석3조 쯤 되는 거동이었다.
그러니까 우선 목적은 단순 관광이었다.
옐로우스톤의 간헐천, 초등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본 그 물기둥이 솟는 장관을
한번 보겠다는 궁금증의 해소 차원이었다.
두 번째 순서쯤에 최 교수가 전공하는 전문학술 분야의 자료 수집이 있었다.
바로 옐로우스톤 지역에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을 탐사, 탐방하고 필드 서베이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대학에 제출한 방학 중 해외여행 계획서의 첫쩨 목적으로 올라간 내용이었고,
나아가서 외부에서 받은 연구비의 사용 내역에도 크게 기여할 참이었다.
세 번째는 몇 년전에 뉴저지로 이민을 한 누이를 오랜만에 만나보는 순전히 개인 가사에
속한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끝으로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마지막 목적에는 “오드리 옥희 케네쓰” 여인을
만나는 일이 숨어있었다.
유림의 목소리가 아직도 센 지방 유지의 딸인 최교수 부인은 고3인 아들 때문에 이
시점에서 동행은 엄두도 내지 못할 처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최 교수가 이곳 지방 대학에 오래 전에 임용될 때 한 역할을 하였는데
지금은 작고하여 선산에 누워계셨다.
임용 때의 역할이란 되지않을 일을 만들었다는 것은 아니고 손해를 보지는 않도록
하였다는 뜻이다.
“단디 하소.”
여름 방학 두 달 계획으로 뉴욕 행 비행기를 타러 상경할 때 최 교수의 아내 유 여사가
던진 말은 이 말 한마디였다.
유림의 딸로서 과묵이라는 덕목을 지니고 살아오는 유 여사는 비싼 SLR 기종의 새
디지컬 카메라, 일만 장까지 찍을 메모리 칩, 20기가의 저장용 USB 등등을 뉴욕에서
사고 중서부까지 가기 위하여 큰 돈을 갖고 떠나는 남편에게 담담하게 이 말 한마디만
던졌다.
대학의 정원이 국책으로 묶여있던 시절에 어떤 권력자의 시혜 같은 것으로 이
지방대학에 민속학 전공 학과가 허가될 때만 해도 대학은 성역이었고 오로지 대학
진학을 위하여서 학생들은 학과나 전공을 따지지 않고 몰려 들었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자유 전공제로 들어온 학생들이 2학년으로 올라갈때에는 모두 취직이 잘 되는
경영학이나 IT 쪽으로 진로를 택했고, 인문학에는 찬바람이 돌았다.
이 어려운 때에 최교수가 발휘한 학문적 기지는 놀라웠다.
바로 영상학으로의 발상의 전환이었다.
'영상 문화학', '영상 민속학', '게임 삼국유사', '영상학 산책', '성과 영상학' 등등의
최교수가 설강한 과목들은 비록 지방 대학일지라도 수강생들로 인산인해였고
관련 부문에 대한 그의 저서는 날개가 돋친듯 팔려나갔다.
처음 그가 민속학 교수로 부임했을 때만해도 좋게 말하여서 대학은 만고강산이었고
연구실은 성역이었다.
UCLA에서 '소수민족 민속학'으로 학위를 하고 온 그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이 지방대학
에서는 마침 자리가 났고 그 전에 부모들과의 인연으로 통혼말이 오고간 이 지역의
유지도 앞 서 말한데로 애를 써서 그는 약관에 교수가 되었다.
차제에 두 집의 청춘남녀는 곧 결혼을 했고 아이가 태어났으며 만사는 형통이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부터 대학사회에는 구조조정의 문제가 나오기 시작했고
십여년간을 동료 인문학 교수들이 철밥통을 부여안고 가열 찬 반대 투쟁을 전개할 때,
그는 급속히 발달하는 인터넷을 통해 모교 UCLA 은사들의 동태를 주시했다.
은사들은 후기 산업사회의 메가 트렌드에 발맞추어 이미 '영상 민속학'과 '영상
인류학'을 개척하고 있었고 최교수도 얼른 그 떠나가는 열차에 국제적 안면으로
동승하였다.
말이 쉽지, 이 새로운 조류를 탄다는 일이 지금도 그렇지만 초창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수많은 정보와 자료들의 홍수 속에서 그 홍수를 조절해주고 고랑을 파서 물길을 내면서
일기 예보까지 해 준 사람이 당시 막 취직이 되어 둘어온 도서관의 젊은 사서
장옥희였다.
서울에 있는 대학의 도서관 학과, 아니 이제는 이름과 성격도 완전히 바뀌어 문헌정보
학과를 나온 장옥희 사서는 마침 이 지방 국립대학의 사서 채용공고를 보고 응시하여
들어온 재원이었는데 새 시대의 문헌 정보학으로 중무장한 그 녀를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교수를 빼고는---.
