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제9회 국제 영화제(JIFF; 5월 1일-9일)에 다녀왔다.
1박2일 여정이었다.
학생들과 함께하였다.
해가 갈수록 초청 영화의 장르가 확장되고, 참여 국가와 지역의
범위도 늘었다. 금년 특별전은 베트남과 중앙아시아---.
인더스트리 스크리닝과 인디 필름도 다채롭다.
이 곳을 자주 다닌 내 발길이 정감을 더해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국내 여러 도시에서 비슷한 영화제가 많이 열리는 만큼 더욱 충실한
내용으로 끝없이 업그레이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햇살이 따가운 늦 봄, 초 여름의 날씨에 양산이 거리를 메운다. 여기가
'전주'임이 확연하다.
영화제의 분위기를 띄우는 퍼포먼스가 많이 기획되어 있었다.
전통 혼례 의식이 '시네마 스트리트'를 누비고자 지금 출발 준비중이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는 이 사람이 누구인줄 몰랐다.
실험 영화, Over Here의 감독, 제작자인 존 조스트였다.
부인과 함께 거리의 퍼포먼스를 구경하는 모습이다.
혼례 행렬을 보내놓고 메가박스에서 우선 영화 한편을 보았다.
"Stranger than Cinema"의 범주에 속하는 "OVER HERE (이곳으로)"를 보았다.
- 감독, 제작의 존 조스트는 미국 시카고에서 1943년 5월 16일에 태어났다. 베트남 전쟁 때 징집을 거부하여
- 투옥된 경력이 영화 제작에 많이 투영된다.
- 출생지 Chicago, Illinois, USA
원제 Over Here에서 Over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오레곤 주의 포틀랜드이고, Here는 미국의 국가적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이라크를 의미한다.
베트남 징집을 거부해 감옥에 가기도 했던 조스트 감독은 전쟁에 대한 진지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준다.
한화로 약 50만원, 불과 500달러의 믿을 수 없는 제작비로 촬영된 이 영화에는 두 명의 주인공 제이슨과 크리스를 제외하고는
비전문배우들이 출연했으며, 이들은 모두 포틀랜드 주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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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왼쪽 위에 나타난 현무암에 새긴 것 같은 얼굴이
약 10분에 걸쳐서 소음과 함께 플레이크 상태로 계속 나온다.
지루한 정도가 아니라 신경을 박박 긁으며 소름이 끼친다.
주인공, Jason은 이라크 참전 후 귀국한 병사로, 홈리스 상태에서
구걸을 하다가 어떤 카피 라이터의 동정심을 얻어 그의
집에서 기식을 하는데 어느날 그 남자의 목을 조르고 만다.
그 남자는 이라크 계 미국인이었다.
이라크 전투에 참전하고 돌아 온 Jason은 심한 사회적 부적응증을
겪으며 다만 그렇게 생존할 따름이었다.
범행 후, 마지막 얼마간은 부모의 품으로 괴로운 회귀도 하여보지만
늙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해결은 없고 고뇌만 더욱 클 따름이다---.
영화는 사뭇 오픈 엔딩이다.
주인공이 살인을 실제로 저질렀는지도 관객의 시선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고 부적응증 환자인 주인공의 앞 날에 대해서도 수많은
"경우의 수"를 확대 재생산 해 볼 수 있다.
영화가 끝나고 질의와 토론 시간이 있었다.
영화 제작에는 도합 500달러가 들어서 그 전에 만든 영화, Coming Home이
200달러였던 점에 비추어 거액(!)이 투자 되었다고 한다.
제작 기일은 17일간이었다.
뚜렷한 직업이 없이 실험영화의 제작으로 평생을 살아 온 그는 부인과
그녀가 데리고 온 아들,
그렇게 세식구 한가족이 년간 2000달러도 안되는 생활비로 지낸적도
많았다고 한다.
일년에 따뜻한 계절이라고는 4개월 밖에 되지않는 추운 몬태너에서였다.
난방이란 아예 사치였다.
뒷열에 앉은 부인을 보니 미녀였다. 특히 마음이~~~.
그 전 언젠가는 백만장자---, 아니 빌리어네어 정도 되는 부인과 3년을
살면서 엄청나게 호강을 한 적도 있다고 조스트 감독은 웃으며
술회하였다.
