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마침 알프스 요들 송이 미술관 옆의 지붕이 천막으로 된 큰 건물에서 흘러나왔다.
옥토버와 알펜 호프를 판다는 깃발이 때마춘 바람에 일렁이기도 했다.
아침 가랑비 다음에 하늘은 회색빛이었는데, 바람이 다시 비를 불러오는 전조인지는
예측 불허의 날씨였다.
"선생님, 여기까지 와서 아까운 시간을 밀레에게 헌정하지 마시고 저기서 생맥주로 목이나
축이면 어떨까요?"
눈동자가 다시 회색으로 풀어진 남자의 말은 간청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아, 저도 그런 생각이 간절합니다. 이 후텁한 날씨에 목이나 추겨야지요. 다만 다정스러운
두분께 방해나 되지 않을는지요?"
"아뇨. 진심입니다. 밀레의 감자 푸대를 적시해 내시는 예술애호가, 딜레탄트라고 하나요.
그런 분이시라면 함께 하는 저희가 영광이지요---."
남자의 가녀린 목소리가 다소 떨리면서 진정성을 담고 있었다.
"저희가 또 버스의 앞 좌석도 뺐었는걸요---."
부창부수였다.
여인의 목소리가 예뻤으나 지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어디 알지 못하는데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유현함이 있어서 이런 데만 아니라면 소름이 끼칠 수도 있으려니 싶었다.
피처에 담아온 진한 노랑색, 옥토버 생맥주가 차가워서 그런 생각이 그에게 문득
들었는지도 몰랐다.
"관광지에서 부부와 연인 사이를 구분하는 법이 있다더만요. 둘이 너무 다정하면
그건 부부가 아니라 연인 관계이고, 덮어놓고 싸우면 부부라던가요, 허허허."
그가 분위기를 잡는다고 농담을 던졌는데 끝이 실없어져서 혼자 조금 크게 웃었다.
"네, 저희는 부부가 아니라 연인이랍니다. 바로 보셨네요. 호호호."
여자가 또 동공을 풀어서 애매한 눈동자를 하고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여자의 말에 그가 더욱 난감해져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데 남자가 얼른
그를 구해주었다.
"저희 둘이 가깝다는 표현을 이 사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저희를 부부로 보시면
됩니다."
"아, 그렇군요. 그렇게 보입니다. 저도 두분과 좀 더 가깝게 지내자고 한 농담이 그만---."
"네, 그렇지만 정식 부부는 아니구요."
남자가 또 병주고 약주는 식의, 아니 그 반대 어법이랄까, 하여간 애매한 말로 그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이라도 하였다는듯이 말을 복잡하게 하였다.
뜻이 서로 이제 막 통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골탕을 먹이려고 할리는 만무하였고 두사람의
관계가 그만큼 복잡 미묘한 듯 하였다.
"자, 우리의 친교를 위하여 건배!"
나이가 한참 위인 그가 건배사를 외쳤고 그들은 차가운 맥주잔을 힘껏 부딛쳤다.
"저희는 압구정동에 있는 어떤 유치원을 다니면서부터 동기 동창이었답니다. 중고등
학교도 공학으로 같이 다녔구요."
남자가 엉거주춤한 말씨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래요? 나는 신사동 신사라오. 강북의 신사동 말이오."
그가 조금 얼굴을 굳히면서 퉁명스레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무슨 부자놀음을
하는가 싶어서 공연히 억하심정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이 생면부지의 짧은 여행 판에 압구정동이 뭐야, 나는 아들이 서울대학 들어간 것도 시방
자랑하지 않는데---, 무슨 그런 심정도 그에게 불쑥 생겼다.
"아이구, 아닙니다. 선생님! 뭐 그런게 아니구요. 저는 지금 경기도 어느 지방에서 셋방살이
랍니다. 그러니 오해는 마시구요. 이 사람만 지금 그냥 압구정동에 살지요.
저희 두사람의 인연이 그렇다는 겁니다. 생년월일도 똑 같아요.
