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왕비와의 하룻밤 (연재 5회, 끝)

원평재 2006. 3. 5. 22:29
8227

(다섯번 째, 마지막 회)

 

다음 날이 밝았다. 

강선생은 밤에 있었던 일을 다시 향사모 회원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이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궁성터를 살피는 일을 그만 두고 우리도 우선

저기 강 바닥 부터 뒤집시다."

조선족 향사모 지회장이 결연히 소리쳤다.

"하지만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들추고 다닌 얕은 강을 어디서부터 다시 탐사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고 또 지표 조사 허가만 받은 우리가 보물을 뒤지는 모습을 보이면

당국과 큰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우선 산성 현장으로 먼저 가서 조심스레 연구를 해

봅시다."

 

강 선생은 발설한 것을 조금 후회하며 일행을 설득하여 다시 성자성산으로 갔다.

현지의 노인 내외와 총각은 오늘도 풀을 뽑고 밭을 갈고 농사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새벽부터 귀신과 기이한 난리를 친 자신이 부끄럽기 이를데

없었다.

"영감님, 이 곳이 동하국 궁궐 터라는걸 언제 아셨어요?"

그가 물었다.

"그런건 몰라요. 그저 어릴때부터 구려 산성, 혹은 고려 산성이라고 들었지요."

"고구려 산성이요?"

"아니 여기서는 대개 구려나 고려라고 해요."

 

"아, 맞다. 이곳이 원래 고구려 산성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염두에 둡시다. 그래서

그 특징적인 요소들을 확인하고 밝혀보는 방향으로 지표 조사에 임합시다."

강 선생은 무언가 짚이는 게 있어서 성격 규명이 아직은 불명한 동하국이라는 미지의

대상을 막연히 탐사 목표로 하기보다는, 많은 것이 알려진 고구려 산성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  탐사의 나아갈 바를 확실히 재정립하자고 소리를 친 것이었다.

 

사서에 따르면 고구려 산성의 큰 특징으로 성 중심에 "수고(水庫)" 혹은 "수뢰(水牢)"

라고 하는 우물을 반드시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장춘(長春), 용담산에 있는 고구려 산성에서도 물이 샘솟는 연못을 수뢰(水庫)라

하였고 양식을 저장하는 창고는 한뢰(罕庫) 혹은 건뢰(乾庫)라고 하지 않았던가.

최인호인가 하는 작가는 그래서 고구려 산성의 기왓장에는 모두 우물 정(井)자가

찍혀있다는 식의 소설도 쓴 바가 있었고---.

강 선생은 소설가의 확장된 상상력까지 떠올릴 지경으로 어떤 절박감을 느겼다.

 

학술적으로도 고구려 산성에는 우물이 실존하였다.

우물의 크기는 산성에 비례했으나 어쨌든 우물은 있었다.

환인(桓仁)의 오녀산성 같은 곳에서는 말을 먹일 음마지(飮馬池)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포선만노 왕비의 전설에 따르면 그石?보물을 안고 강 물 속으로 몸을 던진 것으로

되어있다.

왕비가 그 난리통에 저 멀리 동구 밖에 있는 브루하통하 까지 달려갔을까.

더구나 아이를 둘씩이나 데리고, 보물함을 품에 안고---?

몽골 기병이 쳐들어 온 것은 바로 그 강쪽으로 나 있는 성문이었는데도?

 

성자산성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산정은 표토를 조금 깊이 파들어가 보아도 물기가

전혀 없는마른 땅이었다.

토질은 오래 퇴적된 부엽토이거나 색갈 좋은 황토였다.

궁궐이나 집터 만으로는 여간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생활용수, 그러니까 물은 어디에서 구해야 했단 말인가?

