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뉴저지 필라델피아 기행

한가위에 찾은 모마(뉴욕 현대 미술관)

원평재 2005. 9. 20. 02:36


 

 

여름의 열기는 지나갔다.

이제 낙엽의 계절이 닥아온다.

슬퍼하지말고 일상으로 돌아가자.

과육의 계절이 기다리고 있고 추수 감사절이 있으며,

그래 월드 시리즈가 아직 우리에겐 남아있지 않은가.

 

얼마 전 여기 어떤 신문에 난 '에디터즈 에세이' 한 구절이었다.

이 코쟁이 양반이 뭘 모르시고 계시네.

그 보다 먼저 우리에게는 팔월 한가위가 온다네.

내가 읽고 속으로 웃었다.

 

바로 그날이 왔다.

한가위가 찾아왔다.

100보도 떨어져있지 않은 아들의 집에서 모처럼 송편과 인절미와 또 고기를

푸짐하게 차려놓고 '한가위 차례 기도 의식'을 갖였다.

 

Pre-message로 우리는 조상님들에게 '퓨전 차례 의식'을 갖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조금 긴 기도의 말씀을 우리말로 올린다음 끝 부분은 이 곳의 공용어로 마무리

하였다.

'로마에 가면 로마' 식으로 해야 되지 않겠는가.

 

 


 

 

오후에는 오래 전부터 아들이 작정해 둔 '현대 미술관'을 찾아갔다.

'뉴욕 현대 미술관'은 잘 알려진대로 'Museum of Modern Art'에서 한 자씩 따서

MoMA, '모마'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린다.

 

건립된지는 벌써 환갑도 훨씬 넘었지만 지난 4년반 동안에 완전히 새로운 공사에 들어가서

작년 11월 20일에 재개관 테이프를 끊었는데 첫날 3000여명이 맨해튼 53번가의 한 블록을

완전히 빙빙 돌아서 줄지어 들어갔다고 한다.

 

'모마'의 역사와 재건립과정, 10여만점에 이르는 소장품의 소개등은 인터넷 www.moma.org

모두 있으니 여기에 덧댈 필요는 없겠고,

함께 간 가족들의 찬사에 더하여 나의 감상을 조금 적으며 사진을 올려보는 것으로

'MoMA 탐방기'를 마치는 것이 내 능력으로는 그저 최상의 처사일 것 같다.

 

아들 내외도 재개관이 된 이후에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며 기대에 찬 눈치였는데

나도 지금 돌아와서 까지 오늘의 이 감동 속에 아직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을 길이 없다.

 

 


 

 

 

우리는 먼저 '모마' 관객에게 할인을 해주는 파킹 빌딩에 차를 넣고 한 블록도 안되는 거리에

유모차를 앞세우고 걸어갔다.

현장에 도달하기 전에도 물론 딜레탄트로서의 기대와 긴장이 없지는 않았다.

입구에서는 아마도 아들의 멤버쉽이 대접을 받는 모양인데 나는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선 6층으로 올라가서 한층씩 내려오며 보는 코스를 잡았다.

 

 


 

 

그러나 6층은 가을 특별 전시장을 마련하는 중이어서 유화와 조각이 상설로 전시되는

5층에서 우리는 내려 두꺼운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6층은 원래 기획 전시실이어서 우리가 더 얻지는 못하였을지언정 잃은 것도 없었다.

 

맙소사!

이 그림이 여기에!

입구에는 앤드루 와이어드(Andrew Wyeth)가 그린 들판의 여인이 처음부터 혼신의 힘으로

우리를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저 친근한 그녀의 몸짓은 너무 놀라워서 혹시 복사본은 아닌가 의심할 지경이었는데,

그 느낌은 앞으로 셀 수 없이 하게 될 똑 같은 생각의 프롤로그일 뿐이었다.

아, 내 작고 얕은 경륜으로 어찌 저 거대한 서양 미술사의 편린이나마 여기에서 운위할 수

있겠으며 또한 그런 자격이나 있는지.

무어라 촌평을 여기에서 하는 행위도 혹시 신성모독은 아닌지---.

내 가슴은 벅찰 따름이었다.

 

내가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내 아들 녀석의 촌평,

"미술 교과서에 있는 그림은 다 있네---."

정말 그러하였다.

아니, 물론 그렇지 않은 점도 있었다.

5년전 마드리드에서 내가 실물을 본 피카소의 '게로니카'는 당연히 여기에 없었다.

 

 

 


 

(피카소 작품 컬렉션도 대단하였다. '아비뇽의 처녀들'을 위시하여 유화와 도예작품들도

손색없이 갖추고 있었다.

파리나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박물관 보다 숫적으로는 비교가 되지않았으나 분야별로 갖춘

주요 작품 컬렉션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르크 샤갈, 간딘스키, 마티스, 세잔느, 피사로, 마네, 모네, 몽드리안, 앤디 워홀,

아아! 고흐, 고갱, 고야, 고씨 성 화가들의 대표작들도 모두 여기에 숨어있었구나.

클림트?

물론 있었다.

에곤 쉴레의 옆에서 사람을 놀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유명한 키스 그림도?

 

아, 그건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모든게 다 있으면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

 

 


 

 

 

5층에서 4층으로 내려오면서는 아방가르드 추세의 그림들이 모던 아트의 갈망에

목마른 관객의 갈증을 풀어주더니,

그 다음 컨템포러리 단계도 걱정 말라는 듯이 우리 시대의 팝 아트까지 무어라

투정이나 의문이나 제안이나 권유의 말을 큐레이터에게 제시할 여유나 이유가

하나도 없게끔 미리 작정하고 다 보여주는 품새였다.

