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고다닌 투어

아, 타즈마할

원평재 2007. 10. 22. 04:22

인도를 돌아다니며 현지에서 구한 지도에서는 대표적 관광 지역들이 금방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라나시 찾기도 한참이었고 자이푸르도 힘들었다.

마침 이제야 좋은 우리말 지도가 있어서 먼저 올려본다.

본문의 맨 아래에는 타즈마할에 관한 구체적 설명도 해두었다.

 

 

이른 아침에 찾아간 '타즈 마할' 궁전은 이미 세상에 너무나 잘 알려진 곳으로

이제와서 나까지 여기에서 무어라 소개하고 감상문 쓰는게 좀 어줍잖다.

하지만 세상의 일들이 모두 공식적 궤도 속에서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다.

여행에서 맞닥들이는 돌발 상황들이 그래서 여행이라는 이름 자체를 풍요롭게

하지 않겠는가.

또 같은 사물이지만 보는 눈이 다르고 전달하는 왜곡 반경도 다를 것이다.

음악에서도 지휘자나 연주자에 따라서 교향곡 하나가 5분씩이나 시간차이가

나지 않던가.

또 음악을 가두었다가 펼쳐 보내는 매체, 그러니까 LP, CD, DVD의 특징에

따라서 왜율도 다르고 그래서 감동도 다르지 않던가.

그런 이야기를 여기 써내려가 보고싶다.

 

 

아침에 찾아간 타즈마할 궁전 입구는 아름답고 산뜻하였다.

아마도 궁전의 출입구와 성벽은 인도의 살림살이가 좀 나아진 최근에 새로

개축한듯 싶다.

하지만 그 앞을 거니는 생활 모습까지 바꿀 힘은 아직 없나보다.

타즈마할 입구의 현실은 이런 모습이다.

오른쪽으로는 "인도 레퍼 클리닉 및 연구소"라는 간판이 얼핏 보였다.

한센씨 병 말이다---. 

 

   

 

 이슬람 여성들도 함께 잘 지내는 모습이다.

원래 타즈마할 궁전을 지은 샤자한 왕은 이슬람 교도였다.

 

 

 

일행 중의 한명인 이 여대생은 어디를 가나 현지인들간에 인기가 있었다.

우리는 그저 한국 수준으로 보통 정도의 여대생으로 보았는데 인도인들의 눈빛은

달랐다.

코리언 프레미엄이 붙었을 것이다.

현지 방송국 리포터가 마이크를 갖다 대었다.

 

 

 

외곽 성문을 들어서면 큰 광장이 나온다. 일반 이슬람 교도들이나 힌두 교도들이

예배를 들이도록 마련한 광장이었다.

원래 두 종교는 공존하였으나 갈등이 생긴 것은 근세사의 일이다.

중세 십자군 전쟁 때에는 기독교도들과 무슬림간에 오랜 전란이 있었고

인도에서도 종교간의 마찰은 잦았으나 이내 화해하고 공존하는 지혜와

여유가 있었다.

특히 이런 성채를 만들 때에는 양쪽의 기술과 인력과 헌신이 모두 필요했을 것이다.

 

 

아, 타즈마할이 눈앞에 전개 되었다. 경이적이고도 감동적이었다.

 

 

 

방금 통과했던 내성곽의 문을 몸을 돌려서 촬영하였다. 예술품이다.

 

 

 

타지마할이 본전이라면 바라 본 방향으로 왼쪽의 부속 궁전이 보인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관광객의 손에 새긴 문신이 인상적이다.

이곳은 또 문신술도 발달하여서 쉽게 문신을 넣어주는데 며칠만 지속된다.  

 

 

 감동적인 타즈마할이 눈앞에 전개되자 구도고 여백이고 생각할 것 없이 이렇게

카메라에 쓸어담을 수 밖에 다른 재간이 없었다.

내 마음의 심미적 여유가 얕아서 다른 방책을 강구할 틈이 없었다.

그냥 정면으로 한판 승부를 걸고 '찍사'가 되었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을 눈에 넣을 만큼 내 마음의 여유가 서서히 찾아와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기에 올라올 때는 신을 벗거나 덫신을 신어야 되었다.

나는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보는 신밧드처럼 코가 뾰족나온 덫신을 신었다. 

