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기차 역 중, 가장 긴 이름을 갖인 곳은 어디일까?
무조건 길이로만 따지자면 가령 맨해튼의 중심부에 있는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Grand Central Station)"이나,
필라델피아에 있는 뉴욕발 앰트랙의 종착역 "30th Street Station"등이
선두자리를 노릴 것 같다.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에서 친구의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이제 조건을 한정하여서 한 단어로된 이름으로만 따지자고 한다면
틀림없이 뉴욕 주의 윗 지역, 그러니까 업스테이트에 자리한 "포킵시"
라는 동네가 내노라하고 그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포-킵-시",
우리말 철자법으로 쓰면 겨우 세글짜인 동네가 무슨 긴 이름이냐고
할는지도 모르겠지만 사정은 좀 복잡하다.
"포킵시"는 알파벳으로 "Poughkeepsie"라고 표기되어서 무려 열두자가
되는 것이다.
오래 소식이 끊어져있던 중등학교 동기가 바로 이 곳에 사는데
내가 미국에 오고부터는 연락이 되어서 최근 그가 사는 곳으로 나를
초청하여주었고 우리는 2박 3일간을 소년시절처럼 함께 지냈다.
처음가보는 곳이라 그의 전화 안내대로 기차를 타러가며 내 가슴은
뛰었다.
소년시절의 글벗을 만나는 감회가 가장 큰 이유였으나 가장 긴 이름이
주는 호기심도 약간 덧칠이 되었다.
이 긴 이름의 역은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에서 허드슨 라인을
타고가면 맨 나중에 도착하게 된다.
이른바 종착역이다.
차비는 편도 12불 75전인데, 매 시간마다 떠나는 오래된 열차를 타면
이 곳까지 1시간 47분이 걸린다.
기차가 가는 방향으로 허드슨 강변 쪽에 앉는 것이 절경을 감상하는
기본이라고 내 친구는 자상하게도 일러주었다.
사계절마다 변하는 강변의 풍광 감상은 물론이거니와 멀리 강 건너로
병풍처럼 보이는 뉴욕 시와 작은 도시들, 그리고 심심치 않게 다양한
모습으로 허드슨 강상에 걸려있는 다리들이 가히 절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매일 다니는 통근자들에게는 무심한 대상일 따름이겠지만---.
기차는 맨해튼 중심부의 번잡함을 빠져나오기가 참으로 힘들다는듯
한참을 캄캄한 지하를 통하여 달려나오다가 이윽고 지상으로 나와서
이번에는 꽤 높이 매달린 공중철이 되는데, 그래봐야 아직도 아파트
골목 끝으로는 "센추럴 파크"가 보이는 "할렘" 역에 겨우 도달했을
따름이었다.
(할렘 역, 이 지역도 요즈음 개발이 진행되어서 새 콘도가 많이 들어서고 있다. 부동산이 많이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부터 기력을 차린 기차는 씩씩하게 허드슨 강변을 달리는데
그 기세에 따라 변모하는 산천경개의 변화는 타보지 않으면 모두 감지
하기 어려울듯 싶다.
이 장면에는 물론 뉴욕 변두리의 쓰레기까지 포함 되어서 말이다.
업 스테이트로 기차가 달려나가자 곧장 녹지 않은 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근래에 뉴저지와 맨해튼에서 겨울비만 잔뜩 만나다가 하얗게 쌓인
눈을 보니 또한 감개가 달랐다.
나이 들어서는 도시 주변에서만 살아온 내 나태한 생활 공간 탓에
이 눈내린 시골 풍경이 극적이기만 하였고 또 그 얼마만이던가---.
눈 속에 파묻혀 설국을 달려온듯 착각 속에 기차는 마침내 종착역,
Poughkeepsie에 도달하였다.
꾸밈없이 쉰듯한 목소리의 "포킵시, 포킵시"하는 외침이 무슨 영화
속의 한 장면같기도 하였다.
차가 도착하여서는 또 한참을 나는 옛애인이라도 찾는양 플렛폼을
헤매었다.
사실은 나를 초대한 친구가 나와있겠지만 글쎄 이 탁트인 곳에서
내 친구를 어디에서 만나랴.
하긴 우리나라의 중간 규모 역에서도 이제는 그랬을 것이다.
모두 차 문화 탓이었다.
(차장은 차표에 펀치를 뚫어서 검사를 하고나서 좌석에 꽂아둔다.)
널리 여러군데에 펼쳐진 주차장으로 마구 나가는 게이트의 이곳
저곳을 살피는데 내 친구가 웃음을 띄며 닥아왔다.
