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선생은 그래서 큰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하였다.
자신의 위상은 어쨋든 향사모, 즉 향토 사학자의 범주가 아닌가.
그러므로 고구려의 고토에 대한 관심도 원래의 자기 역량으로서는 과분한
일이다.
너무 멀리 바라보지말고 그 중에서도 우선 연변 조선족 자치주 쪽의 유적에만
관심을 집중키로 하자.
그런 현실적 목표를 정해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접근 방식을 조금 더 정확히 구체적으로 설정하였다.
우선 탐사 기간은 혹한기가 있는 그곳 사정을 감안하여 여름 한철로 한정하였다.
베이스 캠프를 치는 시기는 그러니까 6,7,8월이었고 장소는 "연변 자치주" 의
주정부가 있는 옌지(延吉)의 중심부에 아파트를 두어채 얻는 것으로 하였다.
한달 월세는 한국 돈으로 따지면 대체로 20만원 내외, 아파트 한채에 방이 보통
세개이고 거실이 있어서 십여명이 기거할 공간 마련에는 한달에 모두 50만원을
넘지 않는 수준이었다.
식사는 아침부터 사먹기로하고 끼니마다 역시 한국 돈으로 1인당, 100원 내외면
족했다.
그는 해마다 3개월 기한의 고구려-발해 역사 탐방및 조사 팀을 모집하여
참가자들의 관심 영역에 따라 몇군데로 세분된 지역 조사단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초기의 학술 탐사단이 "아! 고구려!"하는 식의 문구가 박힌 유니폼을 입고
다니면서 태극기를 흔들어 댄 일로 중국 공안당국의 불필요한 신경을 건드린 점을
감안하여 표면적으로는 무슨 선전이나 내색을 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또한 발굴되거나 습득된 유물은 값의 고하간에 절대로 갖지않고 중국의 국내법을
준용하여 지방 박물관에 넘기도록 하였다.
아니 사실은 그런 유물 보다는 거대 유적 쪽에 관심을 갖고 말썽의 소지가 있는 유물
쪽은 가급적 연구대상에서 뺀다는 방침도 있었으나 역사 연구가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의 조합이기에 한쪽을 포기하는 절름발이 연구는 나름의 문제가 따로 또
제기 되어서 모든 연구 방법론은 각자의 판단에 귀책시키고 말았다.
강세출 선생은 자신의 지역 연구 영역을 조선족 자치주 중에서도 특히 연길 주변으로
집중하였다.
그 첫째 이유로는 조선족 자치주 중에서도 한국어가 가장 잘 통하는 곳이 점점더 연길
중심으로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도 한자에 대한 실력은 내놓을만 하였으나 중국어 회화 실력이 부족한 형편인데
조선족 자치주라고 하여도 농촌 지역은 이제 밀려드는 한족들에게 거의 자리를 내 주다
시피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두번째로는 연길 사람들이 한풀이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싶은 생각이었다.
연길의 조선족들은 흔히 자기 지방에는 고구려나 발해 시대의 역사적 유물이 없어서
인근 환인이나 집안 사람들에 비하여 뿌리 의식도 약하고 관광 자원도 부족하다는
열등의식이 있는데 이런 고정관념의 타파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지역적 여건으로 보아서 틀림없이 승산이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지금까지의 연구 조사 부족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연길 지역의 향토 사학자들도 그런점에 매우 목말라하며 자신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하소연도 많이 하였다.
물론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전후하여서 100여년간 조선족들이 연길 지역을 곳곳으로
누비고 다녀서 그 유적과 족적은 많이 발견, 발굴되고 회복,중수되었다.
예컨데 가까운 용정의 윤동주 생가와 묘소를 찾고 한국 독지가들의 힘을 빌어서
재건한 사례라든지, 청산리의 김좌진 장군 전승지, 그리고 홍범도 장군의 잊혀진
사적들과 같은 근세사의 유적은 이제 많이 제모습과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나 문제는
그 이전의 "유구한" 부분이 아쉽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기로는 강 선생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종단의 지원을 받으며 허구헌날 여름이면 그 돈으로 만주 벌판을 누비면서,
겨우 만들어냈던 청양 강씨 마을 돕기 사업도 중도에 때려치우더니 도무지
청양 강씨 가문에서 조성한 거룩한 연구 기금 사업을 세상에 선양할,
말하자면 신문에 날 일은 도대체 하나도 못 만드느냐,
혹시 연변 총각이란 말도 있듯이 조선족 처녀와 계집질이나 하는게 아니냐---하는
험한 말들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청양 강씨 일문이 만든 거룩한 연구 기금의 이름을 신문에 드날린 일이 전혀
없었던건 아니었다.
