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뉴저지 필라델피아 기행

시월의 마지막 날에(핼로윈 데이)

원평재 2005. 10. 28. 20:14

 

 

               (이 사진은 며칠 전 소호 지역의 핼로윈 숍에서 포착한 것입니다.)

 

 

 

 

(한달도 더 전에 위스컨신 농가에는 펌킨과 허수아비들이 집앞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밀워키의 미시간 호반에서는 조금 변형된 모습들도 있었습니다.)

 

 

핼로윈데이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트리커 트릿(Trick or treat)하는 아이들의 장난스런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지만 한해의 조종이 아주 멀리에서나마 들리는 소리입니다. 

아이들의 크는 소리는 어른들의 만종입니다.

감사의 종소리이기도 합니다.

 

뉴욕이나 뉴 저지의 풍경과는 달리 벌써 한달도 더 전에 중서부에서는

이 의식의 표상들을 문간에 내 놓고 있었습니다.

밀워키의 제 친구와 중서부 대평원 지역을 돌아다닐 때부터 그 지역에서는

이 의식에 대비하여 집집마다 펌킨과 허수아비가

나와 놓여있어서 여행객의 감상을 불러일으킨 바 있습니다.

 

 

                          (한적한 아이오와의 촌락에도 한달 전 부터---.)

 

 

 

                            (가게에서는 풍선 펌킨으로 변형된 모습이----.)

 

 

(아이오와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찾아나섰을 때에 이런 설치물들이 가장 많았지요.)

 

핼로윈데이는 원래 기독교적인 의식은 아닙니다.

이교도일 때의 켈트 족들이 지켜온 원시 종교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스터 날'도 원래 게르만들이 새봄을 맞이하여 만물소생 축제를 갖였던

고대의식과 맞물려 그 옛 이름을 차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라틴어 계열의 나라에서 쓰는 명칭은 대체로 resurrection(부활)을 어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크리스마스의 날짜도 초기에는 다소 변동이 있었지요.

오신 날짜를 축하하면서 지방별로 원시 겨울 축제와 느슨하게 맞물림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오신 절대적 진실에 아무 영향이 없음은 물론입니다.

 

 

 

(Little Amana 마을입니다, 전에 사제직에 있었던 제 친구와 한달 전에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찾아나선 여로는 이렇게 다양한 핼로윈 설치물과 조우하는 귀하고 다행한 시간이기도 했지요.)

 

 

      (춥고 무서운 겨울날을 대비하여 불 밝히는 의식은 인간의 본능을 데우는 의식같습니다.)

 

핼로윈데이도 여러가지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보수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별로 선양할 일이 아닌 원시 이교도적 요소가 다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즈음은 또 어떻게 된건지 우리나라의 일부 영어 유치원 같은데에서 더욱

물질주의적으로 기승을 보이고 있음도 사실입니다.

무엇이든 과하면 부족함 보다 못하다고 하지요.

 

 

(박 신부와의 여로에서는 미국판 '마사다'라고 하는, 인디언들끼리 싸우다가 한 부족이 모두 굶어죽은 Starved Rock의 통나무 Hotel에 머물기도 했는데, 그 곳에도 이미 핼로윈 설치물이---.)

 

 

 

 

 

(한달 전, 시카고에서는 눈을 닦고 보아도 핼로윈 설치물을 찾기 어려웠으나 Botanical Garden에서 겨우 펌킨을 찾아냈습니다.)

 

 

 

 

(시카고의 문우 금석님의 안내로 존 행콕 몇 십층 레스토랑으로 올라가면서 본

이 설치물은---?>

 

 

그러나 어찌되었건 핼로윈은 매년 우리의 곁에 찾아옵니다.

Trick or Treat, 트리커 트릿?

하는 어린이들의 맑고 장난끼 섞인 목소리에는 오래전 북 유럽에서 게르만 들이

닥아오는 길고 추운 겨울을 두려워하며 축제로 그 두려움을 이기려는 의지가

내재해 있는지도 모릅니다.

