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글에서 말한데로 "빈자"의 행색을 한 "현자"의 손가락 끝을 따라서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어 보니,
조금 전 어느 순간부터 마침내 내 시야에 익숙해졌던 타즈마할의 자태가 이제는 전혀
다른 미태를 띄고 새로운 공간을 연출하였다.
그의 손가락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나는 정신없이 셧터를 눌러댔다.
마치 몇백년 전, "샤자 한"이 꿈꾸었던 심미적 염원에 맹종코자 한다는 듯이---.
현자의 손끝은 이 정도에서 끝이 났다.
우리는 숨결을 맞추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영어도 힌두어도 당시에는 서로간에 소통이 될듯 싶지 않았다.
아니 말이 필요없었다.
누군가 또 다른 관광객이 이 호젓한 공간에 들어오는 기척이 있자 그는 새로
온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멀어져 갔다.
생각해보니 그는 현자같은 빈자에 다름 아니었을텐데 그의 손 바닥에 크게
보시하지 못한 점이 내내 안쓰럽다.
밖으로 나와서도 관성의 법칙이랄까 그가 끄는 힘, 동력, 모멘텀 같은 것이
있어서 카메라 앵글의 흐름이 달라졌다---.
그 와중에도 화장실을 찾아서 사진을 찍었다.
다른 관광지 보다 월등 시설과 아이디어가 좋았다.
"아름다운 사람은 떠난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충정로에 자리를 튼 아름다운 화장실 시민연대의 캐치 프레이즈가 생각났다.
그 시민연대는 내가 자문위원으로 있는 "세계 화장실 협회 창립 준비위원회(WTAA)"에
많이 조언해 주는 기관이다.
타즈마할 성문 밖으로 나오니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채의 바깥은 이내 인도의 현실이었다---.
타지마할에 비친 샤자한의 사랑 이야기 (또 다른 이야기) 전이었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까만 피부의 전형적인 드라비다 여인이었다. 첫 번째 왕비나 세 번째 왕비의 미모에 비하면 너무나도 볼품없는 여인. 굳이 좋은 점을 찾자면 맑은 목소리와 넘치는 애교, 그리고 꾸밈없이 밝은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지성은 어디서나 단연 돋보였다. 입궐 후에도 다른 왕비처럼 거드름을 피우거나 사치스럽지도 않았다.
깨닫게 되었다. 심지어 그녀는 황제가 전쟁터에 나갈 때도 두말 없이 따라 나섰다. 다른 왕비들처럼 남을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일도 없었다. 뭄타즈는 또한 샤자한에게 결혼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17년 동안 무려 14명의 자식을 낳아 주었다
이제 또다시 임신한 채 만삭의 배를 끌어안고 끝내 몸져누운 것이다. 창백한 달빛이 아그라 성의 테라스에 걸친 어느 날 밤, 결국 뭄타즈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곁에 앉아있는 샤자한을 올려다보며 마지막 미소를 지었다. 뭄타즈는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줄 것을 황제에게 부탁하였고, 그는 죽어 가는 왕비의 손을 잡으며 굳게 약속했다. 1631년 6월 7일의 일이다. 뭄타즈는 14번째의 아이를 낳다가 39세의 젊은 나이로 마침내 황제의 곁을 떠나게 되었고, 황제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여 장례를 치르는 기간동안 흰 상복을 입고 왕비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로서 아그라의 야무나 강 남쪽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역사적인 착공에 들어가게 된다. 그 이름은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왕관모습의 궁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오스만투르크제국 최고의 모스크 전문 건축가 우스타드 라호리가 초빙 되었고, 아지메르 지방에서 최고급의 흰 대리석들이 재단되어 속속 아그라로 도착되었다. 인도 전역에서 내노라하는 조각가들이 불려졌고, 이탈리아와 터키, 심지어 남미산 유색 대리석과 오닉스가 수입되었으며, 루비와 사파이어, 그리고 옥이 중국과 아라비아 등지에서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2만 명의 노예들이 건축가의 지시를 받아 무려 22년간의 대 공사 끝에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무굴 제국의 영광과 샤자한의 명예에 걸 맞는 아름다운 자태로 창조되었다. 잘라 상감 처리한 정교한 기술은 더 이상의 다른 건축물과의 비교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코란을 새겨 넣은 높은 대리석 기둥은 밑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시각적으로 맨 윗 부분과 아랫 부분이 정확히 같은 너비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판의 너비와 글자를 넓히고 크게 새겨 넣은 그 세심함은 감탄사만으로는 부족하다. 본관의 주위에 높이 솟아있는 네 개의 미나레트(첨탑)는 타지마할의 완성미를 더해줄 뿐 아니라, 본관을 중심으로 5도씩 바깥으로 벌어지게 함으로써 전면에서 똑바로 보았을 때 탑이 원근법에 의해 안쪽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보일 수 있게 하였으며, 만에 하나, 지진이 발생하였을 경우 안쪽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한 믿어지지 않는 설계와 시공기술에는 찬탄을 금치 못할 따름이다.
타지마할의 건설로 국고가 결국에는 바닥을 드러내게 됨으로서 그의 업적이 빛을 잃게 되었다. 말년에는 중병에 들어 국사를 돌보기가 힘들어 지게 되었고, 왕비 뭄타즈마할에 대한 그리움으로 야무나 강 북쪽 타지마할의 반대쪽에, 이번에는 검정대리석으로 타지마할과 같은 거대한 자신의 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제의 임종과 국고의 탕진을 염려한 네 아들이 서로 황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 되었고, 그 중 군인기질이 가장 풍부한 야심가 아우랑제브가 장남과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재빨리 아그라를 차지함으로서 실질적 권력을 쥐게 된다. 그는 아버지 샤자한을 아그라 성채의 작은 방에 감금하고는 아버지가 진행시키던 샤자한의 묘의 건축을 중지시켰다. 너머의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쓸쓸히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사후 그의 묘는 타지마할 지하의 뭄타즈마할의 관 옆에 안치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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