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 생각해도 좋으니 우린 파트너 필요없고 둘이서 그저 딱 붙어
갈거요."
"파티너가 있어야 대가리 수, 아니 머리 수가 맞는데---, 하여간 그럼
두분은 꼭 붙어가십시오. 남자 파티너끼리 꼭, 히히히"
"아이구 이게 무슨 파티라고 파트너도 아니고 파티너네---."
내가 혀를 찼다.
"이 대사도 참 보통 아니네. 언니 파트너라는 말도 척 갖다 붙이고.
하여간 대사라는 사람들의 말 재주는 족탈불급이야.
요즈음 할머니들이 성형도 하고 화장도 짙어서 할가씨라고 새로 생긴
말도 있더라만---."
"할가씨?"
"할머니, 아가씨 말이야. 히히히."
그도 부시럭대며 히히히 웃었다.
"아이구, 위대한 할저씨---."
나는 웃지않고 궁시렁대었다.
차가 중부 고속도로, 산업도로 등등을 엇바꿔가며 달리자 사회자는
조선시대 역대 왕의 순서를 두고 빨리 맞추기 퀴즈 시합을 시작한
것이었다.
파티너인지 파트너인지 끼리끼리 의논하여 답하라는 주문이 추상
같았다.
저희들 끼리 미리 한패가 되어서 짜고치는 고 스톱 같은 패거리끼리는
퀴즈를 맞출 때마다 현금을 주었고, 만원내고 탄 사람들에게는
우산을 주었는데 슬쩍 보니 무슨 보훈 단체에서 노인 복지 재단에
기증한 물품이었다.
왕조 실록 퀴즈가 좀 시들해지자 이제 사회자는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
상식 퀴즈 순서로 들어갔다.
"여러 어르신들, 패션 쑈라는 말을 아시지요? 이건 패션 쑈하고 관련이
있는 역사 퀴즈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맨처음 미니 스커트를 입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제기럴! 윤복희를 두고 하는말이네."
박 교수가 좀 알딸딸한 분위기를 풍기며 혼자 중얼거렸더니 우리 쪽에
경계의 시선을 늦추지 않고 있던 사회자가 정답을 금방 알아들었다.
교수님께서도 우산 한개를 얻어걸렸고 막걸리 한 사발도 축하주로
마셔야 했다.
나도 친구 잘 둔 덕분으로 얼떨결에 옆에서 한 사발을 또 들이켰는데
아무래도 소주를 탔는지 매우 독해서 얼떨떨했다.
아니 사실은 이미 소주가 한 커플에 한 병씩 돌았다.
부족한 좌석에는 추가로 또 한병이 배당되었다.
모두 알콜 도수를 낮추어 최근에 출시된 "나즈미"라는 이름의 소주
였다.
판촉 상품으로 무료 기증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도수가 낮았지만 술은 술이었고 "지 애비도 몰라 본다"는 새벽 해장술
이었다.
"자 그러면 이제 어르신들 중에서 한번 퀴즈 문제를 내 보시지요.
아무도 못맞치면 그 출제자에게도 역시 상품이 있습니다."
"저요!"
어떤 할머니 한분이 손을 들었다.
이 사람도 짜고치는 고스톱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무슨 예전에 돌던 우스게 넌센스 퀴즈를 내 놓았는데 아무도
맞치지 못하자 돈을 2만원 타가지고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내 옆에 앉아있던 박 교수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마이크를 잡는 것이 아닌가.
"여러부운~~~. 우리나라에 최초로 팩션을 소개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내가 깜짝 놀랄 사이도 없는데, 이번에는 답이 터져나왔다.
"아, 패션이라면 윤복희라고 했잖아요!"
앞에 있던 어떤 귀여운 할머니가 팩션을 패션으로 알아듣고 소리를 친
것이다.
"아니요. 앙드레 김, 김봉남 오빠요."
또 다른 화장이 좀 징그럽게 심한 할머니의 소리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짝을 맞춘 두 할아버지들이 자기 짝이 맞다고 또
소릴 질렀다.
"정답은 누구지요?"
놀란 사회자가 어서 답을 내 놓으라고 박 교수를 채근하였다.
"둘다 틀렸는데---, 정답은 나도 모르겠소."
"그럼 벌금을 내셔야죠."
사회자가 소리를 질렀으나 벌금은 용서되었고 상품이 두 할머니에게
고루 돌아갔다.
"자네 술 취했나, 이른 아침 빈 속이라서?"
"왜? 이런데서 그런걸 내 놓는다고? 그래 취했는지도 모르겠네. 우리
나라 문학계도 서양물에 다 취했고---."
