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내가 전화 번호 스무 개 쯤은 지금도 외우는 실력을 항상 아까워한다.
전수 학교를 나와서 경리직원까지 한 내 경력도 남편은 항상 높이 평가해준다.
사실 만리동 꼭대기의 그 전수학교 야간부는 돈이 없어 낮에는 사환 같은 일을 하다가
밤이면 중등학교 졸업 자격증을 따겠다고 모인 악바리 소녀들의 집합 장이었는데,
나쁜 데로 풀린 애들도 있었지만 다들 고등학교 졸업 자격증을 따고 중소기업이나
때로 대기업, 좋은 회사로 진출한 경우가 더 많았다.
또 탤런트나 여배우로 나가서 이름이 난 선배 언니들도 있었는데 최근에 무슨 학력
시비가 났을 때에 그 스타들로부터 솔직히 우리학교 졸업생이라는 당당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서 섭섭한 적도 있었다.
그 언니들은 우리 후배들의 존경과 희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여보, 내 말에 왜 대답이 없소?”
남편은 끈기 있게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해금을 배우라고요? 아이구, 미쳤어요. 당신 농담이지요? 무슨 깽깽이 판에 돈을
내고 다니라니 그럴 돈도 없거니와 또 그 시간에는 돈도 못 벌잖아요.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니 당신 정말 아이들 말처럼 맛이 갔수?"
내가 지난 생각을 하다가 남편의 엉뚱한 제안에 화들짝 놀라서 그의 굵은 손마디를
꼬집으며 강력하게 반대를 하였다.
내가 특별히 교양이 있는 사람은 못되지만 이렇게 까지 반응이 격하게 나가는 것은
모두 은행에서 얻은 빚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오히려 담담하였다.
"깽깽이라니 그런 교양 없는 소린 하지 마시게. 얌전한 내 각시가 그런 험한 소리는
어디서 배웠어?
그리고 내가 지금 방송을 들어보니 일주일에 하루만 나가서 세 시간 몰아서 수업
받고, 또 그 해금이라는 악기도 당장 사는 게 아니라 그냥 빌려준다는데---.
우리가 지금 주로 모래내 공사장에 있으니 해금 배우는 장소도 가깝잖아. 이럴 때
대학 문턱도 한번 넘어봐. 당신은 아까워---."
대학이라는 말이 우리의 대화에도 이렇게 쉽게 끼어들어가고 또 내 재능을 아깝다고
표현하는 남편의 말에 내가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이 울컥하는데 그는 말을 이었다.
"엊그제 우리가 왜 공사장에서 밥 시켜 먹을 때 깔아둔 신문지에 요즈음 가정주부들이
무슨 해금 배우는 게 유행이고 어쩌고 하는 기사가 나왔잖아.
그때 같이 있던 인부들이 할 일 없는 여자들 지랄 떤다고도 했지만 지금 방송 들으니
그게 정신 수양도 되고 교양에도 좋겠네.
우리 겨울마다 건축회사 교양 시간에 나가서 교육 받고 오잖아, 귀찮다고 하면서도
대학 교수들이 와서 좋은 이야기 많이 해 주었지."
남편의 갑작스런 권유는 눈물겹게 감사했지만 내게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돈 문제만이 가장 큰 걸림돌은 아니었다.
돈에 여유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제는 돈과 관련한 그런 강퍅한 생각 때문에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의 뜻 있는 시간을 접어버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내가 멈칫한 것은 오히려 나처럼 전수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주제에 비록 정규 대학은
아닐지라도 대학 부설 평생 교육원이라고 하는 데를 통하여서 대학의 문턱을 갑작스레
넘게 된다는 생각에 잠시 심장이 멎을 번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날 저녁, 남편은 해금 문제를 집으로 까지 갖고 들어왔다. 계속 머뭇거리는 나에게
결정적으로 힘을 실어준 것은 여고생 딸 아이였다.
"엄마, 거기 수도 예술 대학 말고 신촌 쪽으로 더 나가셔서 이화여대 쪽으로 가시지
그래요. 그리고 한번 외치는 거예요. '나도 이대 나온 여자야!' 라고 말이지요."
집안에 큰 웃음이 터졌고 나도 무언가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깊은 호흡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식구들의 결정은 끝이 났다. 딸아이는 인터넷으로
해금 교실에 등록을 해 주면서 자꾸만 이화여대로 가라고 했지만 우선 모래내 쪽이 금액이
쌌고 지금 작업장과도 아주 가까워서 일단 2년제인 “수도 예술대학”으로 시작을 하고
나중에는 정말 나도 "이대 나온 여자"가 되어 보기로 했다.
(계속)
강
한국 전통 음악을 연주해 온 국악계가 공인한 최고의 해금 연주자이다.
그녀는 2004년 첫 앨범「Moon in The Clouds」를 발표하며
국악 인생 30년만에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다.
국악의 틀을 벗어나 악기가 가지는 특성을 감성적인 멜로디로 풀어
내려간 성의신의 앨범은 2005 한국 대중 음악상 크로스오버 부문'에서
국악기로 유일하게 후보에 오르며 국악의 대중화, 세계화 가능성을
제시하며 평단과 대중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2006년 발표한 성의신의 2집 앨범 「The Hill of Memory」는
인생의 반환점을 지나 중년의 나이에 지나온 삶을 하나하나
회상하며 밀려오는 회한 등을 담아냈다.
삶의 깊이에서 오는 성의신의 해금 연주는 오랜 세월동안
쌓인 감각을 바탕으로 한 절제된 감성 연주이다.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인 "어느 슬픈 날"은 가을밤의 그 애절함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 내릴것만 같은 곡으로 해금 연주의 백미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우리의 전통 선율인 "양청도드리"를 새롭게 편곡하였고, 우리 민요
"도라지"를 팝 적인 리듬과 화성으로 편곡하여 새로움을 더했다.
01. one Sad Day (어느 슬픈 날)
02. The Night Song (야상곡)
03. The Flower Of Tears (눈물 꽃)
04. The Hill Of Memories (회상의 언덕)
05. The River Of Sorrow (슬픔의 강)
06. A Winter Night (겨울 밤)
07. Like An Old Photograph (오래된 사진처럼)
08. The Way Of Pilgrimage (순례의 길)
09. The Long Long Years (천 년)
10. In The Mist (안개 속으로)
11. Yang Chung Dodry (양청 도드리)
12. Doraji (도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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