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에 오래 익숙한 사람도 뉴욕 이야기라면 여백을 두고 달리
생각하는데 내가 무얼 들추어 이야기한다는게 좀 가당찮기도 하다.
그런 맥락을 전제로 뉴욕(NYC)과 관련한 나의 무지, 혹은 미지의 대상
에는 퀸즈 보로에 속하는 "플러싱"이라는 곳도 들어있다.
처음에는 많은 교민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플러싱은
한인들의 아름다운 본향, 마음의 고향, 하이마아트로 자리매김되는
줄로만 알았었다.
(전철 종점 근처 첫 골목에서 한나절에만 난전을 벌이고 있는 부인들은
한인들이 아니고 다른 아시안들 이었다)
그러나 플러싱 지역이 펼쳐지는 7번 전철 종점 일대와 상업지역 "노던
불르바드" 인근을 직접 보고 어느정도 안목 같은게 생긴 다음부터는
그런 생각에 회의가 일기 시작하였다.
하긴 나를 안내한 교민이 다소 자조적으로 "이 곳은 옛날 청량리나
왕십리 같지요---"라고 한 말이 내 느낌에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하여간 직접 답사를 했던 지난 늦가을 이후부터는 플러싱에 사는
교민들이 자신들의 거주지역에 대해서 크게 자긍심을 갖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내 나름대로 갖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내 선입견이 많이 들어간 그릇된 판단이었다.
물론 플러싱에서 나와서 거주 지역을 "업 스테이트"나 뉴저지의 주택가로 옮긴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이력을 자랑하는 표정도 다소간 보인다.
그런게 사람 심리이다.
그런데 어느날 맨해튼에서 오래 살며 활동하는 화가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앞으로 뉴욕 일원에서 투자 목적으로든 거주 목적이든 장래성이 있는
곳을 찾아본다면 브룩클린, 플러싱, 뉴저지의 팰리세이드 파크 등의
순서가 되리라는 것이다.
"플러싱이 한물간게 아니라 두번째라구요?"
"그럼요. 앞으로도 계속 무시할 수 없는 성장 지역이 될겁니다."
(발 맛사지 광고는 한인들이 내건 것이 아니다. 한자가 보인다.)
브룩클린이나 다른 지역은 내가 판단할 범위는 넘어섰지만
교민들이 많이 살아서 평소 관심이 있던 플러싱은 그 이후에 보니 미래의 비전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자주 언론에 보도 되는 것이었다.
예컨데 다양한 공공 투자가 계획, 실천되고 있었고 이에 늦을세라 개인
투자의 흐름이 뒤좇아가고 있다는 내용들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투자를 할 처지라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저 동부 문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 대한 호기심의 차원일 따름이었다.
플러싱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인들이 본격적인 미주 이민을 시작
하던 초기에 대량으로 정착하면서 성공과 실패의 개인사가 만재한
전설의 땅이 된 곳이다.
그 애환은 바로 미주 한인 이민사의 교과서적인 기록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이 곳은 성공한 자가 떠나가고 아직 그렇지 못한 자와
새로운 이민자가 내일을 위하여 땀을 쏟는 곳으로만 알려졌다.
그런데 최근에는 중국 본토의 가난한 화교들이 몰려 들어와서 밑바닥
생활로 돈을 모으고 있는 정황만 강조되기 시작되었다.
한인들이 돈을 벌면서도 건물 확보에 소홀했던 이 지대에 그들은 없는
살림이나마 십시일반으로 돈을 돌려가며 모아 주어서 한 사람씩,
혹은 공동으로 건물을 소유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일찍 성공한 한인들이 이제는 그들의 세입자, 테넌트가 될 판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는 똑똑하지만 힘을 모으는데에는
아무래도 취약하다는 속설이 여기에서도 증명되고 있다는 자조어린
소리가 들리는 세태가 급기야 일어나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그런 이야기들을 들은지 서너달이 지난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이곳의 우리 동포들이 화교들처럼 서로 돈을 모아주며 조금씩 영토를
확장해 나아가는데에는 익숙지 못했을지라도 미국에 일찍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한 걸출한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혹은 펀드를 만들어서
플러싱에 큰 건물들을 매입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은근과 끈기, 오기와 독불은 여기에서도 나타나는 모양이다.
물론 독불장군에 대한 뒷소문이 무성하기는 여기도 마찬가지이나 내가
알아볼 영역은 넘어섰다.
하여간 한인들에 의해서 뒤늦게나마 매입이 된 건물들은 리모델링이나 개축을
통하여서 새로운 상권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화교들의 수준과는 또 다른 차원의
역동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빈 땅에 새 건물을 짓는 계획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플러싱 지방자치 단체도 대규모 사회간접 자본을
공적으로 투입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이런 사정들을 소상히 알게되면서 다시 그 인근을 살펴보니 상권을
형성한 종점과 노던 불르바드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지대에는 성공한
교민들이 좋은 주택에서 잘 사는 모습들이 새삼 많이 보인다.
