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근교의 전원에 사는 내 친구의 집에서 보낸 2박3일은
내 가슴을 다시 뜨겁게 데웠다.)
필라델피아 근교로 은퇴 이민을 와서 전원생활을 하는 친구의 초대로
에이커 가든이 있는 그의 집에서 추수감사절 휴일 동안 2박 3일을
꿈결처럼 지내다가 왔다.
화려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가, 오해가 있을수도 있어서 사정을 조금
풀어 써 본다.
공군사관학교를 나온 이 친구는 주로 비행장 관련의 거대 시설과 설비
건설 쪽에 자신의 전문 지식을 투사하며 군 복무 중의 역할을 빼어나게
수행하였다.
사관학교를 수료한 직후, 그는 국내 최고의 대학에서 위탁 교육과 연구
수련을 거치며 관련분야의 학위도 마친 전문가가 되었다.
고난도의 자격증도 여럿 취득하였다.
때가 되어 군복을 벗은 후에는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에서 최고 경영자
직책을 맡아서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였으나,
불어닥치는 역풍 속에서 관리하던 거대기업의 도산과 운명을 같이 하고
만다.
아니, 기업의 운명이 다 한 다음에도 맨 나중까지 남아서 뒷치닥거리를
하다가 어느날 고열과 함께 의식 불명으로 쓸어지고 만다.
17일간의 정밀 진단 끝에 병명도 못찾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퇴원을
하는데,
그 때의 몸무게가 수술 후의 내 상태처럼 12킬로그램이나 빠졌더라고
한다.
그래도 그는 그 기업이나 병원에 대하여 아직도 조금만치의 불만이나
비난을 하지 않는 우직한 사나이이다.
이후 그는 우리 사회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의 절망감을 갖고 부인이
근무한 직장의 연고로 미국으로의 이민 자격을 확보하면서,
은퇴 이민을 결심한다.
그가 택한 정착지는 바로 필라델피아 근교였다.
아들이 이 곳의 유명 대학원을 나와서 자리를 잡은 곳이라서 이민 지역에
대한 연고는 이미 확보되어 있는 셈이었다.
(여름이면 숲 때문에 이 호수도 내려다 보이지 않는다.)
(사슴등 야생 동물을 막느라고 뒷 마당에는 펜스를 쳐 두었다.)
꽤 넓은 전원에서 야생 사슴을 쫓아내며 그는 농부로, 목부로, 만년의
건강을 지켜내며 근면한 나날을 지내게 되었다.
둘러보면 모두 중상류의 백인들만 열댓 가구가 사는 전원지역에서
그들과 함께 자주 lot party도 하면서 코리아를 소개하는 민간 대사의
역할도 해나가는 그의 모습이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워 보였다.
(울울창창한 교목과 관목 숲 속에서 내 친구의 집은 그림같았다.
여름이면 하늘을 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런 그가 내 수술 소식과 회복 과정을 듣고 문병 겸하여 찾아오려다가
우리 가족을 초대한 것이다.
추수감사절이 시작되면서 우리 가족들은 마치 고향을 찾아가는 것처럼 들뜬 아침을 맞았다.
아들 내외도 하나같이 어떤 여행 때 보다 더 가슴이 뛴다고 술회하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손주도 무슨 감각이 통했는지 유난히 즐거워하였다.
TV에서는 추석, 아니 추수감사절 행진(Macy's Parade)이 타임스
스퀘어에서 34번가, 한인거리까지 진행 되고 있었으나 우리는 더 큰
행사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뉴저지 턴파이크로 오르는 길은 정체의 현장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추석 전야까지 난리가 나지만 정작 추석날 아침에는
평온과 고요가 찾아오는데,
이 곳은 연휴기간 내내 길이고 식당이고 대형 마트까지 발디딜 틈없이
난리법석이었다.
가다 서다 애를 먹으며 마침내 고속도로로 올라서니 그때부터는 교통이
괜찮아져서 생각보다 일찍 친구의 전원 주택에 들어설 수 있었다.
세상에---.
숲 속에 들어선 열 대여섯 전원 주택을 무어라고 묘사할 수가 있으랴!
위로는 하늘 높이, 그리고 옆으로는 빽빽히 들어선 교목 사이에서
각각의 집들은 특색을 뽐내며 넓직하게 자리를 잡았는데 내 친구의
이층 집도 아름다운 미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림같은 집에는 오랜만에 보는 내 친구가 건강한 옛 모습으로 내 손을
덥석 잡았는데 거친 힘이 느껴졌고,
예부터 아름답고 친절한 부인께서도 감격적으로 집사람과 포옹을
나누었다.
