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사랑이란 무엇인가 (3)

원평재 2005. 10. 1. 02:50

리무진은 이내 유타를 벗어나서 아이다호를 향하였다.

아이다호 주립대학은 최교수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과 자매관계를 맺고

있어서 안식년 등으로 다녀온 교수들이 많았으나 한국의 북적대는 문화에 젖은

사람들이 있을만한 데는 아니라는 평가들도 나왔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만큼 긍정적인 요소이기도 하였다.

 

 

미국의 백만장자들이 최고의 휴양지로 치는 이 곳이 한국적인 문화와는 충돌하는 사연도 '환경 사회학' 같은데에서 한번 다루어볼 주제가 됨직도 하다고

최교수는 자못 깊이있게 생각해 보았다.

그런 생각이 옥희와의 상면을 초조히 기다리는 시간에 잠시나마 진통제의 역할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속도롤 낸 리무진도 그런 면에 한 역할은 하였다.

저 유명한 '그랜드 테톤 산'의 영봉들을 얼른 시야에 갖다놓았다.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미국 영화사인 '파라마운트 사'의 상징이 눈 앞의 현지에서 뽐내며 으스대고 서 있었다.

 

 

“저 산아래 흐르는 테톤 강가에다 텐트를 치고서 그 유명한 서부영화 '셰인'이

촬영되었던 장소입니다.

촬영 본부는 와이오밍 주의 잭슨 홀에 두고서 말이지요.”

 

강가에 있는 표지 동판 앞에서 기념사진인가 증명사진인가를 찍으며 가이드가

신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최 교수도 이미 솔트레이크 시티에서부터 사진은 수백장을 찍고 있었다.

물론 피사체에 자신이 들어가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하긴 이제 한국 관광객들도 증명사진을 찍는 수준은 졸업을 하고 있는 현상이

재미있었다.

누가 경치 사진에 자기 얼굴을 넣으랴---.

 

영화 ‘셰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진통제 효과가 사라지고 최교수에게는 다시

장옥희 사서의 생각이 생생히 떠올라 왔다.

어느날 그녀가 그의 위에서 열정을 쏟더니 잠간 멈추어 위엄을 한번 세우고는

이어 웃었다.

 

“싱겁게 무슨 짓이야?”

“셰인 알죠?”

“셰인? 아, 옛날 아란 랏드가 나와서 순식간에 총을 뽑은?”

“호호호, 아란 랏드가 뭐예요. 앨런 랫---.

그 영화도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 보면 나쁜 영화라고 봐요.

순진한 시골 촌부가 착한 남편 보다 용맹스런 서부의 사나이에게 말없이 연정을

품었으나, 그 사나이 셰인은 악당을 물리친 다음 촌부의 영웅이 되어 떠나간다는 남성 우월주의의 기념비적 작품이 아니겠어요?”

 

“그럼 착한 잭 파란스는 남성이 아닌가? 그리고 셰인이 언제적인데 미즈 장이

보았어?”

최 교수는 미즈 장, 그러니까 장옥희 사서가 요즈음의 페미니스트 영상계에서

들고나오는 서부 영화 새로보기 화두에서 조금 표절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다소 맥빠진 어조로 물어보았다.

 

“잭 파란스가 뭐예요. 팰런스이지. 그리고 지금 제가 표절했다고 생각하고 있죠? 사실 아이디어는 그럴지 몰라요. 하지만 성감대, 아니 공감대는 저와 폭넓고

깊어요. 깔깔깔”

두 사람은 서로를 간질어 대면서까지 웃고 또 웃었다.

 

“왜 웃으시죠?”

무슨 설명을 하던 가이드가 멋쩍은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최 교수에게 따지듯

하였다.

“아니오. 난 잭슨 홀에서 뒤쳐지겠다는 일정을 미리 부탁했으니 나중에 그거나

챙겨주시오.”

“잭슨 홀에 가까스로 작은 호텔 방을 하나 잡았답니다. 비용은 알아서 하십시오. 엄청 비싸니까요.”

 

“아, 교수님이 혼자 오신걸 보니 앨런 래드처럼 권총 뽑을 일이 있으신가 보네요?”

금방 사귄 일행 중의 미국 교포 한 사람이 부인들을 의식하지 않고 농담을 던졌다.

“권총이라니? 장총이실텐데.”

누가 또 거들었다.

리무진은 세속의 때가 묻은 농담들을 영산인 그랜드 테턴에 내다 버리면서 기세

좋게 와이오밍의 '잭슨 홀 시티'로 달려 들어갔다.

