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사대(射垈)에 올라

원평재 2004. 4. 14. 08:37
사대(射臺))에 올라
"이 행장님, 그 백구두 신으시고 강남 캬바레에 부킹 한번 하시죠"석호정(石虎亭)의 박 사범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서울에는 열군데의 국궁장이 있는데 석호정은 남산에 있다."엣기 이 양반아. 우선 아시다시피 난 행장출신이 아니오.하긴 서울에서도 명동이나 강남에서만 지점장했으니 잘 나가긴했지만---.지난 정권 말기에는 본부 임원으로 발탁까지 되어 신나게 일 하다가이 정권에서 시작된 구조조정에 하루 아침 목아지가 날라갔고---.근데 박 사범! 백구두 신고 춤추러 가보라는 소리에는 귀가 솔깃하네.여기 백구두 콧등에 여자들의 빨간 빤스, 흰 빤스, 나중에는 털 빤스까지 비추인다고? 하하하." 국궁장에서 사범과 이런 말을 나누는 것은 누가 듣건, 듣지않건사실 볼성스럽고 불경스러운 짓이었다.그러나 나는 지난 2년간 명퇴라는 미명하에 나를 쫓아낸 본부 인사위원들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고 이로 인한 소화불량증은 마침내 위염과 위궤양으로까지 악화되어서 종합 병원에 입원까지 하였던 뒤끝이었다.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좌고우면 할 것 없이 내 마음대로 지껄이고내 멋대로 생각하면서 내 육체와 마음의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으니 활터에서의 불경타령에 얽메일 일이 아니었다.어쨌거나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역시 명퇴한 분의 권유로 국궁장에 나온 것은 천우신조였다.한달만에 우선 소화장애, 나아가서 정신장애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활을 삼십만원에 맞추고 흰색의 개량한복 같은걸 이십만원에 사 입고백구두까지 신으니 처음에는 이게 어디 개화기의 한량이나기생 오래비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처음 소개 받은 박 사범에게 내가 게면쩍기도하여 한마디 했었다."여보, 내가 이거 한량이나 기생 오래비가 되었네""요즈음은 <애니 오빠>라고 합디다. 언니의 오빠라고, 기생 오래비란 말이지요.그런데 한량이란 말은 원래 나쁜 말이 아닙니다."박사범에 따르면 무과의 초시가 활쏘기인데 여기에 통과하면"한량"이란 타이틀을 주었단다.문과의 "생원" 비슷한 스테이터스였다.다만 과거급제는 이때부터가 진짜 관문인데 그게 쉽지않았다.결국 많은 한량들이 더 이상 진급을 하지 못하고 "한량"이란 타이틀로 고급 실업자노릇이나 하고 다녔으니마침내 "한량"이란 보통명사가 생긴 모양이다."왜 흰옷에 백구두라야만 되오?"게면쩍어서 내가 또 퉁명스레 물었었다.궁수가 사대에 오르면 살(화살) 다섯을 주는데 이걸 모두 과녁(이것도 貫革이 변한 말이라는 설이 있다. 가죽혁자를 쓴 것은 과녁이 가죽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에 맞추면 접장(接長)이라고 칭한단다.접장 정도의 실력이 어느정도인가 하면 이 수준 사람의 활을 맞으면그 자리에서 즉사한다.한편, 살이 과녁에 맞으면 "관중이오"하고 큰 소리로 알려주는 사람이과녁 옆에 있는데 이들을 고전(告箭)이라고 부른다.이 고전들이 접장들의 화살에 맞아죽지 않도록 궁수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그들의 동작을 명확히 보이도록 했다는 것이다."관중이라고 할 때의 중이란 말은 맞을 중자이지요. 풍맞는 것을 중풍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박사범이 유식한체 했다.아니 국궁은 물론 건강이나 대체의학 관련방면의 한학에서는 실제로 대가이기도 했다.하여간 오늘날 학교의 교사를 접장이라고 별칭하는 하는 유래도여기에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활 쏘는 분치고 풍 맞은 사람 없지요."박사범이 판촉성 발언을 덧붙였다."아이구, 등산하는 사람들 말들으면, 입산하면 입원없다.산사람은 산(生)사람이다라고 합디다. 그래도 풍만 잘 맞대---""저녁에 내려와서 황혼 쐬주가 과한분들이었겠죠."박사범은 질줄을 몰랐다.이제 말 씨름은 그만하고 활이나 빨리 당기는게 상 수일듯 싶었다.나는 호흡조절에 실패한듯한 상태에서 얼른 시위를 당겼다 놓았다.150미터 전방에 있는 고전이 깃발을 위로 흔들었다.과녁위로 화살이 날아갔다는 신호였다."오니바람이 불고 있다고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박사범의 지적은 차갑고도 거칠었다.오니는 화살의 뒷끝에 달린 깃털을 일컬었다.깃털 쪽에서 부는 바람이니 궁수의 뒷쪽에서 밀어주는 뒷바람이니까화살이 바람을 타기 때문에 약간 숙여서 쏴야하는데그걸 감안치 않았던 탓이었다.이경우의 반대가 <맞바람>으로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앞바람>이라고도 하고 <안풍>이라고도 하는데,이 때에는 조금 올려서 쏴야한다.