뭐 그런 인연으로 유치원부터 중고등학교를 똑 같이 나왔는데 저희 아버님이 사업을 실패
하셔서 저는 대학 들어가면서부터 압구정동하고는 인연을 끊었지요."
그러고 보니 나이치고는 퍽 여리고 순진하게 보이는 그 남자는 대화의 추이가 꼬이면서
하지 않아도 좋을 말을 술술 털어놓고 있었다.
여자도 별로 남자의 말을 제지하는 자세는 아니고 그저 안타까운듯이 풀어진 눈동자의
산만한 시선을 두 남자에게 번갈아 보낼 따름이었다.
"여봇! 대낮부터 무슨 술타령이세욧!"
어느틈에 찾아왔는지 그의 아내가 맥주 테이블 옆에 불쑥 나타나서 그를 힐난하였다.
"아니, 당신은 쇼핑 몰로 갔잖아?"
"카드를 당신이 갖고 있잖아요. 사람이 너무 쪼짠---,"
그러다가 그녀는 차마 말을 더 잇지는 않았다. 금슬좋은 두사람을 의식한듯 싶었다.
"여보, 내가 뺐은 것도 아니고 당신이 나에게 보관시킨거요."
그가 항변하였다.
"그런거 쪼짠하게 잘 맡으니까 내가 맡겼지요. 가슴이 넓으면 내가 갖고 다니지
맡겼겠어요? 호호호."
말을 하다보니 너무했다 싶은지 그녀도 오랜만에 웃음소리를 내었다.
"카드 여기 있으니 이 술값은 내가 긁겠소이다. 우리 숙소가 이 하우스텐보스 안에있는
덴하그인지 뭔지 하는 호텔로 되어있던데 저녁먹고 나서 지금 못다 한 대화는 그때
합시다."
"네, 저희도 가이드에게 부탁해 놓았으니 같은 숙소에 머물겁니다---."
남자가 약간 당황하며 말을 받았고 두 가족은 일단 헤어졌다.
"여보, 저 사람들 우리 일행이 아닌 모양이지요?"
아내가 그에게 금방 물었다.
소리가 아무래도 들릴 정도의 거리였다.
"그래, 뭐. 중간에 들어온 모양이야.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런데 자리를 빼았고---. 가이드한테 따져야지."
"모른체 합시다. 그게 다 살아가며 쌓는 공덕이라오."
"아이구, 생불이라던가 하여간 부처님 나셨네요. 술값만 뒤집어쓰고---."
"쉿!"
그와 아내가 쫌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서 있는데, 앉아있던 여자가 어느틈에
카운텨로 달려가서 카드 결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두사람에게 미소만 지었는데 눈동자가 모아졌고 힘이 들어있었다.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니 그녀의 얼굴은 또다른 표정이었고 원래 아름다운 얼굴이
무어라 말할 수 없게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아이, 기분나뻐."
그의 아내가 끝내 한마디를 던지는 것으로 그 곳에서의 해프닝은 일단 막을 내렸다.
저녁이 왔다.
그의 아내는 낮의 쇼핑에 발품을 파느라 피곤하여 일찍 자리에 누웠고 그와 미지의
두 남녀는 캔 맥주를 한 박스 사서 바닷가 선창에 앉았다.
외해에서는 중형의 배들이 운항등과 항적등을 앞뒤로 켜고서 해무 속을 느릿느릿
왕래하였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이구, 무슨---. 마누라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아뇨, 제말은 갑작스레 제 일신상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꺼냈던 것 말입니다."
"아, 그것도 따지고 보면 내가 썰렁한 유머를 꺼내다가 발전이 된 것이지요."
"아닙니다. 세상의 누군가에게 우리 이야기를 꼭 좀 하고 싶었거든요. 마침 기회가
온 것 같았는데 중간에 좀 해프닝, 아 죄송합니다만, 그런 일이 있어서 중단이 되었군요."
"아, 뭐 내키지 않으시면 다시하실 필요는 없구요. 말 빚을 진것도 아니고 대체로 또 자기
이야기하고는 나중에 후회하게 되잖아요---."
