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반년만의 외출, 천경자 전 (5-끝)

원평재 2006. 4. 24.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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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티모어에서 온 여인 3 / 1993 / 41 x 32 / 종이에 채색

 

 

 

"참 할 일 없는 사람들이군---."

그가 탄식을 하며 신문사의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하게도 편집국장은 그의 오랜 친구였다.

폰 스피커를 눌러서 두 사람의 편한 대화가 내게도 들렸다.

"김 국장, 이럴 수가 있나?"

"강 박사, 자네가 전화 할 줄 알았네. 귀국한다고 미리 연락하지 않고---. 자네가

들어왔으니 우리 특집 대담 기사나 한판 짜자."

"사람을 이렇게 망신주고도 무슨 대담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나와 내 아내,

권 화백은 사실혼 상태에 있잖아. 난 이제 매장되었네. 탈선한 VIP하고 무슨

거룩한 대담인가---."

 

"내 설명 좀 들어봐. 권 화백도 거기 함께 계시지? 그 분도 너무 하셨어, 하하하.

너무 젊은 용모로 판을 너무 바꾸셨어. 오해도 받을 만해요.

어제 우리 회사로 사진 제보가 들어왔어. 그 여자는 파파라치야. 자네 사진이기에

얼른 우리가 높은 돈으로 샀지.

다른데 넘기는 것 보다는 낫잖아. 그리고 조간에 깔았는데 사회면은 가판과 일산,

분당, 안양 평촌, 의왕, 의정부 정도였고 서울 시내 배달판부터는 연예 오락 쪽의

박스 기사로 줄였어.

이름도 실명이 아니고 영문 이니셜로 했는데 두 양반이 다 K자라서 이니셜로 처리

하자는 내 방침에 데스크에서 불평이 컸어.

K 박사, K 화백, 이거 뭐 근친상간이냐고 험구가 나오더라."

 

 


 

"아이고, 이젠 연예 오락 까십거리로 전락이로세---."

"아니야, 그러지 말게. 권 화백이 전시회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어.

그걸 5월 1일에 오픈하라구. 오월은 가정의 달이잖아. 가정이나 가족의 모습도

우리 사회에서 이제는 급속히 신 풍속도를 지향하고 있어.

시집 장가 안가는 젊은이들의 독신자 가정, 혼자 사는 노인들의 독거 가정,

이혼과 별거자들의 반쪽 가정이 판을 치는 세태에 강 박사는 일찍 사별한 부인을

잊지 못하여 망부가를 부르는데 권 화백이---."

"에이 집어치우게. 권 화백을 아예 죽이려 드는구만.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에요."

"허허, 그래서 권 화백은 가정의 달, 오월에 권위있게 전시회를 열라는 것 아닌가.

우리 신문에서 크게 취급해 드릴께---,

이 사회의 명인들이 펼치는 오랜 로맨스, 서로 상대방을 이해해 주면서 새로운

유형의 가정을 꾸며나가는 실험적 스타일---, 뭐 그런 새로운 가치체계가 

모색되는 대담을 한 판 짜자는거야."

 

"쇼를 하라구?"

"그게 왜 쇼인가. 지금 두분이 그런 사정, 그런 심정이 아니던가? 두 사람이 살아온

뜻과는 달리 잘못하면 왜곡되어 쉽게 달아오르는 우리 사회에서는 매장 되어요.

우리 시대는 다 지나갔어.

여기 신문사에서도 나만 겨우 외롭게 살아남았지, 판은 모두 40대가 짜는 줄 잘 알고

있잖아.

우리 친구들, 입사동기들도 벌써 다 나가고 대기자로 있는 A, 논설 고문하는 B도

옛날하고는 위상이 아주 달라.

방송위원으로 나간 C쯤 되면 아직 힘과 권위가 있지만 그 친구야 나중에 정치판으로

돌았잖아.

하여간 그건 그렇고, 어차피 자네 이야기는 끝난게 아니라 이제 시작이야.

추적 뉴스꺼리로 한동안 입에 오르내리게 생겼어. 자네 시샘하는 과학자들도 많잖아.

이 때 선수를 치고 나가자 이거지. 우리 신문사도 한껀, 아니 그러면 두껀을 하는

셈이네. 자네도 구원하고, 하하하."

 

 

   나비소녀 / 1985 / 60 x 44 / 종이에 채색

 

남자들의 이야기는 길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어떤 뜻 깊은 결말을 만들자는 모양 같았다.

"그래, 그렇다니까, 일종의 커밍 아웃이지 뭐야,"

편집국장의 큰 목소리가 들렸고 내 연인께서는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수용하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호탕하게 웃는 편집국장의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럼 그럼, 망부가 부르는 자네를 사실혼 상태의 권 화백이 부창부수하는거야.

바쁜데 우리 다시 만나지 말고 이걸로 대담 기사 한 판 짤께. 사진은 전에 우리가

대담하며 찍었던 남은걸로 하지 뭐, 어제 들어온 파파라치 것도 하나 더 쓰고,

하하하."

 

편집국장의 말 가운데에 "부창부수"라는 말이 내게 따뜻하고도 정겹게 들렸는데

갑자기 마무리 말이 내 가슴을 비수처럼 찔렀다.

"강 박사와 권 화백은 한국의 싸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봐르 같은 존재야.

그런데 권 화백이 왜 성형수술을 했느냐 말이야. 충동적으로 했다구?

물리학자가 충동 이론을 믿다니---.

카오스 이론이라면 내가 좀 봐주겠지만, 하여간 조심하게.

보봐르 여사도 중간에 미국에서 젊은 남자와 연애 사건이 있었던거 기억해 두라구,

하하하."

여과되지 않은 편집국장의 말이 폰 스피커로 마구 흘러나왔다.

 

 

 

[Canon ] EOS 300D DIGITAL 1/250ms F141/10 ISO20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