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남해 가는 길 (일곱번째)

원평재 2006. 12. 1. 07:23
 

김범수는 유자 술을 다시 비워내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회사의 오너가 최종 프레전테이션 장소에서 정희를 알게 되고는

반했다는군요.

섹시한 여자라고 거의 대놓고 감탄사를 질렀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평화시장에서 미싱을 돌릴 때부터도 그런 이야기는 들었어요.

하지만 내가 정희에게 끌린건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가난과 불평등을

이기겠다는 순전한 도전 정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의의 기개,

모르는 것에 대한 탐구심과 빠른 학습 능력, 미래에 대한 순수한 희망과

기대, 뭐 이런 것들이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정희의 그런 정신보다는 몸매만 바라보았네요.

신분의 고하 간에, 또 무슨 나쁜 마음이 있고 없고 간에 그런 느낌이,

그런 필이 꽃힌데요.

팔자인지도 모르지요.

사실 내가 알기로 정희는 남녀 관계에 대해서는 숙맥이거나 초연했어요."

그는 유자 술을 다시 따루어 한모금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하여간 그건 어쨌든 그 오너라는 작자는 실무자 선의 가계약을 파기

하고는 자기와 직접 흥정을 하자고 나섰다는군요.

그리고 정희를 능욕, 글쎄 이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게

통정을하고---.

이 멍청한 여자는 버릴 수 없는 야심 때문에 그 더티 게임에 말려든 모양

이겠지요.

 

이제 이 여자가 벌여놓은 덫과 말려든 덫이 얼마입니까.

나는 그 불운한 과장과 두어차례 술을 나누었지요,

자신의 순정한 사랑을 능욕하였다고 그 오너에게 대들었다는군요.

너무 분해서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이랍니다.

정희에 대한 서운한 감정도 함께하여서 말이지요.

이게 참 가당찮은 이야기인데도 사실이랍니다.

마누라와 그 과장이 한동안 나를, 이 김범수라는 존재를 아예 안중에서

제외한 결과 같기도 하고 내가 또 내 존재를 그렇게 영락시킨 결과이기도

하겠지요.

 

내가 어느날 그의 연락으로 술 자리에 나갔을 때 이미 백수가 된 그는

나처럼 폐인 비슷하게 되어 있더군요.

정희가 그 계약의 조건으로 과장과의 관계를 청산하라는 오너의 엄명을

받아들이자 과장은 회사 오너의 부인에게 사진과 글을 보내서 난리를

쳤다고 하더군요.

그는 정희가 아무리 돈에, 아니 성취욕구에 눈이 어두웠을지라도 자신과

헤어지고 어떻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지를 이해 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정희는 자기로 인하여 새로 만들어졌다고도 소리를 질렀는데 나야말로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더군요.

 

정희가 류케미어, 그러니까 성인 혈액암, 백혈병에 걸린건 그때쯤이었어요.

병원에서 하도 많이 들은 말 류케미어, 그 성인 류케미어는 급속히 진전

되었어요.

반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진단이 나오고 어느 날, 정희는 과장과 예전에

즐겨다니던 길을 드라이브 나갔더군요.

남한강변, 카페 길에서 과장은 술을 많이 마셨고 돌아오는 길은 정희가

핸들을 잡았는데 큰 사고가 났어요.

사실은 사고인지 운전자의 자살 사건인지, 바로 아내가 다니던 그 보험

회사하고 지금 다툼이 일어나 있어요---.

아내가 수취인을 딸로하여 큰 보험을 들어놓았더라구요.

하여간 만취의 과장은 경상으로 살아났는데 정황때문에 정희에게 유리한

증언이 제대로 채택되지 못하고 있지요.

아, 정희는 그 자리에서 죽었어요.

그래서 저 항아리에 담겨있지요.

보험사와의 분쟁 때문에 화장도 늦게 했어요.

 

정희는 자신의 병을 알게되자 남해 이야기, 특히 서 시인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금산 보리암 이야기도 간절하게 많이 했구요.

진여고 때 방학만 되면 서시인과 거기 화강암 바위 밑으로 자주 갔다고---.

서 시인께서는 남해를 지키려했고 자기는 결코 남해에서 살지 않겠다는

젊은 날의 꿈과 각오도 거기에서 나누었다면서요---."

 

"결국 그렇게 된 셈이잖아요."

서해심이 눈물을 훔치며 조용히 대꾸하였다.

"서 시인께서는 그렇게 뜻을 이루셨지만 정희는 서울가서 제 뜻을 펴고

산 것도 아니고 이렇게 죽어서 돌아왔으니---."

 "죄송하지만 일어서시죠, 가시면서 차에서 이야기를 나누셔도 되고.

조금 늦었네요---."

