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무박2일

원평재 2004. 10. 4. 07:05
내가 경상북도 풍기에 있는 어떤 초등학교 여선생님을 만나러 간 것은 작고한 직장 상사의 무언의 청을 들어주기 위함이었다.이 시대 어느 비즈니스가 그렇지 않으랴만 우리 광고 업계는 수주 경쟁과 아이디어의 싸움이 항상 포연 가득한 전장터를 방불케 하는 곳이었다.강 부장께서는 독일에서 커뮤니케이션과 광고학을 공부하고 현지의 광고회사에서 또 여러해를 근무하다가 우리 대일 기획으로 스카웃된 쟁쟁한 중견 간부였다.독일에서도 아시아 관련의 기념비적인 광고 카피를 만들고 동영상 부분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를 개척했으나 긴장은 그의 몸과 마음을 좀 먹어서 담배는 줄담배, 술은 말술, 아니 위스키 한병이 정량이었다.그러나 담배 때문에 기관지 수술도 하고 국내로 들어와서는 술도 절제를 하는 등, 예전 독일에서의 일화는 전설 비슷하게 우리 회사에서 가끔 회자될 따름이었다.풍기 읍내에 있는 작은 카페에 여선생님은 미리 와서 단정하게 앉아있었다."돌아가신 강부장님 부탁으로 간단한 유품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만---. 만나뵈니 어째 송구합니다.""마음 편히 가지세요."삼십대 중반의  청초한 모습을 띈 여선생님의 목소리는 차분하였고 어쩌면 여유랄까 아니 위엄같은 것이 서려있었다.학교 선생님이라 그런가---, 아니 선생님이라고 다 그런가."풍기 들어오면서 이거 풍기 문란이란 소리 듣는게 아닌가하고 좀 걱정 했지요, 하하하."침통한 표정으로 접근하려던 나는 여 선생님의 단단한 모습에얼른 생각을 고쳐먹고 업계에서 다진 뻔뻔한 모습으로 덤벼들었다.그녀는 결코 따라서 웃지는 않겠다는 곧은 매무새로내가 들고간 꾸러미를 꼿꼿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그제서야 나는 그녀의 눈초리 속에 푸른 빛이 돌고 차가운 귀끼같은게 서려있음을 얼핏 느낄 수 있었다."아차, 나의 방심! 광고 업계 3년에 아직도 풍월을 못 읊는구나."잠시 그녀의 편안한 목소리에 만만한 생각이 들었던 내 짧은 판단력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이제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는 별로 남지 않아서나는 작은 보따리를 숙제 제출하는 학생처럼그녀에게 내 밀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는 시늉을 하였다."멀리 오셨는데 저녁이나 들고 가세요."내 반성의 자세가 적중하였는지, 그녀가 마음을 돌려 먹었는지얼핏 그녀의 눈빛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얼굴에도 미소 같은게되살아나고 있었다."디지털 카메라이지요?"그녀가 보따리를 받으며 단정적으로 말했다."네, 사고 현장에서 수습한 겁니다만---.강부장님께서 마지막으로 선생님 계신 곳을 알려주시면서---.중환자실에서 이틀을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지요.백두대간 종주를 거의 끝내시는 일정이었다면서요?""네, 그날로 무박2일 전문 산악회에서 해오던 종주행사가 끝났는데 부장님만 나타나지 않으셨어요.산에서 돌아가시면 좋겠다고 하시던 분이 산행 만남의 장소로 오시다가 교통사고라니 억울한건가요, 아이러니인가요---."
x-text/html; charset=iso-8859-1" width=550 src=http://pds.kiri.co.kr/community/PDS/18~/1837~/18376/wonjanghyun.WMA volume="0" loop="-1"> 원장현 ++ 꽃상여 (구음과 시나위, 항아의 노래中)

 