 

시선을 조금 낮추어서 궁궐터 아래의 경사진 땅, 맨 끝 쪽을 보니 늪지 같은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 언덕배기 아래에는 물기가 질펀하고 식생, 그러니까 식물의 생태도 완전히

달라져서 전날 얻어먹은 민들레 처럼 물과 친근한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가 물이 질퍽거리는 그 진흙 땅으로 내려가서 사진을 찍고 삽으로 땅을 파는

모습을 보이자 조선족 향사모 회원 하나가 한주(漢族)들은 성자산성을 

“위츠산(鱼池山)”이라고도 한다는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그러자 다른 회원이 자기는 “욕지산(浴池山)”으로 들었다고도 했다.

물고기가 있었건, 궁녀들이 목욕을 했건간에 산의 정상 못미쳐에 늪이나 연못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고구려 산성이라면 반드시 있는 그 수레의 존재가 어렴풋이나마 확인이 되는 순간

이었다.

 

물고기가 있거나 궁녀들이 목욕을 할 정도의 연못이나 늪이 역사상 실재했다면

보물의 전설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지금은 연못의 존재가 구체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어제 먹은 민들레가

잔뜩 자생하는 그 곳은 한 때 깊은 연못이나 푸른샘터였던 곳이 서서이 늪지대로

천이된 형태라고도 볼 수 있었다.

"우리 이곳을 한번 깊이 파들어가 봅시다."

강 선생이 강하게 제안을 했다.

 

"지표 조사만 하기로 했는데 괜찮겠어요? 또 도구는 무얼 쓰고?"

사람들의 걱정이 많았다.

"여기 농사 짓는 분들을 위하여 이 곳에 관개용 연못을 파주고 가는 겁니다.

저기 노인들이 부탁한걸로 하지요. 연장은 김씨 노인네의 소가 끄는 쟁기하고

연길 시내에서 경운기를 하나 빌려옵시다."

강 선생이 연못을 파주겠다니까 노인들도 좋아하였고 경운기는 돈만 주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족 농가에서 싸게 빌려오겠다고 하였다.

그날 밤에도 강 선생은 목욕재개하고 잠자리에 들어서 뜬눈으로 밤을 세웠으나

왕비는 오지않고 달빛만 교교할 뿐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은 제법 큰 행사 혹은 공사가 이루어지는 거창한 분위기에서 하루가

시작되었다.

질펀한 늪지를 먼저 소와 경운기에 달린 두개의 쟁기가 갈아엎어서 그 진흙 더미를

아래쪽으로 밀어부치니 금방 크고 넓적한 현무암 돌판이 나타났다.

그 돌판에 로프를 묶어서 경운기가 당기자 이내 돌두껑이 벗겨지고 그 밑으로는

아직도 멀쩡한 큰 샘터가 나타나지 않는가---.

샘은 넓은 편이었으나 이제 깊지는 않았다.

두레박을 만들어 내리니 물도 별로 없어서 몇 사람이 몸을 밧줄로 묶고 내려갔다.

 

샘 밑은 이탄(泥炭)과 진흙같은 것으로 가득하였고 동전과 금 붙이도 모두 산화하여서

부스러진 편린들만 섞여올라왔다.

모두 물구덩이 속에서 부식이 되고 만 것이었다.

해저 유물이 소금끼의 침해 못지않게 방부의 혜택을 입었다면 800년 늪지의 상태는

참혹하였다.

아, 그러나 진흙뻘 밑의 이탄 층을 파고드니 인골이 나오는게 아닌가.

성인의 두개골 비슷한 것이 하나, 나머지는 모두 몹시 삭은 여러 사람분의 팔과

정갱이 뼈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갖고 간 광목에 인골을 소중히 모셨다.

부식된 유류품들도 모두 싸서 일단은 동네에 있는 발해 시기 기와를 얹은 빈집에

모시기로 하였다.

"그 기와집 대문에는 자물 통이 채워져 있던데 되겠어요?"

강 선생이 노인에게 물었다.

"다 헛지랄들이지요. 인차 열어버릴게요."

