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장편; 빈포 사람들

회계머니-헤게머니 (2)

원평재 2006. 4. 9. 07:20

남녀 동기들은 오래 전부터 친목계를 하였다.

처음에는 문자 그대로 좁쌀처럼 적은 액수의 계금이 모여서 돈 쓸 동기에게

은행보다는 조금 비싸지만 무슨 담보 같은 것 없이 쉽게 빌려주었고

그러다 보니 쉽게 돈이 불어났다.

금융실명제가 시작되던 해에는 예금주 문제로 한동안 옥신각신했으나 그것도 

단체를 예금 주체로 하는 규정이 생기면서 잘 해결이 되었다.

돈을 굴리는 책임은 당연히 남대문에서 일수를 찍는 춘희가 맡았고 처음에는

동기들에게만 빌려주던 돈이, 나중에는 보다 높은 이자로 얼굴도 모르는

시장 상인들에게 대출이 되기 시작하였다.

 

나도 처음에는 그 돈을 좀 썼다. 

내가 밥을 얻어먹으며 기술을 배우고 잔뼈가 굵은 이용원 사장님이 갑자기

돌아 가셨을 때, 나는 참으로 내 몸둥아리라도 팔고싶은 절박한 심정으로

돈을 모아서 그 가게를 샀다.

그때 동기회 기금은 은행의 신용을 대기 힘든 내게 참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초등학교 동기회 기금이야 대수롭지 않았지만, 우리보다 나이 많은 선배들과

결혼하여 자리를 잡은 여자 동기들이 자기들끼리 만든 곗돈은 꽤 어지간했다.

 

초등학교 우리 선배들이란 모두 군사정부 시절에 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

이었다.

그 선배들이나 옆 쪽 고성 사람들의 마누라가 된 여자동기들이라 씀씀이도 컸고

돈의 단위도 우리하고는 사뭇 달랐다.

 

내가 남들은 "퇴폐 이발관"이라고 부르는 "건강 휴식 이용원"을 삼각지에 차리며

점차 영업을 확장할 때에도 여자 동기들의 곗돈 기금은 크게 요긴하였다.

요즈음 이라면 나도 집과 가게를 담보로 하여 은행 융자를 받을 수 있으나

그때만 해도 은행 문턱은 높고 내 재산은 신용이 되지않았다.

맨날 외제 승용차를 몰고다니며 남한 천지의 도로는 모르는 데가 없고

장안의 이름난 고급 식당의 음식 맛에도 이골이난 "길순이"라는 별명의 여자

동기는 개인적으로도 당시 돈을 많이 꾸어주었다.

 

위험하지 않겠냐고 길순이를 위하는 척, 만류하면서 따리를 붙인 동기들이

서넛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길순이의 투자 포인트는 간단 명료하였단다.

"까짓거 썩는 물건 장사도 아니고---. 단속 있을 때만 숨을 죽이면 독버섯처럼

또 솟아나는 장사니까---."

"투자 포인트"니 "간단 명료"니 하는 고급 말을 섞어서 길순이가 나에게 직접

해 준 말이었다.

내가 무식해도 설명이 좀 섭섭하다는 것은 알아차렸는데 아마도 나를 믿는다는

것과 돈 떼먹을 궁리는 하지 말라는 침을 놓는 말 같았다.

돈 많이 번 선배에게 시집가더니 기집애가 교양이 많이 붙었다.

 

하여간 나는 그런 돈으로 이발관 뒤편의 헌집을 사서 휴식 별관, 남들 말로하면

퇴폐 밀실을 차려서 재미를 많이 보았다.

 

길순이가 차량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에도, 나는 차용증서 하나 없이 빌렸던

돈을 반이나 갚아주었다.

반이나 갚은 돈의 액수를 새삼 따져보니 이자는 치지않은 원금 기준이긴 하였지만

어쨌든 나같은 사람도 서울 장안에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의리를 생명처럼, 아니 그 정도 까지는 몰라도 참으로 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보라,

서울에서의 세상살이가 순 날 도적 짓거리같은 것을---

내가 삼각지에서 "건강 휴식 이용원"을 열고 피로한 우리 이웃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뒷골목 주위에는 유명한 "대구탕" 집들이 즐비한데,

이삼십년씩 해 온 전문 음식점들이 그저 "원 집"이니 "원 대구탕" 정도로

이름을 붙이고 지내왔는데, 어느날 이 바닥에서는 생판 얼굴도 보지못한

사람이 들어와서 간판을 "진짜 순 원조 생대구탕 집"이라고 붙여놓고

식당을 여는 것이 아닌가.

그 이후에 "골목 원조 대구탕 집"이 생기더니  "한국 원조"도 생겼고

"대한 원조", 마침내 "조선 원조 대구탕" 집까지 생겨나는 판이었다.

 

길순이의 사고는 빈포 초등학교 동기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모두들 서울와서 죽자 살자 앞만 보고 달리며 만나기만 하면 모두 성공담이고

돈 번 이야기, 또 돈 벌 궁리와 계획들로 가득하였던 분위기에 일단 찬물을

끼얹는 계기가 되었고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이나 사업도 "달이 차면 기우는" 이치가 있다는 것을

잠시나마 생각케 해주었다.

 

그러나 빈포 사람들이 누군가---.

잘나서가 아니라 못 먹어서 상경한 악바리들이 아니던가.

교수 말마따나 세상사를 "철학적으로 사유한" 시간도 잠시 잠깐이었고 억척스런

생활력과 성공을 향한 행진은 금방 제 자리를 다시 차지하였다.

사람은 길순이 처럼 반 죽음 상태로 숨을 붙여가야 할 수도 있고 모두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이 온다는 거룩한 생각 같은 것은 잘 사는 동네를 고향으로 갖인 사람들의

배부르고 허튼 수작 같기만 하였다.

우리 고향, 바닷가 빈포 사람들의 깡다구 기질이 모두 그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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