연길을 둘러싼 야산의 주봉이 되는 모아산 인근에서 "구석기 시대"인가 "원신석기
시대"인가의 유물을 출토하여서 보다 상세한 연구는 사학자들이 아니라 고고학자들의
영역으로 넘겨서 지금도 연구는 진행중인 일이 하나 있었다.
이 발견과 연구의 밑받침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청양 강씨 일문의 기금이라는
사실이 크게 보도 된 일이 있었던 것이다.
크게 한 건한 실적이었다.
그러나 국민이나 강씨 일문 종단의 주된 관심사는 "시난트로프스 에렉투스(직립
원인)"이나 "피테칸트로프스 페키넨시스(북경원인)"까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 고구려! 아쉽다, 발해!"일 뿐이었다.
세태의 반영이었다.
강세출 선생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손을 댄 집안이나 동경성으로 가지 않고
연길 주변에 올인을 하기로 작정하였다.
고구려의 건국 초기에서 부터 평양 천도에 이르기까지 이곳 연길 분지는 해란강과
브르하통하를 낀 곡창지대였으며 천연의 요새처럼 산들이 병풍을 치고 있는 곳인데
이곳에 "아, 고구려!"의 역사적 유적이 없을리 없다는 생각이었다.
아니 고구려가 아니더라도 그 이후의 숱한 북방 민족, 우리와 근친 관계에 있던
고구려의 유민들이 웅거한 흔적들을 찾을 수가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간도와 용정에서의 윤동주 중심의 유적 정리, 모아산에서의 원신선기 유물 발굴
작업을 제 궤도에 올리자 그는 연길 분지의 서북쪽으로 나 있는 마반산과 그 옆쪽의
성자산성으로 시선을 돌렸다.
특히 3년전 중국 조선족 향사모에서 발간한 문집 속에 성자산성에 관한 답사기가 게재된
적이 있엇었데 그것도 그가 이곳에 시선을 집중하게된 동기가 되었다.
그때 나온 답사기의 개요는 다음과 같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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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문명 묻힌 력사의 현장
하룡촌
높은 산정에서 바라보면 성자산을 둘러싸고있는 성터자리가 한눈에
뚜렷이 안겨온다.
병풍처럼 둘러있는 이 산은 그 옛날 천연적인 군사요새였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거기에다 둘레의 길이가 4454메터나 되는 높직한 성벽까지 쌓아겠으니 철옹성이
아닐수 없다. .
서쪽의 해발 390메터의 봉우리가 성자산의 주봉이다. 여기에서 서쪽을 바라고 보면
연길분지를 가르면서 유유히 굽이쳐흐르는 부르하통하가 한눈에 안겨온다.
남쪽으로는 하룡촌이 굽어보이는데 해란강이 굽이굽이 휘돌아 부르하통하와 손잡고
곧바로 성자산을 감돌아흐른다. 모아산, 마반산도 한눈에 안겨든다. 모아산이나
마반산에에는 발해시기 봉화대유적지가 있다.
성자산북쪽에 홀로 우뚝 솟은 산 하나가 있는데 산봉우리 정상에 오르면 20평방메터
남짓한 자그마한 늪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늪은 왕이 목욕하던곳이라 한다.
늪 한쪽을 막은 둔덕같은것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인공적으로 만든 늪으로 보였다.
발해가 926년 거란족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성자산산성은 발해시기의 중요한 진이였을
것이다.
거란인이 세운 료를 앞지르고 녀진인들의 금나라가 동북과 중원을 석권하던 말기에
금나라의 료동선무사로 있던 포선만노(蒲鮮萬奴)가 1214년 금나라를 배반하고
동하국(東夏國)을 세웠다. 포선만노는 1916년 수도를 성자산산성에 옳기고 16년간
동하국을 영위하다가 1233년 몽골군에 의해 멸망되였다.
토기파편외에도 산성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였다. 동전과
구리거울, 금가락지, 목걸이,
활촉, 말등자 <<남경로구당공사지인(南京路勾當公事之印)>>,
<<병마안무사지인(兵馬按撫事之印)>>, <<구당공사지인(勾當公事之印)>> 같은
동하국시기의 귀중한 구리도장도 발견되였다.
이런것들은 지금 연변력사박물관에
보관되여있다.
어구에 성자산산성석패가 세워져있는데 정면에 이렇게
새겨져있다.
