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한지 닷새가 지났다.
퇴원 다음날 새벽에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오래 울었다.
힘이 들어가면 통증이 더 심해져서 소리죽여 하염없이 울었다.
최초의 통증 이래 오판으로 나흘을 허비하고, 다시 다섯 시간의 수술과 이후 3일간
몰핀과 링거로만 부지해 온 내 초라한 몸이 버티기에는 흐느낌도 벅찬 동작이었다.
우루무치를 지나서 서역(西域)으로 나가는 최전초 기지, 당관(唐關)에 선 적이 있다.
열사(熱沙)라는 표현이 오히려 한가로운 연옥지대를 돌바람이 횡으로 몰아쳐 나가고
있었고,
푸르죽죽한 빛갈의 무시무시한 뇌전(雷電)은 하늘로 부터 곧게 쏟아져서,
"고비"라는 이름의 푸석한 사막 겉거죽에 이리저리 카오스 알고리즘으로 내리꽂히는
광경이 끔찍하였다.
"서역(西域)을 부탁해!"
고선지 장군도 지나갔고 혜초 스님도 지나갔을 이 연옥을 지나야 "서방 정토"에
이르른다면,
나는 천년 후에 백마를 타고올 사람에게라도 그 길을 맡기고 차라리 비켜나고 싶었었다.
그런데 지난 수일간을 나는 다시 그 당관에 서서 뇌우를 처절하게 맞으며 방황하고
있었다.
이런 표현은 내 심신을 나타내는 걸멋든 기호학이나 상징이 아니라 몰핀이 이끄는 데로
내 몸과 마음이 갈래갈래 찢어져서 방황한 실제의 시공이었다.
나는 사실 "자의에 의한 국적 이탈자(expatriate)"임을 이 지경이 되어서야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달과 육 펜스"에 나오는 스트릭랜드처럼 나는 항상 내 고향에 있지않았고
실성한 이 내 모습을 주위에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예전에 "어퍼 미시간"을 어떤 학우와 달리면서 "바바리아"라는 이름의 모텔이 나와서
아까운 반나절을 접으며 그곳에 예정에도 없이 투숙한 적이 있었다.
집시들이 출몰한 남부 독일의 바바리아 지방에 내 연상력이 당도하자 나는 그 한촌의
작은 집을 스쳐지나갈 수가 없었다.
지금은 실성한 사람들을 위한 이런 대피소들도 사라졌다.
모두 홀리데이 인이나 라마다 체인으로 통폐합이 되었거나 문을 닫았다.
응급 병실에서도 그랬고 퇴원하여 누워있는 이 아파트에서도 고향 상실자가
고향에서부터 익힌 소나무들은 손에 만질듯 가까운데,
다만 도도한 허드슨 강은 대서양으로 흘러갈따름이다.
내가 역사의 시원에서 손을 놓친 내 근친 중의 일부는 저쪽 유럽 대륙의 대서양안에서
이쪽 신세계의 대안을 바라보며 나와 손을 잡으려고한다는 환영(幻影)도 가끔 그려본다.
내가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에서 생명의 숨결을 느낀 일과도 무관치는 않으리라.
그래서 존 단은 그의 기도문(Devotion)이라는 종교시에서,
"누구를 위하여
조종은 울리는가라고 묻지말아라.
대서양의 유럽 쪽 일부만이 유실되었다고 할지라고 그건 우리 모두의 상실이기에
조종은 우리 모두에게 울려퍼지는 것"이라고 갈파하였다.
비교의 줄자(尺)를 나꿔채일만큼, 이제는 살아 온 날 보다 살아 갈 날이 창황한 즈음에
내 만년(晩年)의 은둔처를 찾아본다면 여기 뉴 잉글랜드 지방을 꼽아 본다.
개인적 수속 절차도 이제는 이정표를 반년 단위로 세워놓고 있다.
그러나 고향 상실자에게는 고향이 생기는 순간 또다른 하이마아트가 불거져나올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절대자께서는 이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도 요긴한 사람들을 미리미리 예비하여
심어놓아 주셨다.
이번 수술에서도 내가 절체절명의 시기를 놓치지않게 이끌어준 내 중학교 동기
김탁원 인형 내외---,
수술 전후로도 돌보아주는 손길은 친 형이나 형수님인들 이럴 수가 있을까---.
내 차지로 마련한 전복 죽에 마른 반찬은 가짓수와 이름을 대기도 힘들고,
집 사람과 내 아들 내외가 먹으라고 퍼담아온 곰국과 도가니탕은 양이 너무 많아서
급기야 남은 국물은 상할지경에 이르렀다.
이 친구가 손을 써서 밤중에 나와서 진찰을 하고 즉시 이머전시 호스피탈로 입원케
해주신 대 선배님---, 등등을 매거하자면 한이 없다.