오는 열차 안에서 기이한 방식으로 그러나 철저하게 기차표 검사를
하던 차장의 행동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탈때나 내릴때나 그 때 이외에는 차표 검사가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친구의 집은 2에이커의 눈 덮힌 대지에 앉아있었다. 뒷쪽은 삼림이었다.)
(동네 한가운데 있는 어떤 집 앞에 겨울 수양버들이 황금빛이었다.)
얼마 전 여럿이서 만났던 일을 제외하면 우리가 이렇게 만난건
정말 한세대만이었다.
그의 집은 가장 긴 이름의 역에서도 다시 25분 가량을 달려가야했다.
역 앞의 다운타운은 여늬 소규모 도시처럼 쇼핑 몰이 있고 편의점들이
있었다.
거리를 벗어나서 시원한 전원을 달려가는 데 깨끗한 눈들이 대지를
덮고 있어서 그저 더러운 설경에만 익숙하던 내 시선을 당황스럽게
했다.
우리가 탄 차가 어떤 얕은 언덕의 모롱이를 돌고나니 그만 그만한
미국의 중산층 가옥들이 에이커 가든을 넉넉하게 깔고 앉아있는
동네가 나왔다.
그 동네 안쪽에 내 친구의 집도 나란히 있었다.
대지가 정확하게 2에이커라고하니 우리 식으로 1200평인가---.
관리하기에 그렇게 편한 면적은 아니었다.
친구는 엔지니어로서의 직장 생활을 은퇴하였고 부인은 아직도 조금
더 간호사 일을 하고있는데, 똑똑한 자녀 삼남매는 모두 나가서 독립을
한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가정이었다.
장남과 백인 며느리와의 사이에 난 4남매의 손주 사진이 집안을 환하게
비추어주고 있엇는데, 아직 남아있는 크리스마스 추리보다 더 밝았다.
(친구 부부와의 환담은 이틀 모두 자정을 넘겼다. 그는 뉴잉글랜드 포킵시 지역의 은자이자 현인처럼 보였다. 와인은 한잔씩만 겨우 하였다.)
그의 서재와 집안 곳곳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가득하였다.
친구의 만년 관심은 기독교 종교 쪽이었고 부인도 전공 쪽 보다는
문학과 종교 쪽이었으며 아이들은 다양한 사회 과학 분야에 대한
관심의 흔적을 보이고 있는 서적들이 각 방의 벽면에 꽉 차 있었다.
오거서(五車書) 만권당(萬券堂)은 아닐지라도 고매한 집안 분위기에
내 기분도 한껏 고양되었다.
도착 첫날 저녁은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면서 만년에 추구하고 찾게된
각자의 우주관이 주제가 되는 담소의 시간으로 가득해워져 지나가고
있었다.
아, 저녁 식사 이야기가 빠졌다.
이 댁의 식사는 2박3일 동안 내내 메뉴가 달랐는데 기본적으로는
자연식을 철저히 지향하는 건강 식단이었다.
가령 밥이 나올 경우에는 반드시 현미와 잡곡이 충분히 섞여서 백미는
결코 밥상 위에 올라 올 수가 없는 원칙이었고, 수북히 쌓아놓은 찐
계란의 경우에는 노른자위를 반드시 버리고 먹었다.
이름도 모를 생 야채와 과일이 항상 한상 가득 나오는 것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는 만년에 프린스톤 신학대학원을 다니느라 4년 반 동안을 따로 학교
근처에서 기거하기도 했는데,
문득 기독교 원리 주의 쪽에 심취한 경향이 보이는가 하면 미국의 건국
초기에 성하였던 이신론(理神論 Deism) 쪽의 영향도 내 무지한 종교적
안목에 포착되기도 하였다.
이신론은 신의 절대성을 인정하되 이지적 측면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이론에 입각하여 작용한다는 믿음이었다.
인본적 사상이 많이 유입된 사유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니 내가 그의 신념에 대하여 공연히 욕먹을 추단을 여기 내어놓는지
모르겠다.
지나놓고 보니 그의 종교관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하기는 질문을 했을지라도 간단명료한 답이 나올수는 없었으리라.
이 시대 가치관의 혼돈상을 개탄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두고온 조국에
대한 애증과 염려와 근심이 당연히 가득 들어있었고 그의 기도 속에는
우리 자녀들의 건전한 가치관을 항상 간구하는 내용이 빠지지 않았다.
