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 산조(奚琴 散調)
“학교”라는 두 글자만 봐도 나는 항상 가슴이 뛴다. 더욱이 그 학교가 '대학' 혹은 '대학교'라고 하면
내 가슴은 종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
높은 학교 문턱을 제대로 밟아보지 못한 내 평생의 소원 같은 게 그런 심정을 자아낸 결과이겠지만
그렇다고 턱없는 욕심을 부릴 까닭도 없다.
그건 그렇고 수도 서울의 북쪽에 있는 “모래내”, 행정구역상으로는 “남가좌동”에 있는
“수도 예술 대학”의 평생 교육원에서 “해금”을 배우는 성인 교실이 있다는 소리를 남편의
중고차에 있는 라디오에서 들을 때만 하여도 그건 소음이었다.
주부 들을 위한 그런 안내 소식이나 내 희미한 기억 속의 해금 소리는 모두 그 오래된 차 속의
고물 라디오에서 찍찍대며 나오는 잡음의 수준에 불과하였다.
다만 대학 평생 교육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몰라도 대학 문턱에 대한 내 소망과 관련
하여서라면 약간의 흥미는 끌 수 있는 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하나 밖에 없는 여고생 딸이 대학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나도 그때는
대학의 문턱을 자연스레 넘어 볼 것이었다. 내 소망의 한계는 그 정도일 따름이었다.
"당신도 저걸 한번 다녀보지."
소음으로 여겼던 "해금 교실" 안내가 끝나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착한 남편이 기절초풍할 제안을
하였다.
운전대 위에 턱 얹힌 남편의 손마디는 보통 사람의 두 배 정도로 부풀어 올라있어서 볼 때마다
나는 안쓰러운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
남편은 미장일을 하고 나는 벽지 붙이는 일로 서울이나 신도시를 안다녀 본 데가 없는, 우리는
아파트 건축기사 부부이다.
하기 좋은 말로 남편은 미장 기사, 나는 도배 및 실내 도장 기사인데 협력업체를 묶어서 교육시키는
큰 건축 원청회사에서 발행한 기능공 자격증이 집안 어느 구석엔가 보물처럼 잘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자격증에는 물론 기사가 아니라 기능공으로 나와 있다.
하여간 그 "종이 쪼박지"라고 우리가 부르는 자격증이 남들에게는 무어 대수롭지 않을는지 몰라도
그래도 남편 보고 노동판의 십장이 "어이, 쓰미!"하고 하대하여 부르거나, 여자인 나보고
"어이, 벽지 잡부!"하고 막말로 불러대던 때하고는 자격증 이후의 대접이 많이 달라졌다.
남편은 영등포에 있는 공고를 나온 다음, 주물 하는 데에서 끓는 쇳물을 붓다가 발등을 덴 후부터는
미장일로 돌아서 일급 미장 기능공이 되었고, 나는 서울 역 뒤, 만리동 꼭대기에 있는 여자 전수 학교를
나와서 중소기업의 사환 겸 경리 직을 하다가 경리과장이 추군 거리는 게 싫어서 사표를 내고 나왔었다.
마침 인근에 국가에서 하는 건축 기능공 단기 훈련 과정이 있어서 기술을 금방 익힌 다음 아파트
공사장을 돌아다니는, 날 품팔이가 되었지만 수입은 해마다 아주 짭짤하게 올랐다.
공사판에서 젊은 나이에 우리 부부는 눈이 맞아 일찍 결혼도 하였고 딸아이도 하나 낳아서 잘 키우며
살고 있다.
일이 좀 힘들고 비오는 날이 공치는 날이라 그렇지 우리가 받는 일당은 벌써부터 8-9만원 남짓이
되어서 특별히 잔업으로 날밤을 지새운 공사까지 낀 달에는 둘이 받아서 쓰고도 한 달에 몇 백만 원
씩 돈을 모은 적도 있다.
비오는 날도 공치는 날이 이제는 아니다. 내장 공사 전문으로 우리 부부는 이름이 나서 겨울 한철 조금
빼고는 일 년 열두 달 노는 날이 없었다.