그러면서 노총각이 무얼 어떻게 하더니 자물통을 툭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내 집안의 방문도 발로 툭차서 열고 광목에 싼 내용물들을 모두 정중히

모시고 들어갔다.

 

"아, 총각, 그 동경, 구리 거울 말이오. 그것도 집에 가서 갖고 오시오. 내가 만원을

지금 줄께. 그리고 이 두개골 있는 보자기에 함께 넣읍시다."

"예, 인츰 갖고 올게요."

대답하는 총각의 얼굴이 환해졌다.

"인츰"이니 "인차"니 하는 말은 모두 "얼른"이라는 현지 조선족 말이었다.

"오늘 수습한 것은 모두 문화재 관리 단위에 보고하고 내외의 여러 신문과 방송에도

크게 냅시다. 그래야  좀도둑도 막고 여기저기 압력도 덜 받을 것입니다. 또 우리

향사모의 활동도 크게 선양이 되고---."

강 선생은 지시를 한꺼번에 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다음 유물들은 지방 박물관에 목록과 함께 빨리, 확실히 넘겨버립시다."

"인골은 어떻게 하나요?"

"궁궐 윗쪽 절벽 가까운 데가 전망도 좋고 배수가 잘되지요, 아마. 황토 흙이 진하고

보송보송합디다. 그 곳에 묻어줍시다. 그리고 그건 비밀로 하자구요. 이 인골들도

문화재 단위 기관에 함께 넘기면 저승가기가 또 어려워지고 연구실이다 해부실이다

돌아다니다가 영혼은 다시 걸레처럼 될테니까요---."

 

저녁은 노인 댁에 부탁을 해서 황구를 한마리 잡고 씨암탉도 두마리 목을 비틀었다.

한국에서 갖고온 캔 막걸리는 벌써 동이나서 독한 흰술을 몇병 사와서 저녁은

거나하게 큰 잔치가 되엇다.

눞지 주위에서 캐온 민들레를 고기와 함께 쌈을 싸서 먹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나서 대부분은 차를 타고 연길 시내의 아파트로 내려갔으나 술이 대취한

몇사람은 노인 집에서 자리를 폈다.

 

강세출 선생은 달빛 교교한 밤중에 개울로 내려가서 목욕을 하고 기와 얹은 집으로

홀로 들어갔다.

누가 고증했듯이 기와는 발해 시대의 것이었다.

발해 기와는 유약을 발라 구워서 연초록 빛이 돌게하는 유난함이 있었다.

그걸 아무나 쓰는 건 아니고 궁궐이나 사대부 집의 지붕과 담에만 얹었다.

천년전 이 땅에서 그 고귀한 기왓장은 낮이면 낮 색갈로, 또 밤이면 달빛을 받아

휘황하고 현묘하게 빛났을 터인데 그날 밤중에도 고구려, 발해의 고토, 성자산성과 

브르하통하 800년 전 비극의 땅에서 인광처럼 빛나고 있었다.

하긴 인간이 사는 땅위에 인류 역사상 비극이 없었던 곳이 어디 있겠으며 또 영광이

무르익지 않았던 땅이 어디 있으랴.

 

그가 발해 기와를 얹은 집의 내당으로 들어가자 아름다운 자태의 왕비가 앉아있다가

정갈하게 씻은 그의 몸에서 여름 옷을 벗겨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도 활활 다 벗었다.

저 프랑스 귀부인들이 몰래 쓰던 고급 향수 듄느인가, 복합 사향 냄새인가,

그 최음의 신묘한 향기를 방 안에 가득 뿌리며---.

 

"장부님, 오늘은 제가 모든걸 다 해 바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저를 드린다고만

생각지는 마십시오.

저도 이제 천년의 굴레를 벗어나서 인간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정염을 불사르고 싶은

것이지요."

"성문 옆 우물 위에 있던 그 현무암의 돌 무게가 그동안 그렇게 무거웠던가요?"

