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딕시랜드의 그녀 (3)

원평재 2007. 9. 7.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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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번 여행을 시작한 것도 사실은 재즈의 고향 뉴 올리언즈를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 시집간 딸이 녹스 빌에 있는 대학에서 소비자 심리학으로 교수를 하고 있는데,

이 달이 해산 달이거든요.

여기 제 집사람이 거기 딸네의 출산을 뒷바라지 하러 미국 남부로 오는 길에 저도

따라 왔지만, 저는 그보다 사실 재즈 때문에 온 셈입니다.

미국 사람들도 남부, 특히 미시시피 강 끝의 뉴 올리언즈까지 와보기는 힘들어

하잖아요. 재즈 매니어인 저는 꼭 그 풍토에 한번 몸을 적셔서 풍토병이라도 앓고

가야 제 속이 뚫릴것만 같거든요."

머리가 조금 벗어진 초로의 신사가 스스로 재즈 매니어를 자칭하는 것이 조금

웃으웠으나 그의 표정이나 목소리는 진지하였다.

 

"아이구, 여보! 풍토병이라구요? 여기 계신분들 제 말씀 좀 들어보세요.

저 양반 풍토병이라는건 이미 한국에 있을 때부터 골수에 사무쳤지요.

저 양반이 SP, LP 시절부터 사 모은 재즈 음반이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제가 아파트를 사고팔고 살림을 좀 늘릴 때마다 그 물건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이루 말로 다 못해요.

그놈의 재즈에 관한 참고 서적들도 얼마나 많은지 머릿 골치 아파요.

또 진공관식 앰플리파이어에 벼라별 스피커에---.

하여간 이 양반 '재즈 병'은 고질병이 되어서 이미 국내에서도 신토불이의 경지에

다달았고 치료에도 대책이 없었어요."

부인이 그간의 사연을 처음에는 서슬이 퍼렇게 늘어놓았으나 끝으로 올 수록

용두사미, 사실은 무얼 탓한다기 보다 그저 경과 보고 식으로 매듭을 지었다.

  

 

이런 절차와 과정은 사실 이전부터 한두번이 아닌듯, 참을성 있게 부인의 간섭을

귓전으로 흘린 그가 재즈 이야기를 재개하였다.

"뉴 올리언즈는 한이 서린 땅입니다. 먼저 이 땅으로는 프랑스인들이 들어와서

특유의 라틴 기질을 발휘하여 흑인들과 피를 섞고 감정의 교류까지 도모해

나가지요.

지난 세기에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가 데이트를 하고 시가지를 어슬렁거려도

린치를 당하지 않는 곳은 신대륙에서 이 곳 뿐이었을 것입니다.

프랑스 백인들은 이 곳 흑인들과의 사이에 그들의 제2세 종족을 만들어냈는데

그들은 모두 머리도 명석하였고 또 예술에 재능들이 있었지요.

그 2세들은 이 미시시피 하류의 델타 지역에서 주인 노릇을 당당히 하였어요.

하지만 곧 이들은 신생 미합중국에 편입이 되고 남북 전쟁 후에는 북부 양키

들에게 또 유린이 되지요.

앵글로 색슨 족들이 나중에 니그로를 대하는 태도는 프랑스 적, 라틴 적인

낭만성과는 사뭇달랐어요.

어쨌든 아까 말한 그 흑백 2세들은 카준 크레올 들이라고 호칭되는데 사실

보통의 종족들이 아니랍니다.

그러나 과거의 자부심과 영화는 이제 사라지고 그들은 이류 시민으로 낙오되어

뉴 올리언즈의 무더위와 재즈 속에서 흐느적 거리지요."

 

"듣고 보니 정말 그 말씀이 맞네요. 처음 여기 왔을 때에는 그 흑백 아이노꾸들,

무슨 카준 크레올이라는 사람들이 자존심도 세고 뻐긴다는 말을 듣고 웃긴다

싶었거든요.

저희 딸이 아틀란타의 병원에 간호사로 있어서 우린 여기에 일년의 반쯤은

눌러사는데 딸의 말이 크레올들이 흑인이지만 아주 똑똑하대요.