길림성문화유물단위
성자산산성
길림성인민정부 1961년 4월 13일
공포
도문시인민정부세움
기념석패가 세워진 곳에서 조금 내려오면 도문시 장안진 마반촌의 산성리(山城里)라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 유달리 고풍스럽게 보이는 기와집 한채가 있다. 몇십년전 로인이
산성안의 궁전터에서 밭을 일구다가 기와무지를 발견하였다. 일밭에서 돌아올 때마다
한번에 열댓장씩 3년동안 부지런히 지게로 지어날랐더니 륙간기와집에 얹을 기와가
모여졌다는것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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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에 나온 "석패"라는 표현은 아마도 "석비(石碑)"를 잘못 쓴듯 하였다.
"~였다"라는 표기는 북한과 조선족의 표준 어법이었다.
조선족 향사모에서 발간한 문집을 본 그해 초여름에 강 선생은 평소보다 조금 많은 돈을
장만하여 연길로 왔다.
미리 연락을 취하여 예년처럼 아파트를 얻고 한국으로부터는 좋은 청주와 한식 약과를
준비해 왔다.
그리고 연길에서는 동시장과 서시장을 누벼서 좋은 광목 여러필과 돼지머리, 과일,
양초와 향을 샀다.
답사 개시 전에 현장에서 산천초목과 뭇 혼령들에게 예와 제를 올릴 준비물들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는 몸을 깨끗이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초여름이지만 서늘한 새벽 바람이 불면서 잠이 깨자 그의 눈 앞에 황금빛 옷을 입은
덩치 큰 여인이 홀연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불세출의 힘과 용기가 있는 강세출 선생도 순간 몸이 오싹하는건 어쩔수 없었다.
"누구냐, 요괴면 물러가거라! 나는 해동 유학의 종손으로 요망한 것들과는 관련이 없다.
소리지르기 전에 썩 물러가거라."
그가 위엉을 갖추어서 점잖게 말하였는데 턱이 덜덜 떨리는 느낌은 어쩔수 없었다.
"장부께 이런 모습을 보여서 죄송스럽습니다만 정말 천년을 기다린 어른이 오시는 줄로
알고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댁은 뉘시오?"
"죄송하지만 한가지만 제가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혹시 어른께서도 무슨 보물을 찾기위해
오신건 아니시겠지요?"
"보물이라니, 보물이 있소? 난 그런건 듣지도 못하였고 우리 향사모에서는 그런 물품을
수습하면 당연히 지방 박물관에 신고하는 수칙이 있어요. 명문화 되어있지요. 나중에
중국 문화재 당국, 그러니까 문화 유물 단위와의 말썽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미리
손을 써서 확실히 해두고 있소이다."
"감사합니다. 제가 바로 맞춘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800년 전에 이 지역에 잠시
있었던 동하국의 왕비입니다. 짧은 왕비 생활이었지만 그래서 한이 더욱 많습니다.
동하국은 금나라 변방 수장인 포선만노 장군이 일군 나라입니다. 금 나라에 배신한
장수라고도 하지만 그때 금 나라의 장래는 백척간두였지요."
"동하국의 유래는 내가 알고 있지만 금 나라가 솔직히 한 반도의 고려국과 혈맥이
통하고 있었다고 보시오?"
"그럼요. 금(금)의 왕족들은 지금 대한민국의 김(김)씨 성과 같은 성씨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부탁드리는 것은 그런 역사 공부가 아닙니다. 그저 제발 어른께서 저와
제 불쌍한 아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여서 맨 땅에 묻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지금
물구덩이에 빠져서 구천을 떠돌며 저승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답니다."
"어디에서 당신들을 수습한단 말이오?"
강세출 선생은 이제 몸까지 떨렸으나 침착하게 물어보았다.
"그건 저희들이 발설할 수 없답니다. 발굴하고 수스배주시는 분들의 한 점 부끄럼 없는
성의가 있어야 저희들은 구원이 된답니다."
"윤동주 시인의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마음으로 우리는 매년 이 곳에
온다오. 내가 잘 모르겠으나 우리의 목적이 왕비의 처지를 구하는 것과 과히 멀지
않은듯하니 내 노력은 해 보겠오이다. 새벽 날씨가 차니 어서 돌아가 보시게."
"제발 저희들을 구해 주시면 이 몸을 다 바쳐서라도 보은을 하겠나이다."
여인이 끝에가서 북방여인의 큰 몸매에 약간의 교태를 부리며 치마를 끌고 사라지는데,
어느새 동녁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 시대 문화로 때를 밝히자면 "에오스의 새벽 여신이 미소를 짓는 시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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