 

 

 

한 때 미국과 소련의 영수들이 정상 회담을 하고 동서간의 냉전 종식과 데탕트를

갖여와서 인류사에 신기원을 이룬 곳이 된 '잭슨 홀 로지'는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신뢰감 같은 것을 안겨주는 매우 특이한

건물이었다.

 

정문 앞에는 과연 '세계 환경 대회'와 '환경 북 페어'가 열린다는 플래카드가

요란하지 않게 붙어있었다.

아, 저 속에 케네스 부부, 아니 장옥희 사서라는 이름과 형상으로 더 절절한

바로 그 대상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기대에 최 교수의 가슴은 벅차게

뛰었다.

 

 

관광단 일행은 가이드의 안내로 2층으로 올라갔는데 거기 로비에 양국 정상이

앉아서 데탕트 조약을 서명한, "피스 테이블"이라는 조촐한 탁자와 의자가

있어서 증명사진을 찍어야했기 때문이었다.

 

최교수는 내색하지 않고 증명 사진도 포기한채 안 쪽의 컨퍼런스 홀로 발길을

옮겼다.

홀의 입구에는 참가자들을 접수하는 데스크가 있었으나 그는 일단 무시하고

안 쪽을 휘둘러  옥희의 모습을 찾았다.

아니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우선 하얀 머리칼의 아시안 여성을 급히 찾아보았다.

 

일찍 온 참가자들은 벌써 칵테일을 한잔씩 하고 있었고 테이블에서는 웨이터들이

와인의 콜크를 연회에 대비하여 위로 뽑아 올려놓고 있었다.   

입구의 건너편으로는 큰 유리를 사용한 거대한 창들이 참석자들의 시선을 뽑아

들여서 넓은 초원을 가로질러 마운트 테튼으로 훌쩍 던져주고 있었다.

거기 파라마운트사의 심벌, 그랜드 테튼 영봉들은 구름을 아래로 깔고 의연히

서 있었다.

 

그러나 하얀 머리의 동양 여인은 시선이 달리는 포물선 아래에 없었다.

최 교수는 그 큰 창 쪽으로 향하며 홀의 양쪽을 샅샅이 살폈으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창문 아래에는 서적을 잔뜩 쌓아놓고 판매하는 서적대가 있었는데, 문득

흰 머리칼을 휘날리는 옥희와 몹시 늙어보이는 노인이 함빡 웃으며 서있는

모습이 표지가 된 “The Faithful Earth"라는 두꺼운 책들 있었다.

 

지구의 생태 파괴 현장을 담은 옥희의 절묘한 사진술이 곳곳에 내재한 그 두꺼운 책은 속속 참석자들에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최 교수도 한권을 카드로 사서 가슴에 안았다.

마치 그 옛날 옥희를 안았듯이---.

그리고 그 너머 그랜드 테튼 영봉을 우러르고 그 아래로 흐르는 테튼 강과 들판을

다시 음미하였다.

 

강물 소리도 멀어서 들리지 않는 그 계곡에서 그 옛날 허름한 재개봉관 2류

극장에서 들었던 '조디' 소년의 “t셰인, 셰인, 캄백!”하는 소리가 들려오는듯

하였다.

최교수는 그 때 가까운 친구가 극장 밖으로 나오며 하던 말이 불현듯 생각났다.

“아따, 쪼디기가 쎈, 쎈, 하는 소리에 눈물이 날려고 하대!”

그 때 그 말은 울음이 아니라 웃음을 불러일으켰지만 이제는 추억이 울음을

불러 기회만 노리고 있는 듯 하였다.

 

아니야, 그 영화는 옥희가 말햇듯이 남성 우월주의와 빛나는 미국 서부개척사를

구축한 제국주의적 영화에 다름아니지.

그런 주장을 부르짖을 때에 더욱 빛나던 혹희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게 더 좋겠어.

최 교수는 울음을 삼키려는 듯 옥희의 음성을 상기하며 접수부 쪽으로 갔다.

 

“이 책의 저자들은 아직 등록하지 않았나요?”

“아, 그분들은 일찍 오셨으나 문제가 생겨서 병원으로 갔답니다.”

“무슨 사고라도?”

“단순한 심장 발작인 듯 했으나 더 이상 우리는 모릅니다. 케네쓰 교수가 바닥에

쓸어졌고 앰뷸런스가 와서 응급실로 데려갔어요. 그 이상의 정보는 없습니다.

책에 사인 받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어디 무슨 병원인가를 묻거나 알아보아야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최 교수는 일행이 실내의 영수회담 '피스 테이블'에서 사진을 다 찍고 바깥쪽으로

나가 건물 외양을 배경삼아 다시 사진을 찍는 곳으로 빨리 걸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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