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남해가는 길 (다섯번째)

원평재 2006. 11. 23. 18:39

"저기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적절하게 자리한 저 섬이 '노도(櫓島)'

라는 유인도이고,

그 앞에 다소곳이 고개 숙인 작은 섬이 '붓섬'이라는 무인도이지요.

서포 김만중은 저 노도에 유배를 와서 마침내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붓섬을 말하자면 예로부터 저 섬을 바라보며 책을

읽은 사람들이 과거에 많이 급제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고시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리로 꽤 내려와서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많아요, 호호호."

그녀가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그녀는 원래 어두운 얼굴 모습이 아니었는데 이날은 어쩐지 얼굴에

그늘이 끼어있어서 갑자기 웃는 모습이 차라리 의외로 보였다.

 

"서포는 저 섬에서 죽는날 까지 '구운몽'과 '사씨 남정기'를 썼다고

합니다.

두 작품 모두 깊은 의미가 있었지요.

'사씨 남정기'는 장희빈에게 빠진 숙종 대왕에게 세자책봉과 관련하여

정도를 걸으라는 상소문의 성격이었습니다.

두 작품 중에서 제가 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쪽은 '구운몽'입니다.

구운몽은 생이별을 하고 떠나온,  한양에 있는 어머니에게 위안을 드리기

위하여 저술했다는 이야기로 제 가슴이 져밉니다.

서포는 마포나루에서 어머니와 망종 뵙고 유배길에 올랐지요.

다시는 돌아가서 어머니를 뵐 수 없으리라는 걸 예측하면서 하직한

별리였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구운몽이 이 곳 아닌 다른 데에서 쓰여진 것일 수도

있다는 일부 학계의 고증 따위는 저 같은 시인의 안목에서는 주요치 않다고

봅니다.

저는 지리산에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그리고 그 유복자로 태어나신

제 어머니와 숙종 시대 서포의 행적이 항상 가슴 속에 오버랩 될 따름

입니다.

그리고 서포가 당시로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산문 문학, 지금의 소설

장르에 손을 댄 용기와 탁견, 시대를 앞서가는 안목과 도전, 전통 시가에

반역을 한 그 모반의 자유정신을 높이 기릴 따름입니다.

 

 

시대의 금줄을 넘어 앞으로 뛰쳐나간

서포의 도포 자락으로 방패연의 연줄을 삼는다.

 

유리가루 묻힌 저 모반의 긴 산문,

그 연줄 잡고 유복자 어미의 못난 딸은

붓섬의 묵향 찍어 하늘에 뿌리니

자유의 날개 좌우익으로 단 해조 한마리 되어

풀어헤친 가슴 속 앵강만을 너울거린다. 

 

서포의 산문을 위하여 언젠가 저는 이렇게 운문을 읊은 적이 있었지요.

'유배지의 좌우 날개'라는 제 졸작 시의 일부입니다. 

서포도 유복자였습니다.

병자호란 때에 강화도를 지키던 아버지 김익겸 생원은 순국을 하고

조선의 맹모(孟母)라고 일컫는 어머니의 극진한 뒷바라지로 벼슬 길에

오른 서포였지만 아까도 말씀했다시피 숙종조, 장희빈의 아들을 왕세자로

봉하는 문제에서 왕의 노여움을 사 유배를 당하는등, 끝없는 정쟁의

희생물이 되다가 결국 이 곳 노도에서 생애를 마칩니다.

그런 서포를 생각하면 저는 제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유복자로 태어나셔서 아들 하나도 낳지 못하고 딸아이 저만 낳으신 

어머니는 평생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지요.

단 한가지는 제가 효도한 것 같아요. 어머니 살아 생전에 중앙 일간지의

신춘문예 시 부문에 장원을 하였거든요.

지병을 앓으신 어머니는 기쁜 소식을 정월 초하루 날자의 신문에서 보시고

숨을 거두셨지요."

 

그 말 끝에 그녀는 조금 눈시울을 적셨다.

관광 버스에 탄 사람들도 모두 비감해 하였다.

"아니, 서해심 시인님. 매주 월요일마다 그렇게 우십니까?"

김범수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아까 '가천 마을'이라는 곳에 있는 암수 바위를 구경하고 옆에 붙은 가천

막걸리 집에서 술잔을 모두에게 한순배 돌린 것이 여행길에 나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듯 하였다.

가천 마을의 술은 잘 익어서 맛이 있었고 조금 독했으며 점심 시간을

넘기면서 사람들의 이래저래 고픈 배에 자극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네, 그러고 보면 제가 자원 봉사 나오는 월요일마다 가슴을 저려 조금

눈시울을 붉힐 때가 많군요.

꼭 그 가천 막걸리를 한 잔하고 난 다음에 그러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아까부터 그 항아리가 무엇입니까. 암수 바위를 보러

저기 해안쪽으로 계단을 내려갈 때와 막걸리를 마실 때에도 품에 안고

계시니 무슨 금송아지라도 들었나요?

올라오시다가 휘청하시면서 아차하면 깨뜨릴번도 하셨지요."

가끔 소리나 지르는 까다로운 관광객을 그녀는 탓하지 않고 잘 보듬었다.

 

"에이, 차라리 저기 암수 바위에서 깨뜨려 버릴걸 그랬어요.

