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서부 출장 일지(日誌) / 1

원평재 2004. 4. 25. 06:54
국책 연구소의 부소장을 맡고 있는 내가 연구원 셋을 데리고 미국 서부로 떠난 것은 총선이 있던 날이었다.아니 셋 중에서 하나는 흘리고 갔다.세상에! 여권 유효 기간이 지난 것을 모르고 있던 연구원 하나가 인천 공항에서 체크 인을 하다가 끔찍한 에러가 발견된 것이다. 이런 수속을 담당하는 우리 연구소의 총무부에도 잘못이 있었고 발권을 대행한 여행사도 경솔하였지만 가장 큰 잘못은 물론 본인 귀책 사항이었다.사대 근성이 여기에도 있었나, 미국 비자만 밝힌---.총선 휴일이라 달리 손을 쓸 도리가 없어서정확히 24시간 후에 똑같은 루트로 우리를 따라오라고 당사자에게는 엄명을 내린 다음,미국 쪽에는 우리측 발표 순서를 맨 뒤로 돌려달라고 모바일 폰으로 연락을 취했다.캘리포니아의 A시에서 열리는 삼각 세미나에는 중국에서도 베이징에 있는 대학 연구소가 또 다른 꼭지점을 이루고 있었는데,이제껏은 우리가 그 사람들 보다는 항상 한 수 위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측 발표자의 사소한 실수가 옥의 티 같다는 아쉬움이 문득 베어나며,요즈음 시름시름 나타나고 있는 국력에서의 묘한 역전 현상 같은 상징적 의식이 목에 가시로 걸려왔다.아무튼 비행기는 떴다.연구원들은 이코노미 석으로 가고 나는 프레스티지에 몸을 풀었다. 국적기 KAL에서 개발한 이 prestige class라는 표현은 국제적으로는 비즈니스 클라스로 통하는 여유로운 공간에 멋을 좀더 덧붙여서 만들어 놓은 명칭이었다. 말하자면 2등석이었다.물론 극소수들은 퍼스트 클래스, 1등석으로 갔다. 퍼스트 클래스와 비즈니스 클래스의 럭셔리는 대충 비슷했으나 1등석은 어쨌든 아주 소수가 향유하는 비행기 맨 앞쪽 일부의 성소같은 곳을 일컬음이었다.하여간 비즈니스 클래스의 넓은 공간에서는 매끼 식사도 제공 시간보다 30분 전쯤 세가지 정도의 메뉴가 있는 카르테를 펴놓고미리 주문을 받으며,와인 서비스도 보르도나 나파 밸리의 것을 언제든 골라마실 수 있는 특전이 무시로 주어지고 있다.와인 색갈은 무엇인가.퍼플? 버밀리언?자홍색? 홍자색?그래 여러가지가 있으니 퍼플이라고 부르자.어릴때 터졌던 코피 색갈이거나---.그건 그렇고 좌석에는 특히 개인용 모니터가 하나씩 따로 붙어있어서 나에겐 더욱 달콤하였다.내가 왜 이리도 얄팍한 안락에 희희낙낙하는가?철저하게 속물이 되어야 오늘날의 이 무한 경쟁 시대에는 견디기가 쉽기 때문이다.복잡한 사유의 머리를 비워라, 직관으로 버티어라.과거의 가치관을 버려라.그리고 속물적 안락감과 자랑을 깊은 사유의 언덕 위에 드높은 승전의 깃발처럼 내걸어라.하지만 항상 승전보만 있으란 법이 있나?몰라,그거야 그 때가서 생각하는거지 머---.미리 그런 염려하면 지는거야.비행기는 떴다.몇개의 조금 흘러간 영화를 모니터에서 골라보며 와인을 홀짝거리고 USA Today나 아시안 월 스트리트 저녈을 뒤적거리는 사이에도 태평양은 까마득한 비행기 아래에서 태고 이래의 다이나막한 일렁임을 계속하였고,어느 사이에 일부변경선도 너그러이 허리띠를 풀고서 날짜는 너희들 마음데로 하라고 허락하여 주었다.내가 활동하고 있는 어떤 사이버 세계에는 "칼럼"이라고 하는 글 방이 있는데,거기에는 지혜롭고도 영리하나마 수줍은 현인들과 선지자들이 드문드문 거주하고 있다.그들 중에는 영화 예술에도 깊은 조예가 있는 분들이 꽤 있다.감성적인 면으로, 혹은 이성적인 면으로---.그 분들은 지나간 영상들을 재미삼아 다시 보기로 자기자신과 철석같은약속을 해놓고는,그러나 대뇌 세포의 반역인지 충절인지 끝내 재미를 넘어서게 되고마침내 꼼꼼한 재음미의 과정을 거쳐서이 시대의 텍스트인 그 클래식에 생명과 의미를 부여해낸다.거미줄 처럼 아니 누에고치 처럼 빛나는 명주실을 내뿜는 그 천재들은 나같이 얼렁뚱땅한 사람들을 영화 텍스트의 섭렵 수준이랄까,계량적 비교 우위에서 부터 우선 겁을 먹게 하는데아, 이제 그 주눅들었던 텍스트의 숫자를 일부나마 이번 출장 길에 만회를 하게되는구나, ㅋㅋㅋ.물론 이런 따위의 소리를 하는 것도 내가 속물 중의 속물,시러배 잡배 같은 수준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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