 

"동장군"으로 형상화한 얼음과 눈과 삭풍(그쪽으로 보면 서풍)이 몰아치는

길고 힘든 기간은 호심탐탐 취약한 인간을 위협하여 왔고,

두려움 속에서 위협받아 온 인간은 자라나는 어린이를 집집으로 돌아다니게

하면서 연대의식을 재확인 하였을 것입니다.

 

 

 

(뉴욕주의 업스테이트에 있는 레이크 조지에서 모히칸 호를 탔을 때 배 밑에 있는 가게에서---) 

 

 

                                  (께벡에서 만난 펌프킨과 핼로윈 가장복)

 

 

 

                                                     (께벡의 거리에서---)

 

 

신대륙에 들어와서도 이 공포 방지용 축제의식은 더욱 강화 되었던 것입니다.

핼로윈데이 의식에 그만큼 원시 공포적 요소, 미신적 요소, 제의적 요소가 강한

연유일 것입니다.

 

랜턴을 만든 소재가 구 대륙의 무엇으로 부터 신대륙에서는 펌킨으로 변모했다는

등의 역사적 고찰은 여기에서 하지 않겟습니다.

그런 영역은 부지런하고 꼼꼼한 분들의 영역으로 넘기고 여기에서는 근본적

의미 천착에만 그치고자 합니다.

제 능력의 한계이고 취향의 방향이며 제 글이 읽히는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우리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꽃 가게에서---.)

 

 

 

                              (이스트 빌리지 가는 길목, 소호의 핼로윈 숍에서---.)

 

 

 

                                          (이스트 빌리지에서---.)

 

 

 

            (첼시 마켓의 여러 가게에 핼로윈 장식이 형형색색으로 나와있었습니다.)

 

 

 

                  (Chelsea Market의 여러가지 장식, 혹은 핼로윈 데이 가게)

 

 

 

 

 

 

              (위의 공간은 특별히 인연이 있어서 언젠가 소개할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아 그리고 중서부에서부터 더욱 집착했던 그 의식의 모습들을 포착할 기회가

금년 가을 여행 때부터 다행히 나에게 있었기에 채집하여 여기에 올려놓습니다.

 

또 한가지,

작년에꾸며 보았던 팩션 한자락도 끝 자락에 재록합니다.

읽고 기억이 나시는 분은 그냥 넘어가십시오---.

 

 

 

작년에 올린 팩션/시월의 마지막 날에---

 

 

핼로윈데이가 늦가을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이 날이 닥아올 때 쯤이면 나는 가슴아리(앓이?)를 한다.
외국인으로서의 내 한글 실력에 먼저 양해를 구하고 싶다.

강남역 윗 쪽의 역삼동, 그러니까 "국립도서관 역삼 분원"이 있는 근처에 우리 영어 회화 학원, "아메리칸 가든"이 있다.
원래는 "아메리칸 킨더가튼(American Kindergarten)"으로 이름을 붙였으나 "킨더가튼"이

유치원이라는 뜻이기에 그러면 혹시 교육부의 관리를 받아야할지도 모른다는

구청 사회 교육 담당의 지적이 있어서 단순히 구청 상대만 하자는 책략으로  "아메리칸 가든"이 되었는데
식당 이름으로 알까 처음에는 걱정도 했다고 한다.

가든이란 말의 홍수에 이런 걱정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성공한 조기 영어 회화 학원으로 이름을 떨치며 성업 중이다.

우리 학원의 주 고객은 학령전 아이들, 즉 유치원생들이 태반이고 초등학생들도 약간있다.



나는 캐나다의 동부 "노바 스코시아" 주의 주립대학에서 유치원 교사 과정의 학사과정을

마쳤으나,

"새 스코틀란드"라는 뜻을 갖인 내 고향은 한 때 뉴 펀드랜드 해안이 세계 최고의

어장이던 20세기 초를 정점으로하여서 마침내 산업 생산이 서서히 서부 브리티쉬 컬럼비아

주로 밀리면서,

의무 교육이 되다시피한 유치원 교사 생활도 고향에서는 하지 못하고,
코리아까지 밀려온 30대 중반의  캐나디언 노처녀이다.


잘 살 때의 노바 스코시아 학교의 학급생 수는 25명이었는데 이제는 40명을 육박하니

신임 교사를 뽑을리가 없다.

