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동부 캐나다 문학 기행

비에 젖은 몬트리올 단풍과 프랑스어

원평재 2005. 10. 20. 20:09

 

 

 

 

         (그리운 프랑스 어 거리 이름들과 화랑가의 다양한 그림들---)

 

 

 

(성 요셉 성당의 내부 일부, 기적의 결과로 목발을 버리고 떠난 흔적들이

수집되어있다. 전체로는 이보다 몇 갑절 더 전시되어 있었다.)

 

 

 

(북미주 최대의 성 요셉 성당이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오리지널 성당이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 있던 수사의 영험한 힘이 큰 교회가 건축되게 한 원도력이었는데

이 수사는 끝내 이 곳 신학대학의 수위 노릇을 하며 낮은 생활을 했다고한다.)

 

 

 

 

                         (몬트리올의 '노트르 담' 성당 앞에서---.)

 

전공도 아닌 프랑스어를 열심히 붙들고 늘어진 적이 있었다.

능력부족으로 학습에서 손을 떼며 '프랑스 대 혁명' 시절의 문화분야 혁명세력의

무능을 욕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어를 소리나는 데로 쉽게 적자는 초기의 혁명 의지가 포기된 것을 탓한

내 심술이었다.

 

 

 

        (비내리는 몬트리올, 문화의 거리---. 카페와 갤러리가 즐비했다.)

 

 

프랑스 대혁명은 모든 것에 대한 개혁, 즉 앙샹 레짐(구 세력)은 무조건 척결하는

원칙이었다.

당연히 어려운 프랑스어 표기 법도 도마 위에 올려졌다.

어려운 문자체계 때문에 한가롭게 수업 받을 기회가 없는자, 가난하거나

무능한 사람들에게는 언어 습득의 공평성이 배제된다는 것이 혁명 위원회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공포정치라는 통치 철학과 함께 단두대라는 무기도 고안해내었다.

이제 프랑스어는 당장 소리나는데로 적게 될 참이었다.

그러나 명령을 받은 프랑스 한림원(아카데미-프랑세즈) 학자들은 단두대의

공포도 이겨내며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들의 반대는 보수 꼴통으로서 전통만을 중시하는 그런 옹고집에서 나오것이

아니었다.

논리적 사고체계를 확립해 나가고 미묘한 시제의 차이를 극명히 나타내기

위해서는,

언어의 역사성을 확보하는 프랑스어 표기 체계를 그대로 두어야한다는

고집스러운 한림원 학자들의 주장이 관철되어서 소리나는 데로 적자는

혁명적 발상은 폐기처분 되고 말았다.

 

이제 나처럼 능력없는 자에게는 프랑스어 구사라는 화려한 기회가 막혔지만

어려운 프랑스어는 어려운데로 어려운 사고를 담는 절묘한 그릇의 위치를

계속 향유하면서 서구 논리체계의 가장 강력한 수호자의 위치를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비브 라 프랑세즈, 프랑스어 만세!

(어? 내가 뭘하고 있나요?)

 

 

 

 

 

그런데,

그런데 내 짝사랑의 대상, 프랑스어가 위기에 몰렸다.

 

우선 힘의 논리에 따라 영국과 미국 등이 프랑스와 벨기에의 세력을 밀어내고

지난 세기에 세계를 정복했기 때문이며 금세기 전후에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병기를 사용하여 프랑스어를 파죽지세로 몰아낸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중국의 동북지방을 생각한다.

200만 조선족이 사용하던 우리 한글이 이제 한어에 밀려 서서히 퇴장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딱지 맞은 프랑스어를 생각할 때면 항상 연변이 함께 떠오른다.

내 사랑하는 프랑스어, 아니 우리말---.

 

프랑스어는 이 몬트리얼이나 퀘벡 전 지역에서도 이제 자꾸 밀린다고 한다.

그래도 남아있는 이 지역의 프랑스어의 힘은 내가 짝사랑했던 저 프랑스어

전공의 '머리가 스마트'했던 여학생을 생각나게한다.

그녀는 프랑스어 교수를 하다가 년전에 명예퇴임을 했다고 한다.

 

잘 한 선택이었다.

지금 대학에서 프랑스 어문학이 받는 천대는 목불인견이다.

그런 전망을 미리 직관적으로 예감하고 사표를 던진 이 키작은 선생님은

과연 내가 짝사랑했을 만한 대상이었다.

 

이야기가 어째 이리로 왔는가,

주제는 '오리무중'이 되었다.

평론가 김 종회 교수는 이런 현상을 '오리무중', 즉

'오리가 무 밭에 들어가면 중심을 잃는 현상'이라고

'버스 속 문학기행'에서 갈파하였다---.

 

오늘은 주로 몬트리올의 성요셉 성당, 몽로얄 산상 전망대, 노틀담 성당,

선원광장, 올림픽 경기장을 돌아본다.

 

몬트리올 경기장은 우리의 양정모 선수가 레슬링으로 광복 후 첫

금데달을 딴 곳이다.

우리 태극기가 양선수의 쾌거를 설명한 동판 위에서 휘날리는 바탕이

된 것이다.

이 때 북한도 금메달을 따서 인공기도 이 곳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두 국기가 모두 가을 비에 젖어서 축 늘어져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가을 비 속에 축 늘어지거나 바닥에 떨어져 찢긴 몬트리올의

단풍 모습,

영어에 눌려 축 쳐진 프랑스어의 모습도 또한 인상적으로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후예들은 역시 예술적이었다.

그들이 지킨 이 곳의 길거리는 아름다운 카페와 갤러리로 가득하였다.

어떤 인상적인 갤러리에 동행인 Y대학의 김호덕 화백과 세계일보

뉴욕 지사의 김 기자와 함께 들어가 보았다.

역시 김화백의 예측이 옳아서 좋은 그림이 가득하였는데 거의 모두 팔린

표시가 있었다.

 

 

 

 

 

내가 강한 인상의 큐레이터와 못하는 영어와 더 못하는 불어로 의사소통을

하였다.

역사 깊은 그 화량이 지원하는 몇몇 현대작가들의 그림이라서 전시와

동시에 팔려 나간다고 한다.

아직 남은 그림이 있으니 보라고 하는데 역시 질이 떨어졌다.

문외한인 내 의견이 아니라 전문가 K 화백의 진단이었고 나도 동감되었다.

 

 

 

 

저녁에는 퀘벡으로 달려갔다.

 

사실은 내일의 일정, 퀘벡의 모습이 더욱 프랑스적이고 감상적입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