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전, 찜통 더위 속에서 손자를 보러 뉴저지로 향하였다.돌아와 보니 더위를 많이 타는 나를 이른 가을이 저쪽에서 슬쩍 유혹하며 웃고 서있다. 예전에는 이런 서늘한 미혹에도 안절부절못하였으나 이젠 정신 차려야겠다. "세월"이라는 비용이 너무 비싸게 느껴지기 때문이다.서론이 장황하였다. 항시 내 글쓰기의 분별없는 버릇이라니---.큰아들이 서너 해 전 허드슨 강변에 마련한 집을 가족들 중에서는 내가 맨 끝으로 방문하였다. 내가 일년에도 몇번 출장을 다녔지만 서부에서만 멤돌다 온 탓이었다.아들의 집은 10여년 전에 지은 타운 하우스라서 정원이나 테라스가 모두 넉넉하였다. 지금 새로 짓고 있는 콘도나 아파트는 유명한 트럼프 사에서 맡고 있는 것들도 대체로 옹색한 기능성 구조물일 따름이었다.가만히 있자, 집 이야기가 아니라 손자 보러간 일정이었지.녀석을 첫 대면하면서 순간 느낀 내 가슴 속의 뜨거운 느낌이야어떻게 여기에서 표현할 수가 있으랴---.뜨거움과 심장의 격한 동계 다음으로 온 생각은이 녀석이 누구를 가장 많이 닮았을까하는 기대와 궁금증이었다.벌써 풍부한 표정을 발휘하는 베이비의 얼굴 속에서,원근으로부터 온 가족들은 모두 자신과의 유대를 이어보고 아울러 넉넉한 덕담으로 우리 모두가 한 울타리임을 확인하였다.나는 활기찬 베이비를 안고 싱그런 기분으로 테라스 앞의 정원과 그 너머로 전개되는 허드슨 강, 또 그 강상에서 오고가는 돛단배와 거함, 그리고 수송 선단들을 보고 또 본다.뉴저지 쪽에서 건너다보는 맨하탄의 마천루들은 살바도르 달리의 기하학적 스카이 라인을 형성하고 있으나,나는 그 위에 샤갈의 전설도 얹어보고 예후디 메뉴힌의 음정도 사뭇 풀어놓아 본다. 그래, 맨하탄은 저 근면한 유태인의 거리가 아니던가.아들의 집은 한인들이 많이 사는 포트 리에서 살짝 벗어난 괜찮은 동네였다. 이 곳에도 학군 따라서 한인들이 주택 가격을 많이 올려놓았다. 참 대단한 민족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제는 우리말, 한글의 중요성, 필요성을 느껴서 두 살 때 까지는 주로 우리말을 입력시키고,유아원, 유치원도 완전히 우리말만 하는 데로 보낸다고 한다.영어는 프라이머리 스쿨 때부터.의사이며 미시간에 사는 내 아우는 아이들이 영어 못할까봐서 우리말을 배제하고 키우더니 지금은 조금 후회하고 있다. 그 집 아이들이 원체 좋아서 괜찮지 큰 후회하는 집들도 많다.베이비가 태어난 컬럼비아 대학 부속 루즈벨트 병원도 가 보았다. 맨하탄에 있는 큰 병원이었다. 출산 때는 아들 녀석이 산모인 자기 댁의 다리를 붙들었다고 한다. 애비와의 정을 그런 식으로 잇게하기 위한 병원의 규칙이라고 한다. 대단한 아이디어라기 보다 이 시대, 뉴욕거리의 삭막함과 궁색함이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까.우리가 애새끼들 낳을 때는 출근해서 일 보고 저녁에 병원으로 가서"욕 봤네" 툭 한마디 던졌어도 가족애는 된장 냄새처럼 집안에 서려있었거늘---.며느리의 언니네도 가까이에서 잘 살고 있다.그 부부가 모두 잘나서 모건 스탠리니 메릴린치니 하는 월가의 투자은행에 다니면서 벌써 디렉터의 위치도 확보하였는데,아이도 낳지않고 정신없이 뛰다가,9/11 사태 때에 쇼크를 받아서 딸 아이를 하나 낳았다. 필리핀 여자를 먹고 자는 메이드로 두고 있는데 저녁 7시 이후가 되면 한 집에 살아도 더 이상 서비스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미군 병사들이 일과 후에는 제 각각이던 모습이 생각났다.우리 며느리도 9월이 오면 다시 직장에 나간다고 한다.필리핀 메이드도 예약이 된 모양이다. 억척같은 백인 여자들은 산후 며칠만에 직장에 나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이 곳에서는 산후 조리도 실내 온도를 차갑게 하고 물도 아이스 워터를 마시게 한단다.베이비도 상당기간 목욕을 시키지 못하게 되어있단다. 완전히 우리와는 반대이다.그래도 며느리가 우리 식으로 옷도 껴입고 미역국도 꾸역꾸역 먹으며 밤새 모유를 수유하는걸 보니,시댁의 지혜를 따르는 건지 평화를 위한 지혜인지 하여간 기특할 따름이다.베이비의 첫 나들이는 포트 리에 있는 클리닉으로 가서 검진을 받고 예방주사를 맞는 일이었다. 인근에서 제일 좋은 곳이라는데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하여간 이런 절차를 소홀히 하면 보험회사로부터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떠나기 전에 오랜만에 어퍼 뉴욕으로 드라이브도 다니고 뉴욕 대학(NYU)의 영문학과도 방문하였다. 잘 알다시피 뉴욕대학은 따로 교정이 없고 맨하탄의 워싱턴 스퀘어 인근에 산재해 있는 빌딩들로 구성되어있다. 영문학과 건물은 청바지와 통기타의 반전 무리가 한때 장악하였던 워싱턴 광장에서 한 불록 정도 떨어져 있달까, 바로 이웃해 있어서 항상 인문정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전에 아들 내외는 맨하탄에서 월세를 살며 직장에 다녔는데 뉴저지로 오면서 너무 섭섭하여 55번 가에 작은 스튜디오를 하나 사서 세를 주고 있다. 모두 모기지로 샀으니까 신용과 빚으로 산 집이다. 금리가 가장 쌀 때라서 고정 금리로 장만한 것이다. 이제 이 만한 금리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금리가 오르면 집 값이 또 내리는 속성도 있다. 80년대에는 부동산 대 폭락 사태도 있었으나 거시 경제로 보면 집 값은 꾸준히 오르고 특히 맨하탄이 그렇다고 한다.돌아올 날이 왔다. 내가 가 있는 동안 내내 뉴욕은 밤에만 비가 오고 낮에는 구름 내지 쾌청이었다. 뉴욕의 더위가 서울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데 내가 갔더니 일월성신이 도움을 주셨나보다. 디카로 찍은 베이비 사진을 금방 집에서 인화하여 여러장 갖고 왔다. 물론 인터넷으로도 띄워두었으나 우리는 아니 나는 아직도 아날로그 체질인가보다. 사진이 있어야 실감이 난다.내 친구 하나는 매일 아침 화상 전화로 손자를 본다고 한다. 그래, 시대는 분명 좋아졌지만,그래도 그리움을 대체할 수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