이 댁의 씩씩한 아들도 범강장다리처럼 내 아이들과 금방 친해졌는데
바깥 정원에서 익숙한 솜씨로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하였다.
전원에는 겨울 저녁이 금방 찾아왔고 우리의 환담은 식탁으로 바로
이어졌다.
나는 내 앞 접시에 놓인 "미디엄 웰던"의 두툼한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썩썩 잘라서 맛있게 먹어치우기 시작하였다.
수술 후 두 주가 더 지나서 먹는 고기 맛이었으며 그 많은 양을 내
소화기는 감당해 내기 시작하였다.
내 친구와 나는 그 좋은 와인도 비슷한 처지에서 물리치고 알콜없는
스파클로 건배하였으며 젊은이들은 맥주와 와인을 한 잔씩 즐겼다.
저녁을 포식하고 우리는 지하에 꾸며진 노래방과 피트니스 홀로 가서
운동도 조금해 보다가 마이크를 잡았다.
집 사람은 "발레리나의 순정(?)"을 불렀고 친구의 부인은 사양 끝에
박자 좋고 음정 좋은 미성임을 금방 들켰으며 내 친구도 만고의
고전 가요를 열창하였다.
이윽고 순서가 되자 젊은이들도 세대차이 나는 그들만의 경지를
우리에게 선사하였다.
(친구 부부의 열창)
그런데, 그런데 나는 어땠는가?
평소 파바로티를 기절시켰던 내 음량은 어디로 가고, 노래 한곡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목청은 콱 막혀서 컥컥대지 않는가.
몸도 갑자기 심한 피곤함 속에 빠져들었다.
내 친구의 부축으로 나는 2층 침실로 올라와서 먼저 늘어지고,
정상인들은 거실의 벽난로에 묻어두었던 감자와 고구마를 꺼내어서
맛있게 먹으며 환담 속에 자정을 넘겼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피곤한 전 날과 달리 일단 마음은 쇄락, 쾌청이었다.
내 친구와 밖으로 나오니 내 어린 시절 낙동강변에서 맡아보던
겨울날의 청량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우리는 멀리 내려다 보이는 호수를 목표로 천천히 걸어갔다.
지난 한해 이곳은 비가 오지 않아서 수량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동네를 끼고 들어선 넓고 긴 호수가 이 동네의 격조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을 나는 몇번 쉬었는데, 친구는 그 때마다 적절한 이야기로
내 피곤한 걸음을 도와주었다.
이 곳은 나무를 자르려고해도 작은게 550불, 큰 것은 3500에서 5000불
까지 든다고 한다.
벼라별 장비가 다 동원되어야 큰 나무들을 안전하게 베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친구가 또 낮은 키의 꽃나무와 무우, 배추를 가꾸어 보았으나
사슴들이 내려와서 다 먹어치우는 탓에 결국은 손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겻들여졌다.
아침의 진수성찬은 또 어떻게 표현하랴.
커피까지 끊어버린 나는 이 집의 여러 명품 차 중에서 특별히 북한산
오가피 차를 대접받으며 황홀경에 빠졌다.
아침을 먹고나서 우리는 두대의 차로 나누어탔다.
나이든 사람들과 젊은이들은 따로 나뉘어서 다니기로 한 것이다.
다만 유명한 필라델피아 "아트 뮤지엄"과 "자유의 종"을 다운타운에서
보고 점심은 함께 하기로 느슨한 스케줄을 잡았다.
(필라델피아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내게 필라델피아는 초행 길이었다.
그렇다고 시내 돌아다닌 이야기를 여기에 다 적을 여유는 없다.
잘 알다시피 이곳은 미국 독립선언문이 선포된 곳이고 자유의 종이
울린 곳이며 오랜동안 미국의 수도 역할을 했던 유서깊은 곳이다.
서재필 박사 기념 병원도 있고 아인슈타인 기념 병원은 거대 규모이며
저 유명한 대학 U. Penn이 있고 명문 Draxel대학과 Temple대학이
시내에 있고 그 외에도 200여개의 대학이 산재해 있다.
(리버티 벨을 보러가는 도중 시청 앞에서 태극기를 만나서 반가웠다.
8괘의 방향이 맞는지 모르겠다.)
아, 그렇지,
내 마음의 행로로는 필라델피아를 한번 다녀간 적이 있는지도 몰랐다.
전에 "필라델피아"라는 제목의 영화를 감동적으로 본 기억이 있다.
