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버스를 타고 가는데 집사람이 속삭였다.
"취사용 불을 안 끄고 나온 것 같네요."
"뭘 얹어놓고 말이오?"
"낮은 온도로 미역국을 끓이기 시작한 것 같은데 혹시 그 옆에 된장국이 얹혀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하, 우리가 아침에 된장국을 따끈하게 데워먹었지---.
"얼마나 시간적 여유가 있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된장국은 확실히 껐고, 미역국 쪽은 아직 한시간 반 이상 정도도
괜찮을 것 같긴해요---,"
서양 우스게가 생각났다.
외출하면서 전열기 끄는걸 하도 잊어먹어서 승용차가 출발하기 전에 남편이 아내에게
불은 다 껐냐고 재삼 확인했더니,
아내가 자신만만하게 걱정 놓으라고 대답했다.
"오늘은 틀림없어요. 아예 전열기를 뜯어서 차에 실었어요."
좀 낡은 이야기 같다.
하여튼 내가 종점에 내려서 미주판 한국 신문을 하나 사고 곧장 돌아오기로 하였다.
내가 나가는 교육기관이나 도서관은 내 마음데로이지만 집사람이 나가는
"미술 아카데미"에는 진도가 있었다.
글 속에 된장 냄새 풍기며 영어 쓰지 않기로 했는데 벌써 한개가 출현했다.
그래도 "미술 학원"이라고 쓸려니 너무 한 것 같다.
"카네기 대청" 건너편, 예술 분위기의 마을에서 13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미술 교육 기관으로 자체 화랑도 있고 유명한 당대 작가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라고 한다.
나도 가보았는데 세계 각처에서 수강생들이 모여들어서 학생 비자도 나온다고 하며
교수들도 일류라고 하는데 나는 모두 모르는 이름이었다.
또 우리가 학생 비자 같은게 필요한 사람들은 아니다.
연변에 있을 때 알게된 미국 동포가 추천한 곳으로 역시 사람은 많이 사귈 필요가
있겠다.
물론 좋은 사람이라는 단서가 붙어야겠지만---.
이분은 오래 여기 어떤 지역에 있는 공립고등학교의 여선생님으로 재직하다가
얼마전에 은퇴한 분으로 지금은 사회 봉사도 하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그림 공부도 시작한 의지의 여성이었다.
바쁜 시간 중에도 우리에게 보통의 관광이라면 보기 힘든 여러 곳을 안내해
주어서 이루 고맙기가 그지없었다.
이 분이나 이 곳에 사시는 분들에게는 일상에 속하는 것들이 방문객들에게는 비상하게
보이는 점이 많으니 따로 관광 명물이 필요없었다.
이 분은 그 점을 잘알고 있어서 절묘한 안내를 많이 하였다.
하긴, 따지고 보면 여기 사시는 분들이 오히려 발품이 좁아서 내가 여기 사이버에
올리는 사진을 보고 아는 사람들이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서울 사는 내가 한강 유람선을 한번도 못타본 것이나 같은 이치가 아닐까.
"자유의 여신상"만해도 "구월 십일일" 사건 이후에는 그 여신상 속으로 들어가 보는
구경이 어려워졌다며 미리 보아둘걸---,
하면서 조금 안타까워하는 내 친구들도 보았다.
나는 겉 구경은 셀수도 없고 속 구경만 두번인가 하였었다---.
버스가 종점에 도달하였다.
나는 종점이 있는 "시간 네모 광장" 근방에 "한씨 간이 음식점"쯤으로 번역되는
상점으로 걸어갔다.
8번가 38번 길쯤 되던가---.
그 곳에서 미주판 한국 신문을 한장 사고 나는 급히 돌아오는 버스를 타러
종점역으로 되돌아왔다.
집사람은 급행 지하철을 타는 대신에 오늘은 한번 걸어서 가 보겠다고 반대 방향으로
떠났다.
정말 날씨가 아침부터 너무 좋아서 돌아가기가 억울하였다.
이런날은 이 도시의 "중앙 공원"으로 가서 슬슬 걸어다니며 제롬 D 샐린저라고하는
유태계 작가가 이곳을 무대로 삼은 "호밀 밭의 파수꾼"이라는 이야기 책을 상기해
보면 얼마나 좋을까---.
"한 씨 가게"에는 남미 사람들을 여럿 종업원으로 쓰고 있는데, 주인인 우리 동포는
처음에는 좀 험한 동네에 살다가 지금은 강을 건너 좋은 동네로 이사를 와서 살고
있다.
사학과 다닐 때에 중국어를 해 둔 것이 이 곳에서 참 요긴하게 쓰인다고 한다.
아까 말한 여선생님이 우리를 험한 동네로 안내하였응 때의 이야기이다.
여 선생님은 좀 울분을 터뜨렸었다.
한국에서 온 분들을 이리로 데려와서 구경시키면 목에 힘들을 주면서 깔본다고 한다.
강남이나 신도시가 얼마나 좋은지 아느냐는 것이다.
여 선생님도 그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글 간판이 다닥 붙어있는 길목이 이 곳의 전부는 아니다.
그런 곳은 막말로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 바닥이고 이 분들이 여기게서 돈을 벌어
조금 떨어진 교외에서 얼마나 잘 사는지, 또 잘 살지 못하는 경우라도 얼마나
기본이 든든한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불법으로 와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런 사람들이 표가 잘 나고
비교 대상의 선상에 잘 올라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이다.
또 설혹 험하게 사는 분들이 있다할지라도 이런 분들이 저변이 되어서 그 위에
성공 사례라고 하는 멋진 과일들이 열매 맺고 있지 않은가.
이제 그분들의 2세들은 미국 사회에서 의사, 변호사, 정치가, 행정 관리 등의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자연히 높이고 있지 않겠는가.
그들이 구태어 그런 봉사를 한다는게 아니라 그런 활동이 음덕이 된다는 점에서라도.
물론 빛과 그늘은 항상 병존하겠지만---.
아파트에 돌아와 보니 나 참!
취사 조리기의 불들은 모두 얌전히 꺼져있는게 아닌가.
일단 안도하면서 차라도 한 잔 끓여먹으려고 물을 올려놓고 인터넷을 켰다.
내려다 보이는 이 곳 강위에 찬란한 햇살이 내리 꽃히며 물고기의 은빛 비늘을 만들고
돛단배들이 몇 척 오르내리는 만추의 정경을 애써 무시하며,
우리말로 이 글을 느긋하게 만들고 있는데 삐삐 요란한 소리가 부억에서 들린다.
방금 전 찻물을 올려놓고 내가 깜박한 것을 주전자가 깨우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전화 벨 소리가 울린다.
"뭐하심니까, 이 좋은 날에 댁에 계시네요."
화가 김호득 교수였다.
"오늘 여기에서 활동이 많으신 화가 한 분과 그 쪽 동네 화랑을 순례할 일이 있어서
낮에 가는데 합류할 시간이 됩니까?"
"아이구, 김 화백님, 되다 말다요. 사실은---."
그러다가 일단 긴 말은 끊었다.
된장국, 미역국 이야기는 만나서 할 이야기 같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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