"왜?"
내가 물었다.
"팩션이라는 장르는 내가 '문학 산책'이라는 대학 교양 단행본을 몇
사람과 어울려 만들다가 우연히 알게된 어떤 미국 문학사 원전에서
얻은 지식이거든.
태라 이글턴이던가 하는 미국의 평론가가 지어낸 말이었어.
팩트 플러스 픽션이라는 데에서 만들었다고 하면서 본인도 적합성
여부에는 물음표를 달았더라고---.
국문학 하면서 사실 영문학 원서를 직접 읽거나 보는건 극히 제한적
이었는데 하여간 그런 재미있는 내용을 내가 우연히 발견한거야.
그래서 내가 몇군데 문학지에도 그런걸 발표도 하고 또 내친 김에
팩션 창작집이라는 이름의 책도 알다시피 작년에 냈잖아.
마침 자네 독후감도 나와서 문예지에 싣고 또 내가 토까지 달았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 팩션이라고 하면 저기 국립대학
에서 '서양 비교 문학'을 강의하는 A교수로 치기 시작하거든.
그 친구가 '영화 속의 문학 세계'인가 하는 시리즈를 일간 신문에 연재
하면서 팩션 기법이 어쩌구 저쩌구 하더라구.
언제인가 이 A라는 작자가 한국에 최초로 '비트 문학'을 들고 온 사람은 '영년 구멍과 뱀대가리'를 쓴 박승훈 교수라고 정확한 고증을 하기에
이제 팩션하면 내 차례를 찾아주겠거니 했는데 그건 자기 전리품으로
굳히기 작전을 펴더라고---.
여기에 일간지들도 국립대학 교수에 서양 문화사를 전공했다고 이
A라는 녀석을 띄우기 시작하고 된장인 나는 슬그머니 깔아뭉게는거야.
이러고도 지식인들이 무슨 중국의 동북공정 욕하게 생겼나!"
내 친구 박 교수가 엉뚱하게 동북공정까지 들먹이며 이렇게 흥분하는
것을 이전에는 본적이 없어서 나는 저으기 놀랬다.
빈 속에 들어간 술과 "패션 쑈"라는 자극적 키 워드가 그의 뇌관을
건드리긴 했겠지만 이런 말도 안되는 자리에서 그런 엉뚱한 한풀이를
하다니.
하긴 기회가 좋았나, 묻지마 관광 버스가 아닌가.
무어라 주접을 떨어도 묻지마, 묻지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귀.
"어이, 그런데 박 교수! 팩션이란 말이 확실하긴 해? 작년에 자네가
출판기념회 할 때부터의 생각인데, 팩션이란 말은 원래 파당이나
파벌, 족벌을 나타내는 말이라서 우리같이 외교적으로 미사려구나
찾고 국제적으로 우아하게 노는 감각으로는 솔직히 좋게 들리는 말은
아니네.
그런데 미국 문단에서 하필이면 그런 신조어를 만들었을까?"
"난 그런 고차원적인 의미 풀이 같은건 잘 모르겠고 어쨌든 우리나라
에서 제일 먼저 쓴건 나야 나. 내 팩션 소설집도 그렇게해서 낸건
자네도 잘 알잖아."
"내가 알면 뭐하나. 서양문학과 국립대학 권위만 소중한 줄로 아는
신문쟁이들이 문제지. 진작 언론 플레이도 좀 하시지, 이 양반아."
"4대 일간지에도 크게 났지. 경제지에도 두군데던가 박스로 났고---.
출판사에서도 손을 좀 썼지.
그런데 요즈음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말이야.
그건 그렇고 에이, 이 대사 말을 듣고보니 팩션이란 말 뜻이 아주
숭악한 것이라면 더 좋겠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심뽀라고 욕하진 말게, 제기럴!"
"좋아, 좋아. 그럼 내가 맨해튼에서 디자이너로 있는 그레이스 여사
에게 한번 물어볼까?
그녀 이야기만 나오면 맨날 자네가 질투의 쌍심지를 돋우지만---."
(계속)
'팩션 FAC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교산의 뻐꾹새 소리 (1) (0) | 2006.03.27 |
---|---|
팩션 쇼우와 세종대왕 밀릉 (밀릉) (3회중 마지막) (0) | 2006.03.20 |
팩션 쇼우와 세종대왕 밀릉(密陵) (연재 3회의 첫번째) (0) | 2006.03.16 |
왕비와의 하룻밤 (연재 5회, 끝) (0) | 2006.03.05 |
왕비와의 하룻밤 (연재 네번째 글, 다음 회로 끝) (0) | 2006.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