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장편; 빈포 사람들

실종(3-끝)

원평재 2006. 5. 17. 06:47

그러나 덕담은 덕담 수준일 따름이었다.

철만이가  어쩌면 주지육림에 쌓여서 호강이나 하리라는 결론을 내린 그 분위기는

논리가 아니라 남의 일에 너무 야박할 필요는 없다는 계산법이 만들어 낸 일시적

현상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종말이가 결코 가만히 있지는 못하겠다는 투로 다시 치고나갔다.

"어이, 남궁 선생! 지금이 때가 어느 때야. 지난번 선거 때하고는 완전히 달라.

잘못하면 패가망신하는 선거법이 생겼는데 그런 대접을 하고 받다가 무슨 일을

낼려고---."

"맞다, 맞어. 그리고 지하실 공사하다가 그렇게 사라질 철만이가 아니라니까.

얼매나 야무지노---."

누가 종말이 의견에 동의하며 남궁 선생을 공박하였다.

 

"철만이 문제로 떠드는구나."

누가 연회장 문간에서 소리를 치며 달려들었다.

고향, 빈포에서 법무사를 하고 있는 준호가 지각 참석을 하면서 좌중을 제압한

것이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 못지않게 기갈찬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공사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공부를 했던 사법고시에는 몇차례 연속

떨어지다가 법원 검찰청 직원 채용 시험으로 검찰청에 들어간 이후 정년을 할때 쯤에는

법무사 자격을 따고 지금은 고향, 빈포에서

법무사 사무소를 개업한 관록이 돋보이는 친구였다.

 

"그게 그렇게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니야. 심각한 데가 있어."

그가 금방 답을 내지 않는 스타일을 아는 동기들이 침을 삼키며 기다렸다.

"우리 사무실에 철만이 여동생이 근무하고 있는데 오빠가 요즈음 공갈 협박에

시달려서 잠을 못잔다는거야. 한달 전 쯤부터의 이야기야."

 

"그러면 그렇지"하는 분위기가 좌중을 감돌기 시작하였다.

"그 건물의 지하 술집이 항상 문제야. 그게 지하 폭력 조직, 그러니까 조폭하고

연계가 되어있는 모양이야. 술집이란 데가 그게 당연하지.

어쨌든 술집 영업이 요즈음 시원치 않다면서 월세를 잘 내지 않더라는 거야.

그런데 철만이가 누구야.

당장 내용증명을 보내고 하더니 결국 술집을 내 쫓고 직영을 하려고 인테리아 공사를

시작했나봐.

그러니 조폭들이 공갈 협박을 시작한거지.

요즈음 그녀석 제대로 잠도 못잤을거야.

나흘 전에도 내쫓은 술집 주인과 대판 싸웠는데 그 이후에 사라졌다는거야.

누이 동생이 울면서 내게 상의를 하더라고---."

 

적당히 덕담 반, 호기심 반으로 결말을 지으려던 분위기가 준호의 말에

급전직하, 무겁고 무서운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가 돈이라도 좀 거두어 형사들에게 갖다주면서 수사를 부탁해 보자."

종말이가 나섰다.

"야야, 섯부른 짓 하지말어. 요즈음 그런 돈 받는 경찰이 어디있냐. 그러고

조폭 문제에 섯불리 나섰다가 큰 코 다친다.

사태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어."

준호가 역시 관록있게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그 술집 차릴 때에 계약서를 만들고 퇴거 조건에 대한 공증서류도

만드는 등, 관여를 많이 했지. 철만이가 얼마나 깐깐해. 완벽한 조건을 만들어 놓고

그 술집을 들여놓았는데 요즈음 불경기라 장사가 잘 안되는 것도 사실이잖아.

그런데도 하여간 이 계약 조건대로 드리밀고 내쫓으니까 술집 주인이 조폭 쪽에

손을 내민 것 같다 이런 말이야.

그 누이 동생이 그로인한 골칫거리를 많이 이야기 하더라고---.