제작비를 어떻게 그렇게 싸게 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디지틀
시대라서 가능했던 예를 구체화하여 적시하면서,
많은 영화 지망생들에게 자신의 경험이 도움과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영화는 원래 PAL 방식으로 만들었는데 NTSC 방식으로 바꾸는
바람에 주사선에 스캔 라인이 심하게 나오고 있다고---,
(실험 영화의 효과를 더할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은 내 생각이었다).
일년 전부터 그는 연세대에서 외국인 교수로 정기적 '급여'라는 것을
받아보는 영광을 얻었으나 이제 금방 정년에 도달하여서 지금
앞으로의 조건을 협상 중이라고 한다.
자신의 삶에 걱정이나 두려움은 없다고 단정하였다.
주인공 Jason이 홈리스로 나오는데 표정이 밝다고 하니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 아마 그렇게 전이 되었나 보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영화 제작에 앞서 출연진에게 큰 테두리만 제시할
따름이고 대본이나 리허설 과정도 갖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결말은 물론이고 중간 중간에도 다양한 방향으로
진화와 발전이 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병든 나라라고 그는 진단하였다.
그런데 아무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모두 모래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꿩 같은 조류를 빗댄 건가? 내 생각이었다. 새 대가리---.)
독일 인들이 제2차 대전과 유태인 학살을 하고나서,
"그건 참 잘못된 것이었어~~, 하지만 내가 한건 아니야."라는
말을 하는데 지금 미국이 그런 형국이 아닌가---,
그의 염려였다.
긴 토론을 마치고 나오니 거리에는 큰 퍼포먼스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주제가 무언지 잘 몰랐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장면을 전체적으로 눈 속에 집어넣어보니까,
금방 그 흐름을 알 수 있었다.
그 흐름은 물길이었고, 대 운하에 관한 것이었다.
무녀 배우, 가수 '한영애' 씨가 길거리에 나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일은 크게 벌어졌다.
신끼가 온 몸에 내린 이 무수리께서는 지난 시절 서울의 민주화 투쟁
대열에서도 항상 혼을 불살랐고 작년에는 여기 '전주 막걸리 축제'에서도
큰 힘을 보탰다.
'전주'라는 도시가 보통 때는 힘을 다 빼고 느긋하게 있어도,
최명희의 '혼불'에서 보듯 작심하면 누구라 감당 못할 뒷심을 장작더미
삼아 자신을 불태워버린다---.
이번에도 '최명희 기념관'에 들릴 여정이자 예정이다.
작년 그림이다---.
이제 우리 시대의 마지막 샤먼, '한영애'가 초혼을 하고 있다---.
무수리 한영애가 드디어 산하를 찢고 대운하의 물길을 낸다.
흰 광목을 찢는 것이야 어떠랴만은 산하를 찢는 아픔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도 물길 밑으로 카메라 앵글을 들이대어 보았다.
대 운하 반대---.
야단스레 큰 플래카드 하나 없이 문자로는 이게 거의 전부이다.
퍼포먼스도 마임으로 전개되었다.
마음은 모두 보는 이의 개인 나름이다---.
나도 원래는 대운하 반대였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물부족 국가에다가 한강 수계와 낙동강 수계의
남북간 치수 시스템이 지형상 확보되지 않은점,
미국과 일본에 비해 고 비용의 물동량---, 이런 조건 등등으로
하여간 무엇이 되었건 대책은 필요하지 않은가,
대운하가 아니라면 국토의 곳곳에 "물주머니(water bag)"에 해당하는
크고 작은 소류지와 댐을 만들고, 이어서 고속도로를 두어개 정도
빨리 놓아야한다는 근심을 풍월처럼 듣고는 이제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대운하 건, 물주머니 건, 공론화의 과정을 거쳐서 국민적 동의를
차분하게 얻어야 하고 그게 되지 않으면 못하는 수 밖에 없다.
어물쩡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무수리는 이제 신내림 속에서 나라 지킴이의
지모신이 되고자 아프고 가뿐 숨을 몰아쉰다.
가쁜 숨결의 바깥 쪽에도 전주 국제 영화제는 진행이 되고 있었다.
봄날도 가고 있었다---.
한영애의 목소리로 들어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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