그가 북방 미인 왕비의 벗은 몸에서 배꼽과 허벅지 윗선을 가로지르는 명주 실오라기를

만지며 남성 바리톤 저음으로 물어보았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서러운 세월이었지요."

그녀가 북방 미녀답게 소프래노 음색을 버리고 여성 앨토의 깊은 저음으로 한숨 쉬어

화답했다.

 

이제 그녀는 벗은 큰 몸으로 큰 절을 하더니 그의 배 위로 올라가서 몸의 틈새를 열었다.

실오라기에 달린 사향 주머니가 그녀의 몸 놀림에 따라서 위태롭게 흔들리며 듄느

향기를 사방에 뿌렸다.

그는 최음의 향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다문 입이 때로 열리며 보이는 옹니백이의 저

가지런하고 강인하고 아름다운 치열, 오뚝한 콧날과 서양식 콧구멍, 저 날카로우면서도

서늘하여 그의 눈동자에 유성처럼 콱 내려박히는 그녀의 눈빛---,

또 섯부른 묘사를 삼가케하는 출렁거리는 두 젖가슴과 미끈하고 화려하게 벌어진

엉덩이, 단호한 종아리---.

그 모든 복합 요소가 이끄는 데로 왕비의 몸속을 듀엣 화음으로 감창하며 내왕하였다.

 

"그 못된 궁녀들이 했던데로 다 해 볼래요."

그녀가 참지못하여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러지 말아요. 그냥 하고 싶은데로 하는겁니다. 내가 북방미녀의 몸을 탐욕의

눈빛으로 응시하였듯이 왕비께서도 제 몸뚱아리를 음미하시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축제를 즐기시라구요. 이유와 핑계가 숨어있는 저 구둘장이나 마루밑 같은데가 바로

영원한 타자(他者)의 도피처가 되는것이랍니다.

결국 주체적 사랑은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린 그냥 하자구요.

그렇지 않으면 왕비께서는 포선만노 장수를 포악한 군주나 비겁한 망나니로 만들어야

하고 나도 인차 악처를 하나 만들어 내야해요. 그런 타자로서의 사랑 말고 주체적

몸사랑으로 이 달밤을 지내자요."

꿈결처럼 혹은 민들레 뿌리에 취한 것처럼 강세출 선생은 부르짖으며 마침내 절정의

순간에 힘차게 사출을 하였다.

그리고 거의 혼절하였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매우 빈틈없고 정교하게 처리해야할 일들이 역사 탐방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 여러 단위기관으로 불려다니며 귀찮고 힘든 과정을 선의의 거짓말과 함께

치루어내야했고 때로 800년 묵은 샘물과 유물의 발견에 따른 과분한 칭송의 말들이

그들에게 여름날 시원한 소나기처럼 쏟아지기도 했는데, 결국 하루종일의 종합 기상은

대체로 맑음이었다.

복잡한 일 들도 다 시간이 지나면 잘 되게 마련이었다.

이제 그들의 이름도 날만큼 났다.

 

다만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강세출 선생 마음 속의 의혹이었다.

그는 왕비와의 하룻밤을 혼절하다시피 보낸 다음날 내내 혹시 꿈속에서 몽정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하고, 매우 과학적인 풀이에 매달려 보았다. 

그러나 몽정의 흔적은 아무데에도 없었다.

 

 

(에필로오그)

 

이 글은 우리 출판사에서 계간으로 발간하는 "청담 문학"에 단편으로 발표되었다. 

독자를 끌어모을 요량으로 왕비의 몸매와 몸사랑 장면을 내가 가필하여 처음에는 아주

진하게 묘사했으나 요즈음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이 칼을 갈고 이를 가는 화두. 

"문학사에서 남성성으로 본 시선, 여성의 몸매 묘사", 이런 무서운 주제가 비수로

다가오는 공포감에 못이겨  표현을 사뭇 누그렸다.

 

끝으로 단순한 사적 호기심과 지재권이라는 공적인 문제 때문에 원작자를 찾아 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였다.

다행하면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