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졸업 시즌이다.
내 친한 친구 하나가 대학에 있는데 나이가 있으니까 무슨 보직을
이것 저것 맡고 있어서 골치가 아프면 가끔 내가 운영하는
"강남 백수 기원"을 기웃거린다.
"강남 백수 기원"은 바둑판이 300개나 되는 대형 문화시설
(허가 업종명이 그러하다)인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며칠 전 오후에도 이 친구가 퇴근 길에 찾아왔다.
과하지는 않으나 낮술이 약간 있는듯 하였다.
"웬 낮 술인가?"
"응, 와인 한잔 했지, 멋있지?"
"폼 잡네. 어디서?"
"졸업식장에서. 자 여기 수필 하나 썼으니 여기 주간지 '바둑과 수필'에
올려라."
그가 부시럭 대더니 A4 용지를 던져주었다.
'바둑과 수필'이란 원래 우리 기원에서 유단자들과의 대국을 주선하고
그 복기를 해설과 함께 싣고서 '바둑 기보'라는 이름으로 찍어낸
부정기 팜플렛이었다.
전문가의 복기 해설에 내가 인생 개똥 철학으로 가필을 했더니
이제는 전문 기사들도 슬슬 우스게 철학을 풀어넣었고
이게 300개 바둑판에 붙은 1000명의 고객들에게 어느덧 인기를 얻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제 내가 본격적으로 고객들의 글을 받아서 주간지 비슷하게
발간을 하면서 제호를 '바둑과 수필' 로 바꾸었다.
'바둑 기보'를 처음 '바둑과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바꾸었을 때
대학 국문과 교수인 이 친구가 제호를 두고 몹씨 비아냥거렸다.
"임마, '바둑과 수필'이라고 하면 대칭이 되지 않아요.
'비가 오나 꽃이 피나", "바람이 부나 달이 뜨나' 혹은
'하늘과 고무신'이라고 하는 것처럼 등가성이 없고 비대칭이야.
이게 웃기지 않나 그런 말씀이야. 환유 처리를 한 것도 아니고."
그의 고상한 비웃음을 비웃듯이 '바둑과 수필'은 바둑계의 화제가
되어서 쟁쟁한 기사들과 명사들이 투고를 하였고 마침내 내 친구도
정기적으로 글을 던지고 갔다.
투고료는 자장면 한 그릇과 우리 기원 소속 프로 기사와의 무료
대국과 복기 서비스였다.
다음 글도 그렇게 나온 것이었다.
사족을 붙이자면 내가 제일 기분 좋은 때는 내 친구의 면전에서
바둑을 두러온 사람들이 바둑판 쪽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먼저
"이번주 수필 나왔어요?"라고 팜플렛을 찾을 때이다.
내 친구의 낮은 코가 더욱 납작해 지는 순간이다.
얼마전에 어떤 경영대학원에서 학위 수여식을 하면서
한 스피치를 부탁받고 시간에 꼭 맞추어 현장에 도착했더니
식전 행사인지 현장에서는 멀써 와인 파티를 열고
있었다.
"아이구, 미국 식이네---. 양반 식은 못되지만 하여간 국제화가
되었어. 그렇다면 빵과 샌드위치도 어디 있을텐데---"
두리번 살피니 과연 갓구운 빵이 코너 쪽에 있었다.
어디에서인가는 첼로 독주 소리가 은은히 식장을 넘실거려서
둘러보았더니 과연 화려한 의상의 첼리스트가 음악을 풀어놓고
있었고,
참석자들도 이에 맞춘다는 식으로 넥타이를 조금씩 느슨하게
풀어 놓는 분위기였다.
칠레산 와인은 21세기에 bottled된 것이지만
식탁 와인으로는 손색이 없었다.
나도 넥타이를 조금 풀면서 준비해간 스피치 원고를 엄지와
검지로 포켓에서 슬며시 구겨버리고
와인의 힘과 첼로의 영감으로 그냥 단상에 올랐다.
몇가지 통상적인 축하 메시지를 짧게 전하고나서,
니는 오늘 행사 방식의 국제적 표준화를 높이 띄웠다.
한마디로 우리도 이제 국제 규격의 졸업식을 이 땅에서
체감하며 살게 되었으니
생산, 회계, 인사, 노무, 등등의 모든 경영 관리도
빠른 시간에 국제화를 이루어야하겠다.
국제화는 이 시대의 표준화이다---,
대충 그런 요지였던 것 같다.
축사의 끝 부분에 나는 "첼로의 경영학"을 덧붙였다.
원래 첼로는 콘트라베이스 등과 같은 반열이었으나
낭만주의 시대를 지나며 "바그너"에 이르러서 독자적
위상을 정립하고 마침내 화음 악기의 자리를 뛰쳐나와서
독립선언을 한다---.
저기 아름다운 첼리스트가 독주를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
부터이다---.
시집간 딸이 첼로를 아마추어로 좀 했었는데
바이얼린은 경쟁이 너무 심하였고 비올라는
화음 악기이니까 독주가 안되기에 포기하고,
(악보도 높은 음 자리표가 아닌 낮은음 자리표),
하여간 그래서 첼로를 했는데,
보다시피 아름다운 첼리스트가 독주만으로
이 거창한 졸업 의식을 너끈히 끌고 나가지 않는가---,
여러분들의 앞에 놓인 시대는 45세가 정년이고 그 후에는
소위 이모작으로 자립하여 독주를 해야하는데
방금 말한 식으로 첼로의 경영학, 독주의 경영학을
도입해야하지 않을까---.
뭐, 이런식이었나보다.
이날 식후 행사로는 와인 고르기와 마시기의 에치켓 등,
와인 세미나도 있었다니 세상 많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