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Sex, &

매매춘을 다룬 문학 / 가. 가장 오래된 직업의 유래

원평재 2004. 5. 21. 05:56

매춘을 뜻하는 라틴어 "prostituo"는 대중 앞에서 외설스럽게
몸을 맡긴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대에는 "지불에 의한 매음", "손님을 위한
매음", "종교적 매음", 그리고 "자발적인 매음"등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손님을 위한 매음"은 주인이 베푸는 호의에 다름 아니었으되
그 명분은 "성적인 의례행위"였을 것이며,
그러므로 이때 봉사하는 여성은 일반적으로 소극적 자세를
취하였으리라.

같은 맥락에서 많은 민족간에 이루어진 종교적 혹은 축제적
매음에서도 여성의 입장은 비슷하였으리라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국가 시설로 만들어진 공창(公娼)에 소속된
창부가 공공연히 영업을 했으며 그들 중에는 고도로 지적
훈련을 받고 고급 사교계의 귀족들을 움직이며 권력과 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한 고급 창부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한편 로마 시대에는 특히 풍속의 타락이 심했던 시저 시대에
매춘 현상이 심했다.
이때 특기할 사항은 자발적 매춘에 발을 들여놓는 상류사회
출신의 탕녀들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공공연히 주위 귀족들의 처첩들과
엽색 행각을 벌였고 이에 맞서 다소 바람 끼가 있었던 부인과도
이혼을 하여 내 쫓았지만 정작 자기 딸 율리아는 당시 로마의
알아주는 창녀가 되어서 아버지의 명예에 흙탕물을 끼얹었다.

제르마니쿠스의 아들 클로디우스는 아내인 플란티아
헤르쿨라리나가 창녀 짓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목숨을
노렸다는 죄목으로 쫓아냈다.
그러나 그의 또 다른 아내 메살리나의 창녀 행각은 이보다 한 수
더 떠서 밤에 남편이 곯아떨어지면 짙게 화장하고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가장 너절한 매음굴로 향하였다.

그 곳에 가서야 그는 욕망을 채우고 황홀경에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마침내 최고의 창녀가 되겠다는 생각에 돈을 받고 세금을
내는 유녀(遊女)의 생활에 들어서 버렸다.

키케로는 성적 방종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도처에 유곽이 세워지고 감찰관은 이를 보호하였다.
기혼 여인들도 유녀의 명부에 올라 합법적으로 본능을 채울 수
있었다.

십자군 원정은 매춘을 유럽의 전 지역으로 확산시켰다.
오늘날도 군인들의 이동과 매춘이 무관치 않음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중세 기독교 문명의 금기의 관습도 매춘을 근절시킬 수는
없었고 어느 경우에는 공공연히 제도화되어 운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고 매독이 전 유럽에 퍼지자
유곽의 폐쇄는 국가적인 정책이 되었다.
1577년의 신성 로마제국에서의 경찰령 26조 등이 그러하였는데
국외 추방, 효수(梟首), 태형 등이 매춘에 대한 형벌로 채택
되었다.

특히 이 제국의 왕비였던 마리아 테레사는 "정조 보호
특별법"을 제정하여 특히 매춘부를 엄히 다스렸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엄한 벌들은 폐지되고 결국
벌금형으로 바뀌고 만다.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매춘은 이를 근절하려는 건전한 시민
의식에 대항햐여 끊임없이 그 형태를 바꾸어 가면서 자생해
나가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