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단편 연재) 활화산 아소(阿蘇) 풍경 (제 4 회)

원평재 2008. 9. 27. 22:55

 

 

그 남자와 여자가 다시 만난건 강산이 한번 변하고도 훨씬 더 많은 세월이 흐른 후였다.

두사람 모두 초 중등학교의 그 흔한 동기회에도 나가지 않았고, 학교 주소록에도 남자 주소는

항상 불명으로 남아있어서 두사람이 공식 루트로 연결될 기회는 없었는데,

어느날 압구정동의 백화점에 납품 일이 있어서 나온 남자와 쇼핑 몰에 나온 여자가 

문득 조우하였다.

 

헤어진지 이십년을 곧 바라보는 해에 발생한 우연이자, 어쩌면 간절한 마음이 빚은 필연

의 결과였다.

남자가 압구정동의 백화점에 납품일을 맡았다는 사연이 그녀처럼 압구정에 붙박이로 살고 있는

동기들 사이에 조용히 떠돌더니 마침내 그녀의 귀에도 들어온 것이다.

헤어샵에서의 귀동냥이었으나 그녀를 아는 친구들이 의도적으로 떠벌려준 소리인지도

몰랐다.

소문이 귀에 들어간 이래로 그녀는 새벽이나 늦은 저녁에 백화점으로 화물이 드나드는 뒷문

쪽을 부지런히도 어슬렁 거렸다. 그러다가 만났다면 우연인가 필연인가, 그녀는 가늠하지도

않았다.

 

 

십년만 지나도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런 세월을 훨씬 지나치고도 두 사람은 대번에

알아보았다.

밖에서 차 한잔을 나눌 겨를도 없이 두사람은 당장 여자의 집으로 왔다.

얼마나 사연이 많았으면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불가능했고 불필요했다.

얼마나 서러웠으면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한없이, 한없이 울기만 했다.

그리고 때늦은 밥을 같이 지어먹고 같이 이를 닦고 목욕만은 크고 작은 욕실에서

따로 하였다.

타월로 몸을 닦을 때는 서로 도와주었다.

아직도 행궈낸 세제의 라벤다 향기가 상큼하게 남아있는 보송보송한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가서 꿈에도 그리던 신방을 마침내 차린듯 두 사람은 사랑을 시작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탐색을 하는 이름 모를 맹수의 조련사처럼 그들은 다 벗은

몸으로 서로를 가만히 쓰다듬어만 주다가 마침내 자신들이 포효하는 맹수가 되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정말 사람의 몸은 신기하고 신비하였다.

그동안 남녀간의 관계라는 것이 두렵고 더럽고 그리하여 미필적 고의로 해태하여 마지

않았던 일체의 몸동작이 마치 어느 순간 꿈속에서라도 이미 조련되었다는 듯, 사지와

오장육부까지 총동원하여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땀을 철철 흘리며, 아니 온 몸의 겉과 속에 끝내 알아 낼 수도 없이 무한히 발달된 샘과

선(腺)을 온통 다 열어서 그들은 사랑의 행위를 나누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서적과 그림과 온갖 미디어를 통하여서 남녀가 사랑을 하는 그

격렬한 순간의 모든 동작과 호흡을 보고 들어왔으나 한번도 공감하거나 승인치 못했던

그 감질나고 무지이고 의혹의 대상이었던 정서가 폭풍을 맞고 부서져 날아가는 허술한

지붕처럼 그들로 부터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그날 부터 정말 석달 열흘간을, 아니 그 보다도 더 많은 날들을 나날이 먹고 자고 또

사랑하며 지냈다.

아니 때때로 토끼 굴을 통하여 나가서 한강 둔치를 거닐며, 혹은 명품만 모아파는 백화점을

일없이 들락거리며, 길건너의 갤러리와 옥션과 카페와 와인 바와 국시집과 또 노래방에도

들어가서 마시고 놀아보았으며 거대 규모의 교회와 성당과 도심의 사찰도 들어가 보았다.

어느 곳하나 구원이 아닌곳은 없었다.

모두가 사랑하는 두사람이 손잡고 들어간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얼마전 어느날은 '점집'에도 들어가 보았다.

여자는 항상 최고급 정장이었고 남자도 여자의 집에 있는 명품 남성용 캐주얼을 입고 돌아

다니다가 심심하여 문득 들어가 본 '점집'이었다.

   

 

"에이, 둘이 잘 차려입었지만 거지 꼴이야. 내 눈에는 다 보여!"

무녀가 욕설보다는 겨우 한단계 덜한 말을 퉁명하게 던지자, 마음씨 여린 그 여자가

페라가모 핸드 백을 열고 복채를 다시 더 두둑히 들이밀었다.

