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여인 / 1981 / 33.4 x 21.2 / 종이에 채색 |
사실 따지고 보면 뺑소니 친 그녀의 말은 칭찬이 가득든 횡설수설이어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제 현대 화랑에 붙어있는 레스토랑, "두가헌"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가 한옥처럼 만든 그 집의 밀창을 막 열고 들어서는데 제복의 아름다운 여인이
민망한 표정으로 우리 앞에 섰다.
"이제 한 삼십분 후면 오후 네시라서 문을 닫았다가 저녁 6시에 다시 여는데 금방
들어오셨다 나가실 수 있을는지요?"
"아하, 고맙소이다. 알려주어서---. 저녁에, 아니 나중에 오지요."
거짓말 못하는 내 연인이 오늘은 아니고 나중을 약속하였다.
"두가헌"에서 차를 빼어 우리는 그 아래에 있는 레스토랑, "수와래"의 주차장에
차를 맡겼다.
주차장에서 그 레스토랑까지는 좁은 골목길이 꼬뷸꼬불 꽤 길었다.
"잘 나왔어요. 저 위쪽은 시선이 너무 많아요. 안심 스테이크가 맛은 일품이지만요.
와인도 명품이라서 값이 보통 여섯자리에서 일곱자리 숫자가 많더라구요."
"당신이 음식값 타령을 다하네?"
"그럼요, 최근에 제가 지출이 좀 컸잖아요. 이 얼굴 뜯어고친 데에만 해도---."
내가 설명을 좀 더 붙일려는데 그가 내 얼굴을 와락 당겨서 입술을 포개었다.
"아, 당신 입술은 항상 달콤해.":
그가 말하였다.
그의 말은 항상 시의적절하게 달콤하였다.
우리는 힘껏 껴안고 깊이 키스하였다.
그의 혀가 내 입속으로 깊숙히 들어왔다.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얕은 비가 온 후의 골목길은 두 연인에게 정갈하였다.
바로 그때 불빛이 번쩍하였다.
깜짝 놀라서 우리는 몸을 떼고 광망의 진원지 쪽을 보았다.
아까 전시장에서 본 그 날렵한 스타일의 여인이 거기에서 계속 셔터를 누르며 서
있었다.
이제보니 그녀는 공항에서부터 사진을 찍으며 따라 온 모양같았다.
"당신 뭐요?"
"일간 신문사 기자이지요. 두 분 사이는 어떻게 되시죠? 부부 사이인가요?"
"무례하오. 우린 연인 간이요. 무슨 상관이오?"
"국제 과학 윤리 위원께서 부적절한 사생활이라면 곤란하지 않으신가요?"
"잘 알지 못하면 말을 삼가하시오. 그리고 무슨 직함의 사람이---, 그래 무엇하는
사람이---, 라는 전제를 다는 발상법도 참 유치하구려."
이건 모두 내 연인이 분노하여 여기자를 나무랜 말이었다.
"여보, 대거리 말고 빨리 저녁 먹으러 가요."
우리는 그 여기자를 쫓아버리고 그 아래 레스토랑으로 가서 샐러드와 파스타로
와인을 한 병 비웠다.
"당신 참 얼굴이 완전히 바뀌었오. 우리나라 성형 수술 기술이 정말 세계적이네."
우리는 이제서야 내 얼굴에 대하여 이야기할 여유를 찾았다.
"이거 재개발 공사에 삼천만원이나 들었어요. 호호호. 그리고 얼마나 아픈지
죽는줄 알았어요.
국제 전화로 당신 허락을 받는 바람에 그냥 진행되었지 여기 계셨으면 초기 단계에서
벌써 취소하고 말았을거예요."
"사실은 나도 외국에 나가있지 않았더라면 허락지 않았을 것이오."
"내 얼굴이 넓고 커서 솔직히 당신이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항상 생각했어요.
당신 돌아가신 부인께서는 얼굴이 작아서 좋아했지요?"
"싱거운 소리---. 당신은 달라서 좋았고 또 캔바스 위에 모든 아름다움을 다
창조해 내지 않소."
나는 내 연인의 두번째 부인인 셈이다.
20여년 전, 나의 첫번째 전시회에 대한 그의 해박한 평론이 미술지에 실린 인연으로
우리는 서로 만났고 얼마 후에 그는 내게 프러포즈를 해왔다.
증권가의 수백억 현찰 부자인 내 부모가 재취 자리를 허락할 리 없었고 내 연인의
위치도 그 때는 가난하고 이름도 크게 나지않은, 조교수를 막 뗀 자리였을 뿐이었다.
예술에 대한 그의 혜안이 나 같이 오만방자한 미학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어중간한 나이에 상처를 한 1남 1녀의 중년 남자에게 재취라는 타이틀로
들어서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이래저래 우리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평생을 마칠 스케줄이 잡혀버렸다.
내가 왜 이제 와서야 성형 수술을 하기로 작정을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정년을 바라보는 내 연인보다 10년이나 아래인 내가 성형 수술을 하여 다시 10년을
번다면 나와 내 연인 사이에는 20년이라는 세월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수술은 성공하였고 과연 나는 20년 연상의 연인을 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가 근년에 와서 기력이 떨어지는 상태를 느끼며 그렇다면 내가 변신을 하여서라도
그를 자극해 보려는 일종의 객기랄까 욕심이 최초의 동기이자 실마리였던건
사실이었다.
물론 나만의 충동적 발상이었다.
설마 재작년부터 나에게 부쩍 접근하는 젊은 그림쟁이 몇 사람을 의식한건 아니었을
것이다.
하늘에 맹세코!
그래, 편하게 생각하자.
나는 나이를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달덩이 같은 내 얼굴을 반으로 줄이고 싶은
생각이 그냥 정말 충동적으로 났던거야.
아니, 충동적이라기 보다 내재적 강박관념이 전경화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
그의 첫 부인은 유난히 얼굴이 작았다.
사진으로만 본 돌아가신 그 분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마음 아픈 일이 어디 한두가지던가.
주위의 반대를 핑계삼아 그가 그렇게 원하는 재혼을 해주지 않고 지내온 세월이
그의 정년을 앞둔 지금 나에게 빚으로 밀려온다.
얼굴 작은 그 부인도 덜컥 내게 빚을 받으려는 것 같다.
다만 마음 착한 빚쟁이를 만난 느낌으로 내 가슴에 들이찬다.
산다는게 죄업의 해원이자 또 다른 죄업의 축적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자녀들은 할머니가 서대문 쪽에서 내내 키우고 있었으며 나는 접촉을 기피
해 왔다.
그런 부채의식들이 그의 부재 중에 내 가슴에 다시 가득차 들어오자 나는 내 식으로
갑자기 해외에 있는 그에게 성형수술을 제안했고 그는 내 마음을 알고나 있는지
혹은 다른 생각에서인지 머뭇거리지도 않고 알아서 하라고 동의하였다.
그래, 정말로 성형 수술의 전말은 그러하였다.
다른 생각은 말자.
내가 내 연인인 그이와 처음 알던 시절에 유행했던 노래, "나무"를 생각하자.
나에게 접근하는 신세대 남성 화가들의 시선을 나는 나무에 달린 새순이 아니라
곤충처럼 여긴다.
나의 멘토, 그이는 지는 잎새가 아니라 내 뿌리이다.
내 몸둥아리에는 수액이 충만하여 시시때때로 흘러넘치지만 이건 모두 그가
있기에 생성되고 넘치는 순환기능일 뿐이다.
결코 자기 변명이 아니다.
어느 여인의 時(시) 2 / 1985 / 60 x 44 / 종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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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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