정신적으로 새시대의 급변에 뜨겁게 달아오른 두 사람은 마침내 몸까지도 달아올랐으며
지방의 눈이 무서워 그녀의 집이있는 서울에서 영상보다 더 진하게 새 세상을 수용하였다.
생각해 보면 지금은 별 것도 아닌 영상 자료들이 10여년 전만해도 놀라운 신세계이자
최음제였고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면죄부를 발부하는 성채이기도 하였다.
표면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양가의 규수, 옥희는 왜 결혼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때로 방종과 일탈의 고수임을 최 교수에게 은근히 과시까지 하였는가---.
3년도 넘게 최교수는 자료 수집과 필드워크와 학회 활동이라는 거대 담론을 표방하며
주말이면 상경을 하였고, 장옥희 사서는 또 주말도 없다시피 지방대학에서 특근을
한다는 형식으로 서울 부모 집으로의 귀가를 기피하면서,두 사람은 영상 세계에서의
순수 학문적 열정과 타락 천사와 같은 양 극단을 두루 섭렵하였다.
이제 옥희의 눈매 가장자리에도 가냘프나마 잔주름의 예고가 얼핏 나타났다 사라지곤
할 즈음, 그녀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가 다녔던 대학의 외국인 교수 부인이 마침내 남편과의 이혼을 허락한 순간이었다.
물론 장옥희 사서의 집에서도 두사람의 사이를 알았을 때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결코 이혼을 해주지 않겠다는 부인이 있는 외국인 교수와의 사랑은, 딸과의 의절을
선언할 정도로 반대가 심한 아버지의 결정적 견제까지 겹쳐서 그녀는 지방대학의
사서로 자리를 옮기는 순간에 일단 최교수에게서 피항지를 찾은 것이었다.
외국인 교수는 물의를 피하여 일단 본국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 기간이 3년이었고 마침내 그녀는 거룩하게도 이혼을 성취한 미국인 교수를 만나러
미국으로 떠나갔다.
그 교수는 말썽을 두려워하여 미국에서도 중서부의 작은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놓고
있었다.
알고보니 그녀와 그 교수는 나이 차이가 17년이나 되었다.
최교수와의 나이 차이도 10년이었다.
엄부 아래 자라서 그런 가, 그녀가 추구한 두 남자들은 모두 그렇게 연상의 자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녀가 미국 대사관에서 영사의 인터뷰를 받기위하여 줄을 서던 날 최교수는 함께 있어
주었다.
뙤약 빛이 뜨거웠던 그날 양산을 받쳐들고 그가 물었다.
“아버지는?”
“끝내 의절하셨어요. 엄마가 힘들게 도와주셨지요---.”
그렇게 떠나간 그녀가 지금 와이오밍에 살고 있었다.
저명한 민속학자이자 환경론자인 케네스 교수의 부인으로서---.
한 가정을 해체하면서 첫 사랑을 획득하고도 벌써 20년이 지난 것이다.
최 교수와 장 사서는 그 사이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하여 가끔 안부는 전달되었고 발전하는 미국의 민속학과 영상학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가 있었다.
둘의 관계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미국의 모든 분야는 이제 모두 환경과 결부되어 있었다.
정치도 기업도 학문도---.
인디언 보호 구역이 있는 중서부의 여러 주들 가운데에서도 와이오밍 대학은 인근의
인디언 보호 구역이라는 유리한 조건과 함께 민속학 분야의 강자이면서 아울러
이제는 환경 분야에서도 인문학 쪽 접근에서는 선도하는 입장이라고 하였다.
케네스 교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제 선두에 서기에는 정년을 앞 둔 나이가 허락지 않았지만---.
“옐로우스톤 구경은 하셨어요?”
어느날, 최 교수의 인터넷에 와이오밍의 장옥희 사서로부터 메일이 들어왔다.
그랜드 테턴 밸리에 있는 '잭슨 홀 로지'에서 '세계 환경 북 페어'가 열리는데
'케네스 장옥희 공저'의 책도 출품이 되고 부부가 함께 환경 대회에도 참석하니까
오랜만에 한번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나 보는 것도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부부가 함께 오시기를 갈망한다는 PS가 의레적인 수준이었는지는 가름이 되지않았다.
(계속)
'단편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 연습 (둘) (0) | 2007.12.09 |
---|---|
사랑이란 무엇인가 (4회-끝), 코리아 페스티발 (0) | 2005.10.02 |
사랑이란 무엇인가 (3) (0) | 2005.10.01 |
사랑이란 무엇인가 (2) (0) | 2005.09.29 |
42번가의 엑소시즘 (0) | 2005.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