하지만 물미 해안 지나서 금산 보리암까지는 갖고 가야겠네요.

제가 두고내리지 못하고 항상 안고다니는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 호기심이

많아서 자꾸 풀어볼려고 해서 그래요.

여러분들, 제발 나좀 그대로 놔두시면 좋겠네요."

김범수는 술이 약한지 한잔 술에 말이 헤퍼졌다.

 

 

 

 

 

 

 

"아니, 물미 해안을 어떻게 아세요?

물미 해안은 물근리에서 미조 해수욕장까지의 해안을 말하는데 저기

보시다시피 절경의 연속이랍니다."

서해심 시인이 물미해안이라는 김범수의 말에 반색을 하며 다시

그에게 시선을 꽂았다.

 

"아이구, 서 시인님. 물근리가 뭡니까. 물건리라니까요, 물건!

매번 제가 고쳐드려도 안되나 봐요."

고운 할머니가 서해심의 모음 혼란을 웃으며 지적하였다.

"물건리에 독일 마을이 있고 저는 거기에서 내린답니다. 독일 마을에

있는 팬션은 일박에 7만원이지만 방도 많고 시설이 아주 좋아서 가족이

있으면 함께 오면 정말 좋아요.

저는 혼자니까 방 한칸만 디스타운트를 받아서 지내지요. 그 곳

계신 분들과 격의없는, 그리고 격조 높은 대화를 즐기다가 돌아와요.

오해는 마세요. 동지 여러분! 호호호."

 

"네, 할머니께서는 정말 멋있게 사세요. 30년 이상을 다른 나라에서

사시다가 이제는 어느 곳에도 하이마아트가 없는 고향 상실자가 되셨는데

이렇게 진정한 고향 사람들을 비록 소수이지만 물근리에서 발견하신게

얼마나 다행이신지, 결국 할머니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서해심의 잔잔하고 고운 말이었다.

"아, 물근리가 아니고 물건리라니까요, 물건!"

할머니가 또 외쳤다.

"그리고 자꾸 할머니라고 하지 말아요. 아직도 청춘이랍니다."

그녀가 웃으며 항변하였다.

 

"네, 뉴욕댁. 그런데 어떻게 시집간지가 그렇게 오래 되었는데 친정 유산을

받을 수 있었나요?"

멋쟁이 중년 신사가 자기는 처음부터 그게 궁금하였고 관심이 있었다는

듯이 그제서야 전말을 캐물어보았다.

"아, 그건 내가 종가집의 딸이기 때문이었지요. 종가의 종답과 선산이 

모두 우리 일족의 이름으로 되어있었는데 그렇게 두고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갔지요.

그런데 그 땅들이 서해안 고속도로 만들때 수용되고 또 인터체인지로 들어

가고 물류 센터로 흡수되고 하면서 시가 보상이 되니까 아들, 딸 구별없이 

똑같이 배당이 됩디다. 빙고였어요, 호호호."

그녀가 또 격의없이 웃었다. 

"할머니, 아니 뉴욕 댁. 아니 뉴욕 아씨. 저도 여기 물근리, 아니 물건리에서

내리면 안될까요, 하하하."

멋쟁이 중년 신사가 농담인척, 사실은 진담을 털어놓았다.

 

  

 

 

 

 

"독일 마을에는 예약이 없어도 방이 있겠지만 물건리 정류소에서 내리고

말고는 본인의 자유가 아닐까요.

저하고 한 방 쓰실 것도 아닌데, 호호호."

"제가 오늘 밤에 서울 올라가지 않으면 쫓겨납니다. 하하하."

중년 신사가 신사답게 손을 들었다.

그제야 근심스럽던 얼굴을 안심스런 얼굴로 바꾼 서 시인이 입을 열었다.

"저 아래 아름다운 물미해안을 보며 시 한수를 읊지 않을 수 없겠지요.

역시 고두현 시인의 '물미 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입니다.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
지난 여름 푸른 상처
온몸으로 막아주던 방풍림이 얼굴 붉히며
바알갛게 옷을 벗는 풍경
은점 지나 노구 지나 단감빛으로 물드는 노을
남도에서 가장 빨리 가을이 닿는
삼십리 해안길, 그대에게 먼저 보여주려고
저토록 몸이 달아 뒤채는 파도
그렇게 돌아 앉아 있지만 말고
속 타는 저 바다 단풍드는 거 좀 보아요. 


이제 뉴욕 아씨는 내리실 때가 되었네요."

서 시인이 시를 낭송하고나자 기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를 세웠다.

 

"이번 함께 온 일행들이 참 좋았어요. 다시 남해로 내려오시려면 월요일

버스 편을 예약하세요. 다시 만날 기회를 만들게요.

그리고 저 항아리 끼고 계신 아저씨,

금산 보리암까지는 꼭 끼고 가신다니 무언가 짐작은 되네요.

다만 그 사연이 궁금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서 시인께서 듣게 되시면,

아니 꼭 들으셔서 그 사연을 제게 알려주세요.

슬픈 사연같네요."

고운 할머니는 독일 마을로 들어가는 큰 길 가에서 내렸다.

차는 서로 손 흔들 여유도 주지않고 휭하니 달려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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