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시대의 아쉬운 세상 나들이

곤돌라와 팬티

원평재 2004. 1. 23. 09:46
유럽 여행의 첫 시도는 보통 서유럽 쪽에서 시작한다. 
유럽에 다시 못오게 되어도 파리와 로마는 섭렵했으니 
여한은 없다라는 생각이리라. 
미군 군복 줄여서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속에는 흰 무명 빤스로 
지나던 소년 시절부터 나는 목숨을 걸고라도 미국을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시골 고향, 철둑길도 미군들이 퀀세트 건물지어 차지하면서 초콜레트를 
던저 주었고, 지역 명문 중학교를 진학하였을 때에도 그 "정의의 사도들"이 
유서 깊은 옛 교정과 교사에 진주하여 우리에게 학용품이나 때로 선물하며 
접근을 막고있는, 그 미국을 내가 가보지 않고 어떻게 세상에 태어나 한 때 
숨을 쉬었다고 하랴. 
내 비록 지금은 한심하게도 무명 빤쓰를 입고 100m 달리기를 하고, 일제가 
파놓고 간 드문 풀장에서 이 빤쓰로 고귀한 접영과 배영을 배우고 있을지라도 
나 언젠가 미국에 가서 자동차도 운전하고 운이 좋으면 금발의 아가씨와 감히 
백년해로도 꿈꿔 보리라. 
그러나 유럽에 대한 동경은 미국에 대한 만큼 그렇게 치열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 곳은 무명 빤쓰를 입고 꿀 수 있는 꿈의 한계를 넘었다고나 할까. 
당시 내가 다니던 독서실에는 해가 지고 있는 라인강을 미혹스레 바라보는 
발가벗은 서양 처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녀의 탱글탱글한 젖가슴의 젖꼭지 부분에서 부터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로렐라이" 시 첫 구절이 시작되어서 느릿느릿하게 굽슬거리는 머릿결을 
타고 허리까지 흘러내려와, 그 가느다란 허리와 배꼽을 휘돌아 마침내 
풍요한 허벅다리를 쓰다듬으며 아름다운 종아리에서 마침내 종지부를 찍고 
있었다. 
독서실을 함께 다닌 친구들 중에서도 조숙한 녀석들은 그 사진을 생각하며 
무명 빤쓰를 몇차례나 더럽혔다고 하였다. 
나는 그 정도의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으나 마음이 허전할 때면 하이네의 
시를 생각하고 그 시의 뒷전에 있는 발가벗은 서양 여자의 모습이 떠 오르면서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다. 
로렐라이를 실제로 본 것은 중년이 지나서였다. 
인어공주와의 데이트는 물론 환상 속의 일이기도 했지만, 사실 로렐라이도 
마포나루 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은 현지에서 금방 확인되었다. 
처음에는 로렐라이가 별 것 아니라는 가이드의 사전 안내에 애국심이 포함된 
줄 알았으나 그건 아니었고 사실이 그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태리, 특히 로마는 달라요!" 열두명의 여자와 두명의 남자로 
구성된 여행객들에게 가이드는 실망하지 말라며 앞날의 놀라운 여정을 힘주어 
기약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일행은 로마로 가기전, 베네치아에서 부터 주늑이 들었다. 
거미줄 같은 운하와 천년을 지탱한 돌다리와 역사의 때가 낀 아름다운 
건물들로 이루어진 이 왕년의 도시 국가는 근대 서구 문명의 효시가 된 
르네상스의 원동력이었다는 공적 하나만으로도 그 앞에 평퍼짐한 얼굴 놓고 
증명사진 찍기조차 황송케 하였다. 
베네치아 기차 역에서 우리는 꽤 큰 여객선을 타고 한 시간 가량 쾌속 
유람을 즐긴 다음, 옛 도시 국가의 한 복판이 되는 광장에 도착하였다. 
마침내 저 대망의 곤돌라를 타는 순서가 시작된 것이었다. 아, 곤돌라를 
내 생전에---. 
무명 빤쓰의 소년시절을 보낸 중년은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곤돌라의 색갈은 모두 검정색이어서 기분이 묘했다. 
"원래 곤돌라는 장의차 역할을 했기 때문에 검정색으로 통일했답니다" 
검정으로 통일한 것은 눈에 보이는 진실이었으나 그 이유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은 역사적 시간차에 따른 임기응변 같았다. 
"저 친구 시간차 공격하네---" 내가 이죽거렸다. 
아내는 설명을 잘 들으러 앞으로 나갔고, 나는 뒤에서 여유부리며 일행 
중에서도 제일 젊은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함께 온 다른 여자일행들과는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아서 
가이드가 애를 먹는 처지이기도 했다. 
"순 엉터리 같애요. 노래 공부하러 온 학생이라는데 이태리 말 발음도 
운전기사하고는 영 달라요. 