서울에서 온 가이드가 조용히 채근하였다.

어느새 그녀와  아까 중년 신사, 그리고 항아리에 아침부터 관심이 많았던

중년 부부들이 둘러앉아 귀를 기우리고 있었으나 두사람은 별로 개의치

않고 떠들지도, 그렇다고 소리를 죽여 말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김범수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듣고 탄식을 하다보니 계획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으나 누구도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은 얼른 차에 타시고, 차에서 이야기를 계속 나누시지요."

어느새 기사도 귀를 기우렸는지 그렇게 말했다.

"아니,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어요. 다만 조금 혼자 생각할 시간이나

있었으면 좋겠네요."

김범수는 맨 뒷좌석으로 가서 혼자 눈을 감았다.

차가 출발하자 서해심 시인이 마이크를 잡았다.

"보리암 이야기는 가서 현장에서 설명 드리고 술들을 하셨으니 조금 눈을

붙이세요.

저는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이라는 시를 낭송해 드리겠습니다.

 

남해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 시는 알듯 모를듯하지요.

조금 어렵다 할만한 시지요. 몇년전에 시를 쓰신 이성복 교수를 여기에서

뵈었는데 그 분도 자신의 이 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하시데요.

소이부답,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할까요.

물론 현장에서 기암괴석의 화강암 모양과 또 여러가지 불교 석조물들을

보시면 시인의 시상에 그냥 함께 잠기게 되기도 합니다만---.

아, 눈을 좀 붙이시라고 했으나 이 시를 낭송하면서 저기 항아리 들고 오신

손님의 사연과 제가 어떤 식으로든 깊게 엮여있어서 조금 이야기를

제나름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서해심 시인은 방금 낭송한 시를 다시 음미하듯이 눈을 지긋이 감고

뜸을 들이더니 마이크를 고쳐잡았다.

"아까부터 다들 들으셔서 제 친구 이야기는 감출 것도 없네요.

하여간 제 학창의 둘도 없던 친구는 그렇게 죽어갔군요.

그런데 저는 방금 자세히 들은 제 친구 정희의 의식의 흐름을 유추하고

반추하면서 마침내 따뜻한 동정과 공감의 시선을 보내고자 합니다.

정희나 저나 참 가난하고 어렵고 외로운 청춘 시절을 보냈어요.

저는 그러나 일찍부터 남해 사나이 하나 붙들고 또 이 남해의 풍광이 주는

넓은 가슴에 묻혀서 생래의 외로움을 극복하며 살아왔지요.

제 필명이 감히 해심, 바다의 마음이잖아요.

 

저보다 욕심이 많은 정희는 그러나 서울 생활을 시작하며 그런 넓은 가슴,

아늑한 품을 찾지못한듯 합니다.

저기 항아리 손님 계시지만 두 분은 이 땅의 노동 문제에 온 몸을 던지고

민주 투쟁을 하면서 자신들의 거칠어진 서정은 묵과하고 놓쳤어요.

조실부모한 정희의 외로움은 민주투사를 자칭한 두분의 투쟁사 속에서

다른 거대 담론으로 환치되었지만 그게 어딘가에 잠복되어 있었지 치유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문자를 좀 쓴다고 욕하지는 마세요.

 

아무튼 제 친구 정희는 상처한 과장을 만나고 부터 그의 한없는 호의 속에

깊이 침잠되면서 일찌기 겪지 못한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군요.

그런데 그 뜨거운 사랑이 얼마인가 진행되었을 때 정희는 더 거대한 유혹에

부닥칩니다.

정희는 그걸 유혹이라고 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또하나의 손길로 보았을 것입니다.

무지개의 빛갈이 오색 영롱하듯이 정희는 못다받은 사랑의 빛갈로 현상을

받아들였군요.

그러니까 그 오너의 손길 속에서도 정희는 그 회사의 과장이나 저기 항아리

아저씨를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너의 엄명 때문에, 그 현실 때문에 그녀는 잠시 두분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아마 정희가 이혼을 해달라고 저기 저분에게 요구했을 때에도 결코 저분을

버린다는 생각은 안했을 것입니다.

그저 과장이 요구하여서 그렇게 따라갔을 것입니다.

정희는 그렇게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여자였어요.

정희는 결코 자살을 한게 아닙니다."

 

그녀는 어느새 마이크를 놓고 육성으로 슬픈 해설을 하고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말은 정녕 죽은 친구에 대한 변호이자 레귀엠 같은

것이었다.

"생명 보험에서 병사의 경우와 사고사의 경우가 다를 수도 있을텐데---."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이의를 다는 모습이었으나 감히 자신의 신분을

내색케는 못하고 소음처럼 피아니시모로 사라져갔다.

 

(계속)

 

2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