아는만큼 보이는 이치가 여기에도 통하였다.
베이사이드 등 이곳 교외 지대의 중상류 한인 주택지들은 플러싱 교민
들의 수준이 만만치 않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가 반갑다던가,
우리가 물론 너무 우리끼리 폐쇄적으로 이 다원화 사회에서 생활하여도
안되겠지만 원기가 부칠 때에는 돌아가서 힘을 얻을 "동족 공동체"가
유태인 공동체처럼 엄존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고향 땅이 산넘고 물건너에 있는게 아니라 바로 여기 가까이
플러싱에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의 삶은 결코 고단하거나
곤고하지 않으리라.
이제 플러싱은 새로운 한인의 고향 땅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또한 말이 그러하다는 것이지, 중국 화교들도 같은 아시안으로서 선의의 경쟁과
도움을 주고받는 처지로 보면 서로 이 보다 더한 이웃이 없을 것이다.
이번 음력 설날에도 한중 양국 교포가 뭉치고 합쳐서 설 쇠기 행사를
성대하게 함께 치루었다고 한다.
학교에서도 아시안을 모두 합쳐서 7.5퍼센트가 넘으면 설날을 공휴일로 지정 할 수도
있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덧붙여서 조선족 동포들의 존재를 잊을 수 없다.
중국에서도 동북 삼성에서 어려운 살림을 하던 우리 조선족 동포들은
벌써 뉴욕 일원에만 공식적으로 1만 3천명, 비공식적으로는 2만명
이상이 플러싱을 중심으로 하여 들어와 활동하고 있다고한다.
지난 가을의 맨해튼 코리아 타운, "한인의 날"에도 적은 인원이나마
참석하여 그들의 모습과 동질적 존재의식을 보여준 적도 있었다.
이들도 엄연히 우리와 한핏줄이기에 힘을 합쳐 이역만리에서 함께
살아가야할 숙명의 형제가 아니겠는가.
(뀀이라는 한자는 조선족에 독특한 표현으로 꼬치 혹은 산적이란 뜻이며 새로
생긴 한자 음은 "처얼"(徹, 綴 ?)인 모양이다.)
일부 교민들 사이에서 혹시라도 이들에게 다소 냉소적인 눈길이 있다면
선입견을 버리고 하루 빨리 대동단결할 일이 아닌가 한다.
뉴욕, 뉴저지 한인 식당에서 주방이나 서빙을 하는 이들의 존재를 자주
목격한다.
어떤 조선족 주방장이 우리 교민 신문에 쓴 글이 생각난다.
처음 플러싱에서 고생을 하다가 이제 포트리의 한인 식당에서 자리를
잡고 살만하게 되었는데도, 마음이 허허로워 고향 생각을 하면서
일과가 끝나고 나면 심야 택시비를 감수하며 플러싱의 조선족 친구
들을 만나 술 한잔을 나누고 온다고 한다.
한인 사회와 마음으로 교류하지 못하는 섭섭함이 얼마간 엿보인다.
플러싱에서는 연변에서 먹었던 "뀀"이라는 "고기 산적" 간판을 보았다.
연변 자치주, 특히 연길에서 발견한 이 특별한 별미를 잊을 수가
없었는데 이 곳에서 발견하니 고향 음식을 만난듯 하였다.
우리 조선족 동포의 체취가 물씬 묻어나는 현장이었다.
플러싱 전철 종점에 처음 내려서 본 여러 장면들이 지금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어른 거린다.
한글 간판만 요란할 줄 알았는데 중국 한자가 내노라하고 붙어있을
때에 잠시나마 느꼈던 긴장감,
또한 뀀이라는 뜻의 한자어에서 조선족의 존재를 손에 잡을듯 발견
하면서 갖였던 희열, 한글 간판이 비좁고 작은 가게와 큰 판매장에서
병렬되어 있는 모양을 보면서 느낀 상호 괴리감과 혼란감---,
어느 작은 건물이던가, 도합 다섯의 한글 교회 간판을 발견했을때
처음에는 기이한 느낌과 낭패감이 동시에 밀려들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 한인들의 거리에서 개척교회가 작은 씨앗처럼
뿌려져 일어나 마침내 탄탄한 기반을 잡고 고단한 영혼을 구하러
광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려보면 뜨거운 마음 한량없었다.
인근을 돌아다녀 보니 과연 플러싱에는 주춧돌이 매우 실한 여러
종교의 교당이 산재해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등의 대성회가 번듯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미국을 떠나면서 내 고향같은 마을이 이 곳에도 건재함에 깊은 감동을
가슴에 품게되었다.
한국에 돌아간들 내 고향이 온전히 존재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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