고담 준론에 몰입한 우리의 시간은 훌쩍 자정을 넘고 있었다.
이튿날이 되자 우리는 인근에 있는 유명한 "모홍크 호수"로 드라이브를
갔다.
높은 산정에 이렇게 맑은 호수가 있다는 것이 신비한 일이었지만 그 옆에
아름들이 목재로 지은 호텔이 품위를 잃지않고 웅장하게 서있는 모습에
더욱 놀라움이 생겼다.
(산정 호수인 모홍크 호수는 겨울 설경을 뽐내고 있었다.)
멀리 건너편으로는 케스킬 산록이 흰눈을 쓰고 웅자를 뽐내고 길게 뻗어
있었는데, 그 산 속에 "립 밴 윙클"이나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이 무르녹아 있는 곳이 아니던가.
워싱턴 어빙은 이런 전설을 그의 "스케치 북"에 잘 용해하여 초기 미국
문학을 살찌웠다.
(호텔에서 건너다본 캐스킬 산맥, 초기 미국 문학의 배경이었다. 워싱턴 어빙이 쓴 스케치 북 속의 립 밴 윙클과 슬리피 할로우도 이 산록에서
어슬렁거렸다.)
포킵시의 명소로는 IBM 연구소가 있는데 내 친구도 그곳에서 은퇴를
하였으며, 프랭클린 루즈벨트(FDR) 대통령의 기념관도 있었으나 우리는
그런 유명한 이름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 친구의 집으로 들어와서 시대와
세상을 근심하면서 그러나 희망을 지펴보는 대화로 시간을 보냈다.
특이한 일종의 산촌 메뉴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오후 시간에는 친구 내외가
매일 걷는 그 동네의 산책 코스를 한 시간에 걸쳐서 소요한 것도 잊지못할
추억거리가 되겠다.
내가 미국의 건국 초기에 뉴 잉글랜드의 콩코드를 중심으로한 지식인들,
에머슨, 소로우, 멜빌, 등이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의 화두를 두고 모여서 담론하던 분위기를
이 마을에서 느낀다고 하였더니 아닌게 아니라 그도 이 곳에서 그런
모임을 주선하고 있다고 한다.
종교나 철학이나 사회 과학에 국한하지 않고 예술 각계의 인사들이
동네에 있는 점이 다행이면서 또한 이 곳 풍광이 그런 사람들을 끌어
모으지 않았나 싶다고 하였으며 나도 동의 하였다.
친구의 부인도 대화에 담백하게 들어와서 초월주의적 분위기를
보태었는데 친 언니되는 분은 김소향이라는 필명을 쓰는 뉴욕의
시인이었으며 얼마전에는 여성 마라도너로 신문 지상을 장식하였던
분이기도 하였다.
이 댁에 시집이 많은 이유를 알만하였다.
둘째날 저녁 시간은 나에게 헤밍웨이 강좌 시간을 요청하여서 두어
시간을 횡설수설하였더니 친구는 깊은 지식으로 질문과 의견교환을
주도하였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역시 자정이 넘었다.
마침내 떠나는 날이 왔다.
이 날의 주제는 약속한 것처럼 가볍게 우리 사이에 닥아왔다.
우리 동기들의 근황에 대하여 그가 물었고 나는 아는 범위에서
안부들을 전하였다.
유기농 작물로 된 음식으로 점심까지 잘 먹고 우리는 포킵시 역으로
나와서 작별을 하였다.
내가 다음 달이면 귀국을 하는 입장이어서 예전 같으면 작별의 시간이
가혹하고도 치열할 차례였으나 우리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뉴잉글랜드에 관심이 있는한 이 포킵시의 은자이자 현자인 내
친구의 집은 내 행보의 반경에 들어있을 것이었고 특별히 인터넷의
시대에는 거리라는 실체가 매우 허황 되지 않았던가.
토마스 프리드먼이 쓴 "지구는 평평하다(The World is Flat)"라는 선언이
아니어도 우리는 이제 "지구의 반대편"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평평한
지구의 한 평면위에서 숨쉬고 대화하고 또 경쟁하며 지내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시대의 추이에 발맞추어 덤덤하고 "평평한" 인사 같은 것을
포킵시 역전에서 일단 나누었는데, 조금 있다 보니까 플랫폼으로
부부가 어느새 들어와 차창 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참으로 치열한 작별의 시간이 거기 현전(現前)하고 있었다.
누가 지구를 평평하다고 하였던가---.
(이 백인 커플도 이별의 포킵시 정거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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