  

 

 

본전의 네 귀퉁이에는 미나렛 첨탑이 하늘을 찌를듯 서있다.

 

 

 

 조각이나 문자로 힌두 양식, 이슬람 양식 등을 모두 포용하였다.

 

 

  

  

 

 

 

  

 

 

궁성의 뒤편으로는 자연적인 해자 역할로 '야무나' 강이 흐른다.

 

 

 

 

 

  

 

 

 

 

 

 

  

 

 타지마할의 영어 표기는 알다시피 Taj Mahal이다

타지마할, 혹은 타즈마할 두가지 발음이 다 가능하다.

지적 수준이 꽤 있는 우리의 청년 가이드에게 어느쪽이 더 원음에 가까운지

물어보니 몇번이나 발음을 들어보더니 타즈마할이 더 가깝다고 하였다.

 

타즈마할의 건립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져있다.

어떤 영어 교재에도 그 이야기가 나와있을 지경이다.

하지만 다소의 윤색은 있었던 모양이다.

왕은 왕비가 죽은 후에 그리움을 못견뎌서 이 구조물을 세우기 시작하였다고 하나,

원래 건축술에 일가견이 있던 왕은 즉위 때부터 이 궁전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통치술의 하나로 생각했으나 오산이었고 수많은 외국산 대리석과 보석을 현찰을

주고 사오는 바람에 국고는 바닥이 나고 왕위를 자식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이제 이 전설과 현실이 아름답고도 슬프게 얽힌 타즈마할을 떠날 때가 되었다.

모두들 약속장소로 가는데 문득 바라보아서 오른쪽 구조물에서 무언가 부르는

소리가 있는듯하였다.

백미터도 더 떨어진 거리이니 실제로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고 환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없이 달려가보니 그늘 속에서 어떤 빈자, 혹은 현자가 나를 부르는 몸짓이었다.

그에게로 다가가니 문득 손가락으로 타즈마할 본전을 가리키며 셔터 누르는 시늉을

한다.

그곳을 포토 플레이스로 삼고 그의 손가락 끝을 보니 기가 막힌 장면이 연출되지 않는가.

그 구조물이 아주 넓어서 그를 따라다니며 타즈마할의 속살을 마치 여인의 치마자락을

들추듯 하며 카메라 앵글을 들이대니 기막힌 장면들이 내게 닥아왔다.

다음 회에는 그 사진들 만을 모아서 올려 봅니다.

 

 

타즈마할은 무굴제국의 5대왕인 샤쟈한의 두번째 부인 뭄타즈마할의 무덤이다.

수백명의 후궁을 거느린 왕이었지만 뭄타즈마할은 얼굴 모습 보다도 지적, 감성적

모습으로 샤자한의 총애를 받았다.

그녀가 출산 도중 사망하자 샤자한 왕이 타즈마할을 지었다는 설도 있고 그 이전에 이미

건축술에 뛰어난 왕의 치적을 위하여 착공을 했다는 설도 있다.

 

타지 마할은 인도, 페르시아, 중앙 아시아 등지에서 온 건축가들의 공동 설계에 따라 1632년경에

착공되었다.

매일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1643년경에 영묘가 완공되었고,

1649년경에는 모스크·성벽·통로 등 부속건물이 완공되었다.

타지 마할 전체가 완공되기까지는 22년의 세월과 4,000만 루피의 비용이 들었다.
 

타즈마할의 장식에는 피에트라 두라 Pietra Dura 기법이 사용되었는데

르네상스때의 이탈리아 피렌체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이 기법은

대리석에 꽃등의 문양을 정교하게 판 뒤 그 홈에 각기 다른 수입된 색색의 보석같은 돌들을

박아  넣어서 순백의 대리석과 어울려 오묘한 빛을 발한다고 한다.

우리 가이드는 In Lay 기법이라고 하였다.

상감 기법과 통하는 모양이다.

색조의 아름다움은 야간, 특히 보름밤에 극치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22 년 동안 20 만 명의 인부와 코끼리 1000 마리의 노역끝에 지어졌지만

다시 이 지구상에 이런 건물을 못 짓게 하려고

샤자한 왕은 기술자들의  손목이나 손가락을 짤라버렸다는 설도 전하여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