아, 내가 처음부터 코리아로 온건 아니고 고향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자,처음에는

멕시코로 가서 사설 영어회화 학원의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멕시코가 경제 불황에 빠지고 심지어 게릴라들이 멕시코시티로까지 내려오게 될 무렵,
나는 허겁지겁 보따리를 싸서 태국으로 갔다가 7-8년 전부터 서울 강남으로 왔지만 마음은

항상 집시이다.

이 곳 강남의 영어 학원가의 경기는 88 올림픽 때가 최고였다고 영어 강사들의 글로벌

인터넷에 떠있지만 요즈음도 아직은 해 볼만하다는 것이 나보다 먼져온 사람들의
평가이다.


특히 유치원과 초등학교 대상이 경쟁력이 있는 셈이다.

그보다 윗 학년이 되면 돈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아예 유학을 보내거나 방학 때 현지

어학 실습을 보내기 때문에 강남에서는 오히려 수강생이 줄어드는 형편이다.

내가 맡고 있는 유치원생들도 관리를 잘 못하면 한 순간에 썰물이다.
나는 원래 인디언과 프랑스 사람 사이의 튀기인데 외모가 동양인을 더 닮아서 소위 파란눈,

노랑머리의 서양 얼굴에 비해서는 값이 덜 나간다.

나는 정말 "에보니 칼라", 흑단같은 검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고 눈에는 마침 새로 개발된

파란 콘택트 렌즈를 꼈다.

얼굴이 좀 넓은 편이지만 유려한 영어와 유치원 교사 자격증이 이를 보상하여서 렌즈까지

낀 이후에는 값이 많이 올랐다.

 

또 한국 사람이나 외국인 강사들과 아무 스캔들이 없다는 점도 내 몸 값을 올리는 주요

원인이 되었는지 모른다.

조금 험한 표현이지만 나는 내 몸 위에 누구도 올려놓지 않고 "바이시 버서(vice versa),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올라가지도 않겠다"는 뜻인데 의미전달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다.

머리를 물들이는 행동은 우리 조상인 인디언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요즈음은 이곳 강남 처녀들도 머리를 물들이고 유명한 탤런트를 따라서 파란

렌즈들을 많이 끼고 다닌다니 마음의 위로가 된다.

 

뿐만 아니라 나와 결코 스킨쉽을 나눌 챈스는 없을 한국의 청년들까지 무조건 많이 나를

따르고,학부형들의 특별한 사례도 나에 대한 존중의 뜻으로 해석하면서 나는 이제야 사는

보람을 만끽한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이런 뇌물 풍조에 익숙지 않아서 거절을 했다가 강사자리를 짤리기도 했고, 외로움을

못이겨서 어떤 작은 학원의 원장이라는 한국 남자와 동거도 해보았으나 매일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마침내 손찌검까지 하는 통에 이별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동거 원장의 수작으로 강남에서는 자리를 한동안 잡지도 못하고 변두리에서

개인 교습을 하다가 목동에 있는 출입국 관리 사무소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쫓겨날번도

하였으나,

"데이비드 영"이라는 미국 청년의 도움으로 지금의 꽤 괜찮은 학원, "아메리칸 가든"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몇해 전에 교통사고로 죽고나서 내 마음은 다시 참람해졌을 뿐이다.



그가 죽은 날이 "핼로윈데이"의 저녁이었다.
원래 우리 학원에서는 핼로윈데이에 최고의 이벤트를 벌인다.

영어 연극도 아이들이 연습하여 올리고 학부형들을 초대한다.
연극이 끝나면 학부형들과 칵테일 파티를 잠시하는데 이때 그들이 우리 회화 강사들에게

주는 선물이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학부형들이 인근의 자기 아파트로 돌아가고 나면 학생들은 "트릭-오어-트리트"라고

소리 지르며 북미 대륙에서 하는 것과 꼭 같이, 아니 더 극성스럽게 자기 집과 친구들의

집을 함께 방문한다.

"Trick(혼이 나보겠어요)? or treat(대접을 하시겠어요)?"
아이들이 이렇게 소리지르며 초인종을 누르면 돈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한 이 곳

학부형들은 영어 잘하는 자기 아들과 미래의 동지들에게 듬뿍 선물을 준다.