하여간 일이 험악하게 발전한 것 같아. 이거 빈포 가서는 내가 말하더라고

소문내지 말어라."

 

듣고보니 정말 일이 험악하게 발전한 것 같았다.

나도 내 건물에서 이용원을 하고 있어서 망정이지 이웃을 보면 임대 분쟁이 한두건이

아니었다.

"자아, 여기서 이렇게 죽치고 있지말고 영등포의 밤거리를 누벼야지.

어디 술 파는 노래방으로 가자. 혼사 집에서 돈 나온거 없나?"

준호의 말이었다.

"오늘 저녁 쓸 돈은 충분히 나왔다."

종말이의 꾀꼬리같은 화답 목소리였다.

 

"느그들 오늘 자고 내일 내려가야제?"

서울 동기 중의 하나가 조금 걱정을 먹음은 목소리로 권유를 하였다.

"그럼, 합숙이다."

누가 책임없이 큰 소리를 쳤다.

"아이구, 내려가야제. 대전에서 통영가는 고속도로가 생기고부터

서부 경남 가는 길이 얼마나 단축되었는데---."

"맞다, 맞어. 노래방에서 놀다가 시간별로 각자 사정에 맞추어서 헤어지는 거야."

준호가 말하였고 종말이가 얼른 동조하였다.

 

일행이 근처 노래방으로 갈 때쯤에는 모인 사람들 중의 반이 이미 빠져서 분위기가

조금 식었으나 노래방 사정으로는 딱 맞는 규모가 되었다.

종말이는 노래방 시간을 세시간이나 되게 잡아놓고 맥주 캔도 수북이 시켜놓았다.

안주도 푸짐하였다.

뽕짝 노래는 가수가 따로 없었고 춤 잘 추는 소문이 난 남반, 여반 선수들은

서로 안고 잘도 돌았다.

키가 작아서 아무리 춤 연습을 해도 모양이 시원치않은 나는 멀건히 구경만 하고 있는데

운동으로 다진 철만이의 평소 날렵하게 스텝 밟던 모습이 얼른거리는듯도 하였다.

 

영등포의 허름한 노래방 모니터는 화면이 시원치 않아서 상상력을 키우기에는 오히려

좋았다.

하여간 벌거벗은 여자들이 바다에서 헤엄을 치더니 이윽고 수초 우거진 어떤 저수지가

나오고 거기 남자인지 여자인지 반쯤 벗은 사람이 수영을 하는데 그게 꼭 철만이의

잘못된 모습만 같았다.

"신경쇠약이 되면 절벽도 평지같고 물도 맨 땅 같아서 뛰어들 때 겁이 없대요---."

아까 여반 출신의 어떤 동기가 살며시 이야기하던 소리가 생각났다.

 

조금 마신 술기운과 안타까운 생각에 한참 정신이 없는데 누가 소리쳤다.

하도 시끄러워서 소리를 지른 동기가 남반인지 여반인지도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너들아! 실종 사건이 또 생겼다."

"뭐라구?"

"준호하고 종말이가 사라졌어."

"에이, 그게 어디 어제 오늘 이야기인가. 모른척 하지."

 

그래, 나도 언젠가 들은 바가 있었다.

서울 출장이 잦은 준호가 공방살이 낀 종말이와 가끔 둘이서만 만난다는 소문을---.

우람하고 근엄한 준호와 똑떨어지게 머리좋고 예쁘고 가난했던 종말이의 일시적 실종은

어쩌면 영구미제가 될는지도 모를 철만이의 실종 사건과 겹쳐서

이제 정신없이 살아오다가 머리에 흰눈을 조금씩 이기 시작한 중년의 마음들을

비감하게 하였다.

누가 나훈아의 "사랑"을 부르더니 조영남의 "제비"가 또 흘러나왔다.

"그거 강남 제비 앙이가?"

어떤 술 취한 목소리가 간주곡처럼 끼어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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