우리 딸은 한국에서 미국 간호사 자격인 RN을 따서 여기로 왔는데 아차하면

목이 짤린다고 여간 긴장하고 있지 않다니까요."

"아니, 윤사장님네는 돈도 많으시다면서 따님이 왜 이런 곳으로 간호사하러

왔어요?"

교수의 부인이 물었다.

 

"누가 아니랩니까. 그애와 사위가 미국 바람이 불어서 이리로 왔지요.

그래도 아틀란타는 집값이 퍽 싸고 또 한인들이 새로 몰려들어와서 사는

재미가 참 좋대요.

2-3년 사이에 한인 인구가 갑절이 되어 15-6만명이나 되었대요. 

집값이 정말 싸서 지금 아틀란타 지역의 스와니라는 괜찮은 동네에 30만불

주고 대궐같은 집을 사서 산다니까요.

걔가 영어를 아주 잘했어요. 또 좋아했구요. 그래도 막상 와서 보니까

영어가 제일 딸린데요.

의료나 간호 관계 실력은 병원 내에서 제일 자신이 있고 몸과 건강도 버틸만

한데, 영어가 딸린대요.

영어를 못하면 대접도 못받지만 잘못하면 책임을 다 뒤집어 쓰고 쫓겨나거나

벌금도 내야한대요. 깊이 알고 나면 겁이 나요."

 

"말프랙티스(malpractice) 법이란게 남부에 있지요. 환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눈을 감고 흘러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변 교수가 몸을 일으켜 새우며 무슨

말을 중얼거리더니 그냥 창밖을 내다 보았다.

"아, 그래요. 말--- 뭐라더라, 그런 법이 있다지요? 어떻게 잘 아세요?"

윤사장 부인이 조금 호들갑을 떨었으나 변 교수는 대답을 않고 계속 바깥만

내다 보았다.

어느 사이엔가 밴은 뉴 올리언즈 경계를 들어서고 있었다.

  

 

 

 

"어머나 저기 전차 좀 봐, 전차가 있는걸 보니 아직도 동네가 후지네."

윤사장 사모님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도 많이있어요."

사이버 재즈 카페 하는 분의 부인이 딱하다는듯이 말을 받았다.

"네, 이곳에서는 아직 전철이 다니는데 테네시 주의 음악 도시 내쉬빌에도

마찬가지로 있지요. 전기값이 싸서 그런가봐요."

가이드 청년의 말이었다.

"교수님, 저게 무슨 연극이던가, 영화에도 나오는 유명한 전차지요 아마."

이번에는 사이버 카페 주인장의 말이었다.

"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나오는 것과 비슷하겠지요. 이제 그런

이름은 이 곳에서 사라졌겠지만 우리 마음에는 아직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내내 덜커덩 거리며 다니고 있지 않을까요?"

변 교수가 오랜만에 좀 긴 말문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뜻이 깊으려니하고 일행은 경청하였다.

 

"테네시 윌리엄즈라는 작가는 한때 위풍당당하게 존재하였다가 사라진

남부의 화려했던 영화와 인간적 욕정, 욕망과 그 흘러간 영화를 포기

하거나 잊지 못하여 매달리는 실패한 인생을 희곡 작품으로 그려내어서

사람들의 페이소스를 자아냈지요.

남부 정서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좌절감을 육화시킨

것입니다.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는 다 망해버린 남부 귀족의 딸,

블랑슈 뒤브와가 자신의 여동생 집으로 흘러들어왔다가 이런 허세를 참지

못하는 날건달이자 제부 관계인 폴랙이란 인간에게 겁탈을 당하고 마침내

정신병원으로 들어간다는 슬픈 이야기 입니다.

그녀가 뉴 올리언즈로 처음 타고 들어온 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였고

천국이라는 이름의 역에 내리면서 연극은 시작하지요."

"대학의 선생님이라 역시 다르시군요. 선생님 설명은 역시 강력한 요점

정리세요."

여배우가 영탄쪼로 말을 하였다.

무대 위에서의 그녀의 대사가 대략 그런 톤일 것이었다.

"교수님이시니까요."

가이드가 말하였다.

 

여배우의 "선생님"이라는 표현이 변 교수의 폐부를 찔렀다.

"정아"는 항상 그를 "교수님" 대신에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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