 

 


 

 

나는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배짱좋게 미리 물어보았더니, 왠걸 플래쉬만 터치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것이다.

미술관 편력 반평생에 이런 횡재가 어디있나.

그러나 문화인 행세가 몸에 밴 우리 젊은이 내외는 난감한듯 우리의 행색을 바라만

보고 있는데,

우리 집에서는 플래쉬까지 가끔 부주의하게 터뜨리며 보물을 쓸어안았다.

 

 


 

 

나는 그 정도 배짱은 없어서 플래쉬를 끄고 눌러댔으니 셔터 시간이 길어져서

제대로 된 사진을 얼마나 건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사진 보다는 글쟁이라서 지금 디카는 뒷물림 하고 못난 글부터 다듬는 중이다.

5층과 4층에서 연인들과 한없는 통정을 하다가 어쩌랴, 아쉬움을 안고 3층으로

내려오니 컨템포러리 프린트화, 드로잉과 사진예술들이 이 시대의 지평을

활짝 열고 있었으며,

이어 3층에 대해서도 미련과 배신의 씁쓸한 가슴 같은 걸로 뒷전을 수습하며

다시 한 층을 더 내려와 2층에 서고 보니,

그 이름도 신선한 '미디어 갤러리'가 신세기, 신세계를 눈 앞에 전개해주고 있었다.

 

 


 

(미디어 갤러리의 비디오 아트에 백남준의 작품이 없는지 못 찾았는지---,

한점은 있다고 들었다.)

 

 

 


 

                       (거울이 설치된 작품에 비친 군상들입니다.)

 

 

그러나 어쩌랴, 5시 30분 폐관 시간을 염두에 두며

이제 마침내 다 내려온 그라운드 층,

어둠과 빛, 카이네틱 영상과 스틸 영상, 끝도 없는 심연, 그리고 곳곳의 설치미술,

무심한듯 세워놓은 조각 등---.

표를 사고파는 1층 로비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군데 군데의 진정한 설치 미술은 말할 것도 없고 여기에 모인 관람객 자체가

그 의상과 표정과 눈에 보이지 않는 열정으로 또하나의 예술 세계를 펼치면서,

작가이자 작품이 되고 있었다.

 

 


 

 

내가 어떤 아시아인 여성과 가볍게 부딛쳤다.

미안하다는 표현을 내가 잘 난 영어로 하는데, 한 2초쯤 후에 '미안합니다'라고하는

우리 모국어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자꼬메티의 이 유명한 작품의 실물이 이렇게 작은 줄은 처음 알았다.)

 

 

조금 늦게 도착한 며느리가 전에 일하던 직장의 동료를 만나서 수다가 좀 길어졌다고

하였다.

물론 아시안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버님, 한국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아요."

"아, 그렇더구나. 나도 방금 동포하고 큰 박치기 할뻔했다. 그런데 백남준은 보았니?"

"무제라는 제목으로 한 작품은 나온다는데 찾지는 못했어요."

"무제가 뭐니?"

"Untitled---."

우리는 1층 테라스로 나갔다.

 

맨해튼의 이 좋은 분위기의 금싸라기 땅이 어이 그냥 던저져 있겠는가.

조각들이 분수와 어울려 또 한마당을 차리고 있었다.

그 조각중의 하나에 기대 서라고 아들이 지시하여서 나와 며느리가 무심코 작품에

손를 대고 서다가 안내원으로부터 점잖은 제지를 당하기도 하였다.

 

내가 오늘 '모마'에 온 수천명 관람객 중에서 아마도 유일하게 넥타이를 맨 사람일

것이었다.

한가위 차례를 지낸 뒤끝이라 옷 갈아 입을 시간도 없었지만, 서로가 말은 하지않은

중에서도 내가 고집을 부리고 나온 탓도 있었다.

 

그래도 와룡선생 상경기로 취급하지않고 부지런히 안내하고 사진 찍어주는 내외가

대견하고 고맙다.

 

 


(중정에서 한 컷, 뉴요커들의 짙은 장면들이 많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여기 갤러리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선견의 지혜를 투여하신 분이

계신줄로 알지만,

일본 사람들은 워낙 여기에 많이 관여하였고 재건축의 설계까지 맡았으니까 

제발 넥타이 잘 매는 일본 사람으로 나를 알아주었으면 다행이겠다.

 

그렇지 않으면 내 짙은 색갈의 정장으로 인하여 '아미쉬 마을'에서 온 수도자라고

생각했어도 피차간에 무방하였겠다.

 

어제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영부인께서도 이 곳을 방문하고 관람을 하셨다는 보도가

있었다.

세상 뉴스를 다 다루어야 하는 이 나라에서는 그리 큰 보도가 아니어서 야속했지만

개인적 취향과는 별도로 나라의 체통을 위해서도 참 잘하신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이제 우리도 이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밖으로 나와서는 인근의 일본 거리를 돌아보았다.

일본인 소유의 백화점에도 들어가 보시라고 했으나 이미 폐점 시간이었다.

다음으로 기회를 미루고 인근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멘창고 테이 일본 라면'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국물까지 모두 마셨으나 집에서 나올 때 송편을 많이 먹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뻔

했다고 생각되었는데, 

맛은 일본 본토에서 최고라고 하던 집 보다는 훨씬 좋았다.

 


 

(중정에 있는 작품이다. Metropolitan이 아니고 여기 "분수"가 있음을

의식하고 fountain의 끝자로 처리한 위트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