"네, 감사합니다. 다만 선생님을 뵈면서 무언가 마음이 당겨서 이런 인연이 되었고 또
선창가에 나와서 자기 고백이랄까, 독백을 나누고도 싶네요. 이 사람, 그러니까 제 연인도
같은 마음이랍니다."
두사람의 이야기는 대략 이러하였다.
어릴때부터 생년월일이 같다는 우연 말고도 그들은 성격이나 취향이 너무나 비슷하다는
필연 때문에 소꿉장난 시절 부터 어른이 되어서는 당연히 부부가 될 것을 다짐하였다.
두사람은 신기하게도 눈동자가 풀어졌다 모아졌다 하는 현상도 비슷하였는데 사실 그런
현상은 두사람이 공유하는 수많은 일들의 한 단면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동네 친구들이나 학교 친구들도 이런 예상과 기대를 당연시하였다.
사고가 난 것은 남자의 부모 쪽이었다.
그들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쯤 남자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사업에 실패를 하고 그
충격과 홧병으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세상사에 자주 등장하는 스토리에 다름 아닐 수도 있었다.
그에게는 더 처참한 이야기가 가까운 미래로 기다리고 있었다.
압구정동을 떠난 그와 홀로된 어머니는 안양 근처의 서민 아파트로 들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어머니가 8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려버린 것이다.
시신을 수습하고 처리하는 과정 모두는 사춘기에 접어든 그 남자의 몫이었으며 이 일이
끝날 때 쯤 그는 트로마 현상 속에 빠져들었다.
계속되는 불운 속에서 정신적 이상증세까지 겪으며 그는 차마 그녀를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일수가 없었다.
여자의 부모가 그런 일을 용납할리도 없엇다.
결국 결혼 적령기가 된 그녀로 부터 그는 자취를 감추었으며 여자는 얼마후 시집을 갔다.
세월은 물결처럼 흘러갔다고들 하지만 두사람의 생애는 고여서 썩은물 같았다.
남자는 두어차례 결혼과 이혼을 무명의 행사처럼 치르고 지금도 또 어떤 불행한 여인과
별거상태였으며 생업도 제대로 일구어나갈 수 없을 정도로 파탄된 삶 가운데에 있었다.
여자는 시집을 가서도 내내 압구정동에서 살게되었으나, 남편은 거의 홍콩에서 다른
살림을 살고 있었다.
압구정동의 초등학교 선배가 내내 눈독을 들이다가 남자가 사라지자 적극적으로
나와서 납치혼처럼 혼례를 치루었으나 결혼 생활은 곧장 파탄이었다.
여자가 결혼은 하였으나 남녀간의 성생활을 도무지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납치 비슷한 극적인 사건까지 저지르면서 그녀를 데려온 남편은 이런 상태가 떠나간
남자와 자기 아내가 혼전 관계를 맺었고 이를 잊지 못하여서 그녀가 결혼생활에 최선을
다하지않는다고 짐작하였다.
따라서 미필적 고의로 부부 관계를 해태한다는 분노어린 주장을 펴고, 당장 쫓아내지
않는것만도 다행으로 여기라는 것이었다.
하긴 그의 주장도 반은 맞는 말이었다.
자기의 남자가 사라진 이후에 그녀는 다른 남자와는 결혼 생활이라는 것을 할 의욕도
노력도 모두 방기한 상태가 되었다.
다만 그 남자와 혼전 성관계가 있었다는 추측성 주장은 억지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아들을 하나 얻었다.
"쌀 뜨물이 튀어서 생겼나?!"
처음 친자관계를 부정하듯이 나가던 남편이 커가면서 워낙 자신의 용모와 닮은 자식을
보면서 낄낄거리며 인정하던 되먹지 않은 말 솜씨였다.
그 쌀뜨물이 튀어서 생긴 아들은 지금 홍콩에 있는 어떤 기숙학교에 조기 유학을 떠나서
모자 상봉은 잘해야 일년에 한번쯤이었다.
우리말과 영어와 중국어를 다 잘 배울 수 있다는 희망은 마침내 세나라 말을 다 잘 못하는
쪽으로 판별이 나고 있는 가운데 아이는 다행히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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