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뉴저지 필라델피아 기행

미국에서의 송어 낚시 (필라델피아 통신 1)

원평재 2008. 1. 16. 14:45

필라델피아 근교에 한 친구가 살고 있습니다.

은퇴 이민을 한 왕년의 CEO인데 지금 부인은 서울의 손주를 봐주러 잠시

귀국하였습니다.

제가 미국에 교환 교수로 와있던 몇년전, 갑작스레 큰 수술을 받고 허약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에, 부군과 상의하여 저를 이곳 필라델피아의

전원으로 불러주셔서 건강을 회복케 해주신 그 부인 말입니다.

부인께서는 미국 기관의 병원에서 수간호원을 지내신 분입니다.

제 친구의 말에 의하면 부인은 손주 교주에게 반하여서 집을 나가신 분이랍니다.

 

CEO

 

이 곳에 온 이래로 저는 매일 새벽에 나가서 언덕 위의 제 친구 집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오늘은 그냥 해가 떠오른 장면도 올립니다.

해가 불끈 솟는 장면도 천천히 올리겠습니다.

숲이 울창하여 겨울인데도 광망이 오메가의 모습으로 떠오르는 굉장한 장면은 힘들 것

같습니다.

 

제 친구도 몇년전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곳 전원에서 1에이커가 넘는 전원을

손질하며 지내다 보니 해마다 젊어지고 새로 몸을 가꾼듯, 이번에 보아도 그저 

동안(童顔)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친구가 가꾼 잔듸가 겨울에도 푸르릅니다.

친구가 직접 터를 다듬고 바탕 흙을 소토(燒土)하여 새 품종으로 이렇게 가꾸어

놓았습니다. 

 

 

  자, 이 장면은 무엇일까요?

퀴즈라도 내어서 답을 구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렇습니다.

엊그제, 친구가 나를 아침부터 "한 경치"하는 곳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서둘다가

자동차 키를 집안에 두고 문을 잠궜습니다.

맙소사!

 

이제는 차고로 들어가서 집안으로 통하는 도어록을 따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수동 쇠톱으로 도어록의 목을 흥부가 박씨 타는 심정과 모습으로 스르릉 스르릉

한정없이 켜고 있어 보니 시간은 가고, 대책이 없는것입니다.

마침내 친구가 공구함에서 전기 그라인더를 찾아내어 저렇게 불꽃을 튀기며

박씨 타는 작업에 피치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 불꽃은 우리 오랜 우정이 이 나이에도 또다시 불타오르는 상징이 아닌가,

혼자 싱거운 생각을, 그러나 진지하게 해보았습니다.

그렇게 집요하게 목을 매달며 버티던 도어록은 이 불꽃 튀는 그라인더 작업에

드디어 맥을 못추고 툭 부러져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근 "리들리 스테이트 파크"로 달려갔습니다.

늦게 배운 내 사진 촬영을 도와주려는 제 친구의 푸근한 우의 덕분입니다.

400만평이나 되는 드넓은 리들리 스테이트 파크 중에서도 평소 눈여겨 보아

두었던 이스트 게이트 쪽으로 친구는 급히 차를 몰았고,

현장에 당도해 보니 내 친구의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음을 십분, 아니 십이분

증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맑은 시내가 흐르는 위로 다리가 놓여있고, 물 방아간이 있었던 표지와

흔적이 남아있고 또 허물어진 집터---, 중세의 성벽은 없었으나 나는

거기 말을 달리고 있는 중세의 흑기사까지 보는 느낌이었답니다.

 

 

 

사적지로 남은 물레방아간입니다. Sycamore Watermill입니다. 

 

 

 

 

송어 낚시꾼들이 다리 아래에 섰습니다. 방금 입질이 시작되고 드디어 한마리가 물었습니다.

 

  

  

 이 손맛은 아는 사람만 알고 느끼는 사람만 느낍니다---.

 

잡은 송어를 조심스레 처리합니다---.

 

 

 과연 뒷처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가 살던 물길로 다시 보내주고 낚시꾼은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이윽고 송어 낚시는 계속 됩니다.

문득 이 장면에서 브라우티건이 쓴 소설 "미국에서의 송어낚시"와 스태프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 생각납니다.

오늘은 소설 쪽만 잠시 정리해 봅니다.

 

리처드 브라우티건(Richard Brautigan) 이 "미국에서의 송어 낚시"를 쓴것은 1967년
이었고, 이미 산업화의 수렁 속에 깊이 빠진 미국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나라에 이 소설이 들어온 것은 대략 90년대 초이며 그제서야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주요 단락 하나와 키 워드만 소개하고 나머지는 읽는 분들의 상상력으로
안내할 따름입니다.

 

 한때는 순수했던 ‘미국의 송어낚시’는 이제 “다리가 없고 소리만 지르는 중년의 술주정뱅이”이자 “타락한 신화”인

 ‘미국의 송어낚시 쇼티’가 되어 등장한다.

녹색의 공간을 빼앗기고 목가적 꿈을 상실한 현대인들은 기계화된 로봇이 되거나. 아니면 무력하고 타락한 중년의

술주정뱅이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한편으로는 끝없이 탐색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좌절과 공포로

바라보고 있는 곳도 사실은 바로 그와 같은 지역-곧 사라진 녹색의 서부-이다.

 

 

 

 

 

 

 

 리들리 스테이트 파크에 있는 17 곳의 캠핑장을 승용차로 다 둘러보고 우리는 그 옆에

있는 타일러즈 수목원에도 잠시 들어가 보았습니다.

면적은 40만평인데 그저 400평이나 둘러 보았을까요.

어쨌든 오늘 훑어 본 면적은 그러니까 대략 440만평이었습니다.

  

 

 목이 말라서 유명한 아이스 크림점 앞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다가 마침내 차례가

왔습니다. 

 

키 워드


‘생태주의소설의 원조.

송어를 찾아 떠난 여행의 끝에 화자가 발견하는 것은 송어가 뛰놀던 건강한 하천이 있던 자리가 주택의 계단,

또는 폐선장으로 변해 있다는 사실이다.

어렵게 하천을 찾아 송어를 낚아 올리고 보면 오염으로 허리가 굽은 꼽추송어다.

화자는 그 기형 물고기로 저녁을 해 먹고 녹색의 끈적거리는 것들과 죽은 물고기가 둥둥 뜬 온천수에서

질외 사정을 한다.

인간의 욕심으로 자연이 파괴되고 생식이 끊긴 기괴한 현실을 풍자한다.


포스트모던 경향


원저의 표지 사진은 샌프란시스코의 한 공원. 벤 저민 프랭클린 동상 앞에 작가가 서있고 그 옆에

식민지풍의 의상을 입은 여자가 앉아 있다.

프랭클린은 ‘아메리카 드림’의 상징. 근면, 성실, 정직, 절제 등의 덕목을 갖추면 성공한다지만 현실은 딴판.

오후 5시가 되면 동상 주변에 빈자들이 교회에서 나눠주는, 달랑 시금치 잎 하나 든 샌드위치를 받아먹는

것이다.

 

   왜 당시 미국인들은 이 소설에 그토록 열광했던 것일까?
그것은 이 소설에 담겨 있는 강렬한 반체제 정신, 물질주의와 기계주의에 오염된 현대인의 상실의식과 허무감
때문이었다.
또 이전에 발표된 소설과는 전혀 다른 상상력과 싱싱하고 투명한 문체, 새로운 형식 등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나면, 아니 시간을 내서 필라델피아 통신, 제2-3신을 계속 보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