밀워키에 있으면서 적시에 내 상심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고등학교 동기이자
전직 신부님인 박 웅근 선사,
그의 무한 전화는 도도한 생명샘이기도 하다.
필라델피아에도 또 한그루의 큰 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은퇴 이민을 온 전직 건설업계의 한정구 사장,
나와도 원래 향리인 동인동의 죽마고우였지만 특히 박 선사가 연결 고리가 되어서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우리 아이들과 한정구 인형의 아카디아를 찾기로 하였다.
지금도 노루 사슴이 7-8마리씩 대낮에도 나오는 통에 농사를 해치고 있다는 통화였다.
내가 있는곳에서 두시간 거리이니 여기 개념으로는 지척간이다.
문병을 오겠다고 했으나 일주일 후, 추수감사절을 염두에 두고 내가 말렸다.
이승에서의 내 삶이 항상 채권자인줄로만 알았더니 이제 보니 나는 형편없는 빚장이,
채무자에 불과한 줄을 알게 되었다.
"알고보니 내가 빚 투성이야. 그래도 걱정하지는 않아. 자네들은 모두 차돌같이
여문 사람들이라 내가 문병 같은걸로 빚을 갚아야 할 일은 없을 것 같거든---.
그래야한다면 나는 파산깜이야.'
내 덕담이었지만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고 또한 그렇게 되기를 기원한다.
나보다 모두 모두 무병장수 하소서---.
그들은 또 자신들의 병력과 수술 이력을 길게 이야기해 준다.
내가 듣고 잠시나마 위안으로 삼으라는 뜻일게다.
그러고보니 나야말로 지금까지 한번도 입원이니 수술이니 하는 것을 모르고
살았었구나---.
참으로 옷깃을 여미며 살아가야겠다.
어제는 퇴원 후 처음으로 집도의가 있는 병원으로 점검을 받으러 갔다.
몸 곳곳에 철사 스테이플로 여며 놓았던 곳을 모두 풀고 날카로운 눈매의 집도의는
꼼꼼히 들여다보더니 최상으로 잘 회복되고 있다고한다.
이 사람들이 구멍을 뚫어놓고 피를 받아내는 플라스틱 종지를 달아놓았었는데
퇴원하기 직전에는 그걸 뗀다고하면서 가족들은 잠시 비키라고 하였다.
집도의의 수석 보조쯤 되어보이는 의사가 철사로 여민 곳을 툭 뜯어내고 종지에 달린
관을 뽑아내는데 아무리 끄집어내어도 끝이 없었다.
겨우 한뼘이나 되려니하고 물끄럼히 작업을 내려다 보는 내 시선 앞으로 한발이나 되는
도관이 술술 뽑혀나왔다.
보고있는 나를 보고 의사가 "터프"하다고 치켜세웠으나 나는 사실 몰핀의 소나기
속에서 제정신이 아닐 따름이었다.
"퇴원 당시와 고통이 한 점도 줄어들지 않았어요."
내가 조금 과장은 있었으나 항변하였다.
사실 내 선배 원장님도 답답하고 걱정이 된 나와 전화 상담을 할 때에 그런 내 고통을
듣고 다소 걱정을 하시면서 초음파를 다시한번 해야되는 것 아니냐는 소견도 있다는
말을 꼭 해보라고 하였다.
메스를 들었던 집도의는 내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담석이 얼마나 컸는지 아느냐. 사진도 다 찍어서 보여 주지 않았던가. 그런 상태가
아물려면 다른 사람보다 하루 이틀 더 걸린다. 오늘만 지나봐라. 새사람이 될 것이다."
저 유명한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과 "U. Penn" 병원의 스텝을 겸하고 있는 이디시
계통의 미국인 외과 전문의는 너무나 자신만만하여서 말만 들어도 아픔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물론 진찰 중에 갈색으로 된 진통제 두 알과 생수를 주어서 이미 맛있게 받아먹은
뒤끝이기도 하였다.
약은 금발의 배석 여의사가 주었는데 내가 생수를 시원하게 다 마시고나서 "홀리 워터"
같다고 했더니 동감을 표하였다.
하루가 지난 오늘 통증은 많이 가셧으나 아직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빠가 보고 싵다"는 딸아이의 국제 전화에 엉엉 울었던 만큼 그토록 다시
심신이 아프지는 않다.
이제 사립문을 잠시 여미어두고 국민 보건 체조라도 다시 시작하면서 당분간
건강 증진에만 힘을 쏟을까합니다.
사립문을 닫는 다는 것이 구조상 철통을 매다는 일이 될 수 없음은 저 발해의 농가에서
이미 터득한 바 있습니다.
때가 되어 사립문이 스르르 저절로 풀려버리기가,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에 새겨진
발해의 미소같기만 하기를 바랄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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