"그래, 이 여자가 마음이 고와서 내가 액운을 떼어내주고 말거야. 내가 그렇게 조치해줄께.

당장 나가서 현찰과 달러를 마련해. 그리고 멀리 떠날 준비들 하라고!"

신내림을 지독히 심하게 받아서 아주 영험하다는 무녀가 그렇게 말하고는 휙 돌아앉았다.

두사람은 머쓱한 기분으로 그 곳을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두 사람은 한국을 떠나야만 하였다.

이혼 소송을 제기해 놓은 여자의 남편 쪽 사람들이 어느날 집으로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물론 두 사람에게 법적 문제가 제기될 소지는 없었다.

마음이 뜬 부부의 일탈에 대하여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실정법으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면서도 이제는 어느새 국가가 법으로 관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통감하고 손을 떼고 있는 것이 그 동안의 이 나라 사법 변천사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나라를 떠나기로 했다. 

그것은 조국을 버린다는 개념과는 또 다른 상태였고 어쩌면 이 세상을 외면하겠다는

마음의 첫번째 행위인지도 몰랐다.

두사람은 우선 비자 면제가 되어있는 일본으로 얼마전에 떠나왔다고 하였다.

며칠 후면 비자가 상호 면제된 남미쪽, 특히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 보았으면 싶다는 말도

그들은 긴 고백의 마무리처럼 하였다.   

 

"선생님에게 귀찮게스리 왜 이런 말씀을 다 드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털어놓고나니

정말 마음이 시원합니다."

"그렇군요.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나도 참 많이 도움이 되었어요. 아시다시피 우리 부부

관계가 하도 심상치 않고해서---."

"그래도 용케 평생을 잘 지내오셨잖아요. 뭐 그렇다고 이제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으로 오해하시진 마시구요."

이번에는 여자가 곱게 웃으며 말했다.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는 모습이 단아하였다.

밤이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동자도 아마 편하게 풀어져있을 것이었다.

 

 

"세상이 참고 살아왔다고 어디 그렇게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아요. 요즈음 황혼 이혼,

연금 이혼, 뭐 그런 말도 있잖아요. 이 나라 일본에서는 이미 광범위한 사회현상이

되었다지요.

생각해보면 평생을 함께 살아왔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그대로 지내란 법은 아닌 것도

같군요. 아, 이건 우리 마누라의 이야기입니다만, 허허허."

그들은 아주 늦게 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부인은 오랜만에 많이 걸어서 그랬는지 이미 곯아떨어져있었다.

코고는 소리가 그 바로미터였다.

 

다음날 아침은 마침내 여정의 끝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이지만 닷새째는 아침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떠나기에 이날이

실질적인 마지막 일정이었다.

오전에는 구마모도 성을 보고 오후에 활화산 아소 분화구를 보는 것으로 이날도

만만치 않은 하루다.

비는 역시 오락가락이었다.

그래도 비를 뿌리는 구름이 햇볕을 가려서 더위를 한결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웅본(熊本)이라고 써서 구마모도로 읽는 이 지명만 보아도 한국으로부터의 영향을

느낄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곰을 토템으로 하는 나라인데 이것이 일본으로 와서 곰, 고마,

구마, 가마 등으로 변했거든요. 가마 부(釜)라는 글자나 검을 흑(黑)자가 유독 많은 것도 그

탓이지요.

곰이 가마와 검다로 변형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개마고원도 같은 맥락이랍니다."

가이드의 해설이 수준 높았고 유익했으나 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맨 앞자리의 남녀도

무엇이 피곤한지 몹씨 졸고있었다.

그러나 구마모도 성을 지나고 나서부터는 남들과 달리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좌우의 산천을

열심히 감상하고 있었다.

여자도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졸던 자세를 바로 세우고 멀리 보이는 아소 산에 시선을 집중하는

눈치였다.

 

 (계속)

 

 

 구마모도(熊本)는 우리의 토템 신화, 곰과 관련이 있고 산성의 우물 정(井)도 고구려의 본을 딴 것이다.

그러나 이제 어쩌랴---.

 

 

 

 

 

 

 

  

 

 

 

 

Serenade for Strings in C major, Op.48

차이코프스키 / 현을 위한 세레나데

Pyotr Ilich Tchaikovsky 1840∼1893

Herbert von Karajan, Cond / Berliner Philharmoniker

 

 


1악장 (Pezzo In Forma Di Sonatina)
Berliner Philharmoniker / Herbert von Karajan, Cond


2악장 (Waltz)
Berliner Philharmoniker / Herbert von Karajan, Cond


3악장 (Elegy)
Berliner Philharmoniker / Herbert von Karajan, Cond


4악장 (Finale (Tema Russo))
Berliner Philharmoniker / Herbert von Karajan, C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