그래도 기사가 알아듣긴 하대요---" 젊은 여자가 기다렸다는듯이 내말을 
받았다. 
"이태리는 남북 차이가 크죠.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가리발디던가가 근대국가로 통일한 것도 매우 늦었고---. 
그러니 라틴 어원만 통하면 악센트는 달라도 다 통하죠" 
나는 아는체 설명할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녀가 심통을 부리는 것이 어디 한두가지인가---. 세상 만사에 대하여 
그녀는 심사가 편치 않은듯 하였다. 
심지어 로마 제국과 그 황제들에게조차도---. 
항차 초기 크리스찬 순교자들이 누워있는 카타콤베에서도 그녀의 마음은 
정화되지 못하리라. 
"어떻게 여자들끼리 열명이나 함께 왔어요?" 
영국에서 도버를 건널 때에도, 그리고 벨기에의 안트워프에 도착해서도, 
그리고 쾰른 대성당에서는 셔터를 눌러주면서 까지도 참았던 질문을 내가 
빠르게 뱉어내었다. 
"저희는 유치원 때부터 아이들 과외로 뭉친 사이예요. 그런데 우리 아이만 
공부를 못해서 중학교 졸업할 때 미국으로 보냈어요. 
이 녀석이 맨날 엄마 보고싶다고 전화나 하고---" 
"그런데도 여긴 왜 함께 왔어요?" "둘째가 딸 아이인데 그 애 그룹을 
위해서랍니다. 줄을 놓치면 안끼워주거든요" 
옆에 함께 있던 역시 젊은 여자가 대신 답을 했다. 
만사 귀찮아하는, 아이 미국 보낸 여자는 점심 때 부터 위스키를 몇잔 
하는듯 했다. 
대신 대답한 젊은 여자에게 "그 쪽 사정은요?" 하는투의 묻는 시선을 
내가 던졌다. 
그녀는 좀 당황하더니 "전 얘 친구인데 애를 못 낳아요" 그리고는 킬킬 
웃었다. 
두 사람이 아까 위스키를 함께 나누었지, 아마. 
"우리 둘은 여고 동긴데 아주 친해요" 또 킬킬---. 
가이드가 무슨 거짓말을 한참 늘어 놓더니 이제는 곤돌라 타는 조를 
짜야한다고 마침내 맞는 말을 하였다. 
곤돌라 타는 돈은 따로 내게 되어 있었고 거기에 리베이트가 있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아까부터 곤돌라를 타지 않겠다던 그 두 젊은 여자들이 무슨 마음이 
들었던지 우리 부부와 함께라면 타겠다고 했다. 
네 사람이 한 조가 되었다. 
우리 조의 여자들은 곤돌라 타는 운이 좋았고 나는 별로였다. 
까만 윤기가 흐르는 곤롤라의 노를 젓는 사람들은 주로 늙은이들이었으나 
우리 배에는 젊고 멋있는 사공이 탔다. 
그리고 "산타루치아", "오 솔레미오", "돌아오라 소렌토"를 부르며 
아내만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는구나---. 
내가 팁을 5불 주었더니 자기와 내 마누라가 함께 사진을 찍으면 기념이 
되리라는 식의 시늉을 했다. 마누라가 징그럽다고 내숭을 떨며 증명사진을 
찎었다. 
"사진은 그냥 사진일 따름이고 또 기념이 되쟎아요---", 
이건 아내의 어색한 말이었다. 
"아, 그럼요!" 두 여자가 강력하게 동의하였다. 그 때 모터 보트가 큰 
물살을 일으키며 우리 옆을 지나쳤다. 
배가 기우뚱했다. 아이를 미국 보낸 여자가 두 다리를 내벌리며 벌렁 
넘어졌다. 
흰 색갈의 팬티가 활짝 들어났지만 나는 감히 시선을 보낼 수 없었다. 
또 모타 보트! 또 벌러덩, 엄마야! 또 흰색의 삼각 깃발! 
--깃발은 항상 우리의 앞에서 나아갔다: 유치환? 
에이 유치한---. 
"쯧쯧, 저거 조지 아르마니 아니면 와코루 같네" 
아내가 혀를 차며 아는체를 하였다, 
나도 브랜드가 궁금하다는듯이 조금 오래 보았다. 
진품 명품에 대한 판단은 서지 않았다. 
곤돌라를 내려서 로마로 가는 여정은 버스였다. 
"너희들 나 X으로 보지마!" 
황혼 탓인가. 아니 몰래 마신 위스키 탓이겠지. 아이 미국 보낸 여자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가더니 소리질렀다. 
"너희들 나 너무 무시하고 있어!" 
그녀는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신성로마 제국을 합치면 천년이 넘는 제국의 몰락을, 그녀는 로마에 
채 들어서기도 전부터 이미 통곡하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