내가 직속으로 모시고 있던 강부장께서는 매주 토요일이면 무박2일로 산행을 즐겼다.
어지간한 광고 관련의 일이 아니면 그 분이 이 스케줄을 깨트리는 법은 없었다.
이런 원칙 때문에 회사내에서도 때로 약간의 불평이 있었고 가내에서도 불만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건강 문제가 
등장하면서는 아무도 간섭할 일이 못되었다."
제천쪽에서 저녁 대접을 할께요. 거기라면 서울 가시기도 편하시겠고 또 여기에서는 정말 풍기문란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니까요."그녀가 조금 웃었으나 나는 따라 웃지못했다.
그녀의 차는 풍기에 두고 내 차로 우리는 제천을 향하였다.차에 시동을 걸자 넣어두었던 CD에서 이지(Izzy)가 부른 
"My Luv is a red red rose"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낮게 따라 불렀다.이지의 
목소리가 그러했듯이 여 선생님의 낮은 목소리도 맑으면서 유현(幽玄)하였다.도로 가에 퍼질러진 식당을 찾느라고 
새로 개통된 고속도로를 버리고 국도로 들어왔더니,그 사이 어두워진 땅거미에 여선생님과 이지의 이중창 된 
노래가 삼중으로 어울려서 정말로 적멸, 유현한 분위기 가운데 세속인간은 몸을 떨 일만 남아있었다.
"저 노래 속의 로버트 번즈의 시를 어떻게 아세요?"내가 
말해놓고나서 또 쓸데없는 소리하였다고 금방 후회하였다."교대 나와서 초등학교 교사 하면서 다시 
교육대학원에 입학하여영어교육을 전공했지요. 사실은 
영시 보다 영국 소설로 석사논문을 썼어요.""아, 저도 영문과를 나와서 광고업계에 뛰어들었어요."내가 반갑게 답하였다."그럼 조셉 콘래드를 좋아하세요?"그녀가 금방 채근하였다."네, 조금---.""그러시면 '어둠의 속'이라는 작품도 아시겠네요?"그녀가 구두 시험을 보듯 나에게 잇단 질문을 던지고 옆으로 빤히 쳐다보는데 눈길이 하도 강하여서 운전을 하면서도 내 얼굴 옆쪽에서 불꽃이 지펴지는 느낌이 왔다."아아, 그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네요. 주인공 커츠가 남긴 유품이 브륏셀의 약혼녀에게 전해지던 마지막 장면 말이지요."늦으면 불꽃이 더 타오를까봐 걱정하듯 나는 황급히 답변을 했다."마지막으로 나레이터가 전해주는 말은 거짓말이었지요? 죽어 가면서 커츠가 약혼녀에게 사랑한다라고 했다는 말, 말입니다."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며 나의 답을 또 채근하였다."네, 사실은 '끔찍해, 끔찍해'라고 공포에 질린 말만을 남겼는데 '사랑해, 사랑해'라는 말을 남겼다고 거짓말을 전했지요---.""강 부장님이 제게 남긴 말은 없었나요---.""없었습니다."나도 거짓말을 하였다.강부장님이야 말로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였다.나는 푸른 불빛이 눈가에 도는 이 30대 여선생님의 수족에 죽은 사람의 마지막 혼이 담긴 족쇄를 채울 수는 없다고 본능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과연 해가 지고 있는 국도 변에 널부러진 밥집이 눈에 들어왔다. 제천은 아직 한참 거리가 멀다는 로드 사인 아래에서였다.토종 닭은 한 시간을 기다려야한다기에 우리는 보리밥에 산채로 만족하기로 하고 우선 동동주로 목부터 축였다."강 부장님이 제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죠?"그녀의 눈빛이 다시 형형하게 밝혀지기 시작하였다."좋도록 생각하십시오. 삶의 의미는 산자의 몫이니까요. 제 표현이 건방지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제 생활이 항상 광고 카피라이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니까요.""그래요, 산자의 몫이죠."