물론 때때로 닥치는 건설 경기 불황 때면 몇 달 씩 손을 놓고 얼마 벌어놓은 것을 까먹는 신세가 되는데
그럴 때는 죽을 맛이다.
특히 매일 아침 책 가방을 메고 학교로 나가는 딸을 보면 벼랑에 서 있는 기분이 된다.
요즈음 그런 악몽이 다시 시작될 조짐이 좀 보이지만 그래도 아직 서울에서는 버틸 만 하다는 것이
건축업계 바닥에서 일하는 우리들의 감각이다.
경기가 좋은 시절이면 남편은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 "말 타면 종마 잡히고 싶다네"라고 하면서,
"우리도 남들처럼 일당 말고 월급이란 걸 한번 타봤으면 좋겠어---", 혹은 "회사 전화가 몇 번이냐고
묻는 딸아이의 성화에 휴대폰 아닌 직장 전화라는 걸 가르쳐 줄 수 있으면 좋겠네," 등등의 배부른
타령도 가끔 했으나 흘러가는 한 순간의 푸념일 뿐이다.
우리는 아무래도 비정규직이라는 팔자를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하여 간 세월은 많이 좋아졌다. 사글세방으로 시작한 집만 해도 전세방을 거쳐서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우리의 집을 등기부에 올리고 살게 되었다. 집이라야 대단치는 않아서 오래된
연립주택의 반 지하층이긴 하지만 사는 데에 지장은 없다.
다만 딸아이가 친구들을 데리고 오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아 하지만 성격 좋은 아이라서 마음에
타격 입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니 내색만 않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못난 부모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니 사실은 우리 부부가 꼭 못난 사람들만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강남 일원동에도 오래된 연립주택이나마 지하를 쪼개서 등기한 게 있긴 한데 그 무슨 재건축법이
바뀌는 바람에 강남 주택 자가 되려는 다 된 밥에 정부가 재를 뿌린 미해결 사건 같은 것도 우리는
안고 있다.
머리는 굴렸어도 운이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기다리다 보면 강남 주민이 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강북의 연신내 쪽도 무슨 뉴타운인가 뭔가 하는 게 된다고
하니 지금 살고 있는 헌 연립주택에도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강남 사람이라고 모두 날 때부터 부자도 아니고 더 지혜롭거나 부지런 한 것도 아니면서 어쩌다
판이 갈라졌는데 이제는 맨발 벗고 따라가기도 힘든 지경이 되었지만, 나는 기가 죽거나 그 사람들을
증오하지는 않는다.
두고 봐라, 이제는 강북 시대가 정녕 오려니 하고 굳게 기다릴 셈이다.
아무리 개인이 근면 성실하여도 나라의 정책이나 흐름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개인으로서는 이런
차이를 회복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아파트 공사판에 나와서 세상 물정 돌아가는 것을 그동안 보아 온 내 안목적 견해로는 이건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정말 이런 식으로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까놓고 이야기해서 강남에 집 있는 사람들이 더 근면하고 머리도 좋고 지혜가 더 있고 더 성실하다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예전에는 모두 얼마 되지 않은 자금으로 은행 빚 얻어 우연히 남쪽에 살다가 횡재를
했거나, 직장 탓으로 그리 되기도 했을 것 이고, 혹은 미리 알음알음으로 세상 돌아가는 공기를 알아
자리를 잡은 결과가 이렇게 팔자를 갈라놓은 게 아닌가 말이다.
내가 뒤늦게나마 이런데 눈이 뜨여서 강남 일원동에 쪼가리 등기를 해 놓는다고, 이자가 조금 센
저축은행의 돈까지 얻어서 과하게 투자를 한 탓에 우리생활은 항상 빠듯하지만 남편은 이런 미래
계획도 모두 내가 전수학교나마 나와서 경리사원도 해보고 또 건축 공사판에 들어와서 견문을 넓힌
지식 덕분이라고 항상 고마워한다.
어쨌든 정치가들 때문에 건축법이 까다로워졌지만 언젠가 빛을 보리라고 나는 철석같이 믿는다.
물론 때때로 내가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닌가하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불안 해 하며 가족들에게
미안할 때도 많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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