남편이 바람핀다고 마누라도 피는 바람을 맞바람이라고 하는것은여자가 외간남자를 안는 모습을 빗댄 것이라고 박 사범이 걸죽하게 설명한 적도 있었다.나는 또 한 발을 날렸다.역시 150미터 전방에서 우리를 보던 고전이 이번에는 왼손을 위로 올렸다."앞 났어요" 또 박사범의 볼멘소리.화살이 과녁의 오른쪽으로 날라갔다는 이야기였다.즉 내가 왼팔을 쭉 벋어서 활의 호 부분 끝을 쥐었는데그 오무린 손의 앞쪽으로 화살이 날라갔다고 해서 "앞 났다"는 것이다.왼쪽으로 날라가면 물론 "뒤났다"는 표현을 쓴다."화살이 과녁에도 못 미쳤어요."박사범이 또 잔소리를 했다.아니 정확한 코치를 한 것이다.고전이 아래로 깃발을 흔들었다.오른 손도 올린 것으로 봐서는 "뒷났다"까지도 겸한 모양이다.네번째 화살을 당겼을 때는 자신이 있었다."관중이오"박사범이 고전 보다도 먼저 소리쳤는데 고전은 깃발을 마구 좌우로 흔들어댔다.오늘은 사대에 올라서 네번째만에 관중을 한 것이다."옛날 같으면 기생들이 지화자 부르며 난리났겟어요."박사범이 칭찬인지 아부인지, 기생에 지화자까지 들멱였다.룸살롱 가자고 부추기는 건아닌지---.이제 처음 받은 살, 다섯 중의 마지막 살이 남았다. 봄바람이 꽃샘 추위를 하느라 차가웠다.마음이 조금 조급해졌다."관중하시는 것을 보니 마침내 화살 날라가는 것도 눈에 다 들어오시죠?"박사범의 아첨이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그래 오늘은 룸살롱이다---. 속병도 거의 다 나아가고 있겠다---,코스닥에 상장한 벤처 기업에 투자한 돈도 몇배로 불었겠다---.이럴 때 기분안내고 관속에 들어갈 때 내랴."태종이 태조가 쏜 화살을 기둥 뒤로 숨어서 피하고 또 손으로 잡아내기도 했다는 고사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을 이해하실겁니다."박사범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처음에는 화살은 커녕 고전의 동작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이제는 화살의 움직임도 보이고 마음 같아서는 화살을 손으로 받을 기분도 없지는 않았다.필드에 나갔을 때와 흡사하지않은가.처음에는 공이 페어웨이 어디쯤에 떨어졌는지, 오비가 났는지도 못가리는것 아닌가.마지막 화살로는 갑자기 방배동 카페 골목의 미스 정을 맞추고 싶었다. 그게 은행에서 쫓겨났다고 사람을 우습게 보고 손목도 잘 만지지 못하게 했지.이게 큐피드의 화살이라면 그냥 가슴팍에다가, 아니 오금에다가 박으면서"네 이년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소리 소리지르고 싶다.그러면 사랑의 살을 맞아서 눈이 뒤집힌 그 년이 "지점장님, 지점장님 한번만 확!"하고 따라다녀도 상종 조차 하지않으련만---.나는 시위를 힘껏 당겼다.당기면서는 순간적으로 이 화살을 전통에 두드려서 점검해 봤어야했는데, 그 과정을 빼먹었네---,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쳐갔다.마침내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그런데 갑자기 왼 손 엄지 손가락에서 불꽃이 일었다.아니 붉은 피가 솟구치고 흰 뼈가 툭 불거져 눈앞으로 튀어나왔다.화살 중간이 부러지면서 날카롭게된 뒷쪽부분이 내 왼 손 엄지 손가락을 파고 든 것이었다.말하자면 지척에서 화살을 맞은 꼴이엇다.손가락이 뭉텅 날라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이런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있어서 사대에서 화살을 쏠 때에는반드시 전통에다가 화살을 톡톡 두드려보게 되어있었다.화살은 매번 강하게 표적에 맞는 충격으로 말미암아 부러질 확율이 상존하였고그런 우려가 내포된 화살은 두드려보며 듣는 소리로 골라내어야 되었다.하지만 방배동 카페 골목의 미스 정이, 아니 태만과 방심과 오만과 부도덕이 이런 과정을 간과케하였다.앰뷸런스 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고, 나는 온 몸에 샘솟는 비지 땀 속에서 엄지에 박힌 화살을 오른 손으로 잡아뺐다."삼국지에 나오는 장수같네" 그 난리통에도 어디선가 농담이 나왔다.에라, 어느 죽일 놈이 날 또 죽이려드는구나---.심사가 확 뒤틀려서 누군지를 확인코자 하였으나눈에 보이는건 휘뿌연 눈안개 뿐이었고이윽고 반성의 눈물이 늙은이의 눈에서 흘러나왔다.한평생 맨날 은행에 출근하여 잘난체 도장이나 찍고 살아가다가어느날 갑자기 남보다 먼져 해직되었다고 천하를 적으로 삼으며불평이나 하고,하늘이 무너져 온 인류가 다 함께 머리통이 깨지면 좋겠다는 환상에나 사로잡히고---.이 엄숙한 역사성을 간직한 국궁 사대에 올라서도  백구두에 털 팬티 농담이나 따먹고---.그래 이제부터라도 저 은행의 통판 유리 바깥의 엄숙한 현실을 직시하고,화살촉처럼 준엄한 삶의 모습을 겸허하게 배우고 확인하리라.피를 뚝뚝 흘리며 나는 비장한 주문을 읊어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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