에이즈에 걸린 변호사가 역경을 거치며 이 곳 법조계에서 소신을
다하여 수임 사건을 승리로 이끄는데,
그러나 그는 마침내 병마에 쓸어져서 최후를 다하는 비장한
휴먼 드라머가 그 내용이었다.
고색창연한 도시의 풍모가 가끔 배경으로 뜨면서 나는 어떤 기시감
속에서 한번도 안 본 이 도시를 센치멘탈 저니로 누빈 기억이 아련하다.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초행의 필라델피아를 총총히 돌아다녀본다.
Museum of Art는 대략 뉴욕의 MoMA 수준이라고 이 곳 사람들은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시내에는 차이나 타운도 있고 베트남 사람들도 많이 몰려살며
한인들은 약 7만 가량 되는데 유동인구를 합치면 이 보다 더 많다고 한다.
"아프로-아메리칸"들이 몰려사는 게토 지역도 광범위하였는데 평온한
모습이었다.
(유명한 필라델피아 미술관, 벌써 크리스마스추리가 나와있었다.)
점심 때가 되어서 우리는 젊은이들과 "종갓집"이라는 순두부 집에서
조우하여 몇가지 종류로 맛있게 먹고나서는 또 따로 움직였다.
그들은 아울렛으로 가고 우리는 "애미쉬 마을"로 갔다.
듀퐁가에서 만든 수목원이 가까이 있는 모양이었으나 걸어다녀야 한다는
말에 엄두를 못내고 일단 애미쉬 마을로 가자고 내가 졸랐다.
애미쉬 마을은 전부터 들어 알고있던 곳이기도 하였고 특별히 그들의
공동체 의식과 전쟁을 반대하는 오랜 내력, 문명의 발전을 외면하는
생활 방식 등이 오래 나의 관심을 끌어온 바 있던 곳이었다.
그들이 사는 전체 규모는 컸으나 외부 방문객에게 열어놓는 공간은 그리
넓지않았고,
개방 시간도 아침 9시에서 저녁 4시까지라서 우리는 가까스로 그들이 사는 내면의 일부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말똥 냄새가 등천하는 가운데 마차를 타고 다니며 이 시대의
동력 이용을 가급적 피하고자하는 자연주의 적인 그들의 자세,
고등교육을 기피하면서 일찍 결혼하여 아이들을 많이 낳고
그 인간의 노동력으로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 감동적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우리도 인근에 있는 아울렛 몰에 잠시 들렀다.
부인들이 손을 씻겠다고 하여서 잠시 들렀으나 부인들은 손을 씻은
다음에는 구매충동이 이는 모습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에서의 추수감사절 구매력은 대단한 바가
있다.
우리가 추석 전야까지 백화점에서 붐비다가 추석날 부터는 시장이
적막강산으로 변하는 것과 달리 여기는 연휴내내 물건 사는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인파 와 차파 속에서 우리는 겨우 빠져나왔다.
저녁은 전원 단지 입구에 있는 "Diner"에서 그리스 음식을 먹고
들어갔더니 젊은이들이 이어 돌아왔는데,
그들은 이 곳, 필라델피아에만 있는 저 유명한 "필리 치즈 스테이크"를
먹고 우리도 맛을 보라고 테이크 아웃으로 두어박스 사왔다.
맛은 별로였으나 필라델피아에 왔다가면서 무식쟁이 소식은 면하게
생겼다.
격의없는 환담과 손주의 재롱을 가운데 두고 필라델피아 전원의 밤은
깊어갔는데,
피로가 천적처럼 내게만 찾아왔다.
나만 좀 일찍 자리에 누웠는데 가족들의 담소는 자정을 넘긴 모양이었고
이윽고 떠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나와 친구는 동네 윗쪽으로 새벽 산책을 하며 열댓채 되는 이 곳 사람들의
우의와 근면한 동네 가꾸기에 대하여 듣고 엿보고 하였다.
이틀에 걸친 새벽 산책으로 나는 입맛을 완전히 찾았는데 친구 부인이
새벽부터 일어나서 만들어 주는 맛갈스런 음식 솜씨까지 겸하여 입으로
들어가는 아침 식사는 꿀 맛에 버금하였다.
아니 꿀맛을 재치고 으뜸이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진심으로 섭섭해 하는 친구 내외와 자제를 뒤로하고 우리는 아쉬움을
그 숲속의 전원 주택에 남기며 떠나는 수 밖에 없었다.
내 건강을 잔뜩 실어 그런가,
승용차는 묵직한 승차감을 우리에게 안기며 뉴저지 턴 파이크를
힘차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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