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할머니 때문에 우리 영업에 지장이 많아요. 협찬사의 싸고 좋은
물건을 퇴박 놓고 사지 않으시니 다른 분들도 영향을 받지요.
그래도 자주 내려 오셔서 자리를 채워주시고 분위기도 띄어주셔서 항상
감사해요."
"에이, 가이드 언니. 내가 광부 할아버지하고 눈이 맞았다는건 과장이네.
그분들이 다들 나와 정서가 맞아서 모두 가리지않고 이야기 상대일
뿐이지."
할머니가 곱게 항변하였다.
"그럼 이 버스 타고 우리와 함께 올라가시지 않으세요?"
혼자 온 중년이 실망한듯이 물었다.
"그럼요. 이 버스 말고 이번 주말에 내려오시는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올라가실걸요. 항상 그렇게 하세요. 그 사이 며칠 동안은 애인 할아버지와
데이트를 하시나봐요."
가이드의 참견이었다.
"나 참, 가이드 아주머니. 내가 애인이 하나가 아니라니까. 여러 나이든
신사분들과 그저 지나간 이야기, 우리나라 한국에서와는 다른 삶의 이야기
들을 흘러간 추억처럼 반추하고 나누며 지내다 서울로 올라가요.
내가 어릴 때 살던 곳이 충남 당진의 송악과 서울의 청량리인데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도 예전 청량리와 분위기가 비슷한 뉴욕의 플러싱에서
주욱 살았다오.
한국에서 미국으로 관광 온 사람들이 아직도 미국에 이런 후진 곳이
있느냐고 놀라는 곳 청량리, 아니 플러싱,
요즈음은 또 중국 사람들과 조선족 동포들이 몰려와서 더욱 예전 청량리
같이 보이는 그 곳이 나는 아직도 살갑고 고향같아요.
그래서 내가 분위기는 좀 썰렁해도 그 곳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배신한
남편이 거기 양로원에 살고 있으니 그 동네는 꼴도 보기싫고 서울 청량리도
완전히 변해서 아는 이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그런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살아야 할 곳이 내가 노년을 의탁할
곳이 아니겠소.
그런데 남해가 그래요."
가슴 아픈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제 각각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관광버스는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운 청정해역을 끼고 어느새 남해 군청으로
들어왔다.
남해 군청에서는 어떤 중년의 부인이 관광버스에 올랐다.
"저는 남해 군청에 관광 안내 자원 봉사자로 등록된 서해심이라고 합니다.
자원 봉사 1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이 안내 제도가 생기자 마자 제일
먼저 등록을하여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월요일 관광안내를 맡는답니다."
아름다운 목소리에 아주 겸손한 거동으로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였다.
"네, 이분이 젊어서 이미 중앙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당선되시고
한국 문인협회와 펜 클럽 회원이신 서해심 시인이시지요.
저같이 문학에는 문외한인 사람이 읽어보아도 쉽고 깊은 내용이 담긴
시를 쓰시더라구요,
남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지식과 또 자연보호자로도 이름난 서해심 선생님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놀랍게도 이 분의 관광 안내를 받으려고 월요일
관광버스를 탈 정도라니까요.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서울에서 따라온 관광 안내원이 서해심 안내 봉사자를 극진히 칭찬해
마지않았다.
"맞아요, 맞아. 저 서해심 시인이 대단한 분이세요. 남해군, 앵강만에 대한
애정도 그렇지만 외우고 계신 시는 또 얼마나 많다구요."
할머니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아이구, 할머니 또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서 시인은 중년의 나이에 얼굴이 넓고 육덕이 있는 착한 부인의 인상이었다.
"저는 여기 남해섬 출신으로 고등학교는 진주에 나가서 했지요. 진여고
다닐 때에 가까운 곳에 있는 진고 남학생을 만나서 연애를 하느라 공부는
시원치 않았는데 책은 밤을 새우며 많이 읽었어요.
그 남학생과 결혼을 해서 여기 제 고향 남해로 돌아와 농사도 짓고
시도 짓고 어업도 좀 하고 그렇게 지낸답니다."
이 날 오후에 그녀가 마이크를 잡고 남해를 대상으로 한 시를 외운 것은
십여 작품이 넘었다.
김범수가 타고온 관광버스는 특별히 문학 기행을 목적으로 한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연한 듯이 시 낭송으로 관광 가이드의 첫
임무를 시작하겠다는 자세였고 탑승한 관광객들도 고즈넉히 그녀의 문학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그녀가 낭송한 첫 시가 고두현의 "남해 가는 길"이었다.
남해 가는 길
고두현.
물살 센 노량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
선천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날인가
윤삼월 젖은 흙길을
수레로 천리 뱃길 시오리
나루는 아직 닿지않고
석양에 비친 알몸이 눈부신데
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
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
꽃같은 저 섬으로 가고나면
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
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을 모아
화전을 만들고 밤에는
어머님을 위해 구운몽을 엮으며
꿈결에 듣던 남해바다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그녀의 낭송에는 서부 경남 특유의 모음 혼란이 언뜻언뜻 스몄으나
"슷갓처럼 읖드린 앵강에 묻혀
다씨는 살으스 덜아가지 아너리---"
하는 마지막 두 행에서는 듣는이의 가슴을 줘어뜯는 페이소스가
일렁거렸다.
그녀의 관광 안내는 모두 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름난 시인의 시의적절한 작품이 없는 경우에는 그녀가 지은 시를
수줍게 낭송하면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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