아니 학부형들이 투자를 하는 것은 이 날 만이 아니다.
며칠 전부터 "잭커 랜턴(jack-of-lantern)", 그러니까 호박 랜턴을 학원의 단체 구입으로

장만하여주고 또 고추처럼 생긴 핼로윈데이 의상들도 함께 마련해준다.

이런 복잡하고 성가신 일들은 모두 데이비드의 몫으로 용산에 있는 미8군 매장에서

해결하였다.
지금같으면 데이비드가 티코라도 샀을텐데 그 때만 해도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행사에  늦지 않으려고 그날 그는 짐을 앞뒤로 잔뜩 매달고 속력를 냈을 것이고 한강변의

교통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곡예와 위험천만이었다.

시간이 넘어도 장식품과 옷가지와 소품들이 도착하지 않아서 낭패가 난 영어학원에

갑자기 비보가 날아들었다.

미국에서 온 그의 가족이래야 누이 동생 하나였다.
부모는 이혼하여서 어머니는 연락두절, 아버지는 와병중, 누이만 학원에서 보내준 비행기

표로 이 나라에 들어왔다가 오빠의 시신을 알미늄 관에 담아서 나갔다.

화장은 하지 않았다.

보험이 되어있는 이 나라의 질서를 보고 나와 동료들은 놀랐지만 내 개인적 슬픔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노릇이었다.

나와 데이비드가 동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생활 패턴이나 강의 시간이 달라서 따로 살았지만 우리는 부부처럼 서로를 생각하였다.

객지라서가 아니라 이 외로운 산업사회의 짜투리 지역에서 몸을 나누고 믿을 수 있는

상대가 하나쯤, 그래 하나만 골라 갖일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이었던지---.

 

우리는 오랄도 하고 아날도 하면서 서로를 확인하였다.
그가 내 온 몸을 섭렵하고 나면 나는 항상 재생, 아니 신생을 느꼈었다.
그 모든 구원의 순간들이 핼로윈데이의 저녁에 갑자기 끝났다.

데이비드와 이렇게 지상에서의 이별을 하고나서 나는 살이찌기 시작했다.
슬픔이 솟구칠 때의 식음 전폐, 그래 사람들은 이를 거식증이라고 하였고 이후의 폭식,
맞어, 나중에는 슬플 때에도 계속 먹기만 한적이 많았지.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 몸 무게는 이제 이 곳 기준으로 말하면 100kg이 넘는다.
인디언 피가 섞인 내 키는 겨우 163센치미더.
그러나 이런 내 모양을 아무도 탓하지는 않는다.

내가 쓴 교재와 티칭 노 하우, 밤을 세워서 준비하는 교육 자료와 매일 매일의 성실한
과제물 평가, 그리고 노 스캔들, "핼로윈데이 호구 방문" 이라는 요란한 행사를
내 클래스에서는 오늘이 아니고 어제 저녁 그러니까 30일에 치루었다.

아이들은 "트릭 오어 트리트"를 소리높여 외치며 호박 랜턴을 들고 그리고 고추 모양의

의상을 입고서 아파트와 빌라 촌을 돌아다녔다.

나도 물론 그 호박들의 대열에 끼어서. 사실 핼로윈데이는 "올 세인츠데이", 그러니까

"제성첨--"  무슨 날이라고 번역하던가,
그래 "만성절"인 11월 1일의 하루 전날,
그러니까 10월 31일, "시월의 마지막 날"이다.

 

한국의 어떤 유명한 가수가 그런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올해는 공교롭게도 이 날이 주일이었다.

핼로윈데이는 사실 영국의 선주민들이 믿던 이교도적인, 비기독교적 풍습으로 전통,

보수 교회에서는 질색이다.
내 소망이라고 하면 한국에서 학생들 영어 잘 가르치는 것과 오로지 종교심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일 뿐이다.

주일성수!
핼로윈 행사를 내가 맡은 클래스만이라도 주일을 피하여 하루 앞당긴 것은 그런 내 생각

때문이었다.

하긴 이교적 잡신들도 인간이 바치는 공물을 주일 보다는 하루 전날에 공양 받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