그녀도 이제 논리 보다는 화답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시골 밥상을 기다리는 사람은 달리 더 없어서 우리는 갑자기 무인도에 버려진 난파선의 마지막 생존자라도 된듯 어떤 결속을 가슴 깊이 느꼈다."디지털 카메라는 그 댁에 유품으로 드리고 제겐 칩만 갖다 주지 그랬어요? 그냥 우편으로 붙이셨어도 되었고---. 직접 오신건 그 칩 때문이죠?"그녀는 도통한 선녀처럼 전후사정을 꿰뚫고 나아갔다."천개의 컷을 담을 수 있는 칩의 700번 쯤에 제가 누드로 처리된 것이 있겠지요. 그걸 제게 전하려고 오셨지요. 그냥 지워버리시기만 해도 되었을 것을---.""아니 강부장님이 모두 꼭 전해드리라고 하셔서---.""예술 사진입네 어쩌구 변명은 안하겠어요. 그 컷은 지난번 말레이지아의 코타키나바루를 등반할 때 찍은 것이지오. 좀 우발적이기도 했고 좀 작정된 것이기도 했고요---.""---?""그날이 제 전 남편과 이혼을 한 날이었어요. 이혼 기념일---, 웃읍죠. 제가 공연히 마음이 언짢아가지고 강부장님께 떼를 좀 써서 무박2일의 공식을 깨고 해외원정을 했더랬어요. 코타키나바루에서는 낮에 단체로 잠을 푹자고 밤중에 오르기 시작하면 새벽에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는 것이지요. 너무 덥고 너무 힘이 들어서 극적인 장면 속에 함몰해 보자고---, 신화소를 하나 만들어 놓자고, 가벼운 제안 속에 서로 빠져들었지만, 사실은 오래 전부터 태동해온 무거운 주제를 그렇게 가벼운듯 진행시킨 꾀였다고나 할까---, 아침의 광망 속에서 이루어진 두 남녀의 어떤 진실의 외피 같은 것이었어요."나는 사실 그 외피인지, 아니 그 알맹이를 미리 보았었다.700만 화소의 결이 고운 디카 속에서 그녀는 웃으며 땀투성이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놓았고, 카메라의 연금술사인가, 셧터를 누른 장본인이자 지금은 고인이된 광고계의 장인(匠人)께서는 그녀가 내 놓은 모든 것을 빛나는 역광의 아침 햇살로 여미고 다듬어 포착해 놓았었다."어떤 분과 사시다 헤어졌나요? 답변을 요구하는건 아닙니다만---.""자칭 민중의 투사였어요, 그 이상은 노 코멘트입니다."나는 조셉 콘래드의 아버지가 폴랜드 독립의 열혈 투사였고 귀족 출신인 어머니가 이 청년에게 반하여 모든 것을 던져버린 시초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이들이 유형지 우크라이나에서 풍토병으로 함께 죽은 이야기를 광고쟁이의 입심으로 지껄였고,그녀는 이 순애보를 자기 이야기인듯 때로 공감하고 때로 몸을 떨었다.동동주가 겻들여서 고조된 저녁이었고 대화의 주제도 격렬한 범주였으나,오늘 우리가 만난 전후사정은 결국 비감한 것이어서 하늘에는 상현 달이 고즈넉했으나 우리의 마음에는 그믐밤 같은 어두움이 가득 드리워져있었다.그녀가 밥을 먹다말고 카메라를 뒤적거리더니 얼른 칩을 뽑아내었다."고마우신 선물입니다만---."그녀는 어둠 속으로 칩을 힘껏 내던졌다.어둠은 한번 출렁거리며 칩을 매몰시켰으나 나는 그녀의 빛나는 눈빛에서 어둠의 속을 뚫고 달리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광휘같은 것을 얼른 읽었다.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삶의 지표이리라.살아있는 두 사람이 신 무박2일의 시대를 열어갈 일은 아니었다.나는 갓 신혼이었고 여선생님도 풍기문란이 금기로 되어있는 풍기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가 아니신가.다만 이 날 밤만은 다시 무박2일이 될 수 밖에 없는 시골 밥집에서의 형편이요 처지였다---. 
 
원장현의 대금소리 [항아의 노래] 

'팩션 FAC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부학 교실  (0) 2004.10.26
BBB 운동 에피소우드  (0) 2004.10.23
전람회에서  (0) 2004.09.30
돈 텔 마마  (0) 2004.09.20
그린에서---  (0) 2004.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