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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음악가, 금난새와 함께

원평재 2008. 10. 16. 23:13

 

도산 조찬 세미나에서 금난새 지휘자를 초청하여 아침 강연을 들었는데

특별히 벤처 정신에 가득한 음악가의 명강이어서 여기 소개해 봅니다.

 

이날의 주제는 <하모니 리더쉽-예술 경영의 벤처 정신>이었으며

금난새 유라시안 필하모닉 음악감독의 생생한 뮤직 매니지먼트 이야기가

좌중을 압도하였습니다.

좌장은 백두권 도산 아카데미 원장(고려대 교수)이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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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떨립니다."

금난새의 강연은 유머로 시작되었다.

자신은 크고 작은 공간에서 수많은 지휘를 해 본 사람이지만, 사실 지휘자란

객석을 향하여 꾸벅 절하고는 낯익은 연주자들 쪽으로 돌아서서 지휘봉을

흔들면 되는데 이곳 힐튼 호텔의 밀레니엄 홀에서 VIP들을 눈 앞에 두고

마주 바라보는 자세로 말문을 트자니 두렵고 떨린다는 엄살(?)이었다.

 

음악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란 금난새는 서울 예고를 다닐때 부터

지휘에 큰 관심이 있어서 "서울 영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대학 때에는 지금의 광화문 교보 자리에 있던 USIS 강당에서 예고나온

여러대학의 젊은 대학생들과 <서울 영 앙상블>을 조직하여 지휘를 하였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젊은 친구가 벤처정신에 가득하였다고 말 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연습과 연주 공간을 마련할 때에도 그의 벤처

정신은 다시 발휘되었다.

 

 

연습과 연주의 공간을 마련하기가 무척 어려웠던 그 시절, 그는 미국 공보원의

문정관에게 매달렸다.

미국 공보원의 작은 강당을 연습과 연주 공간으로 빌려달라.

두달에 한번은 아름다운 연주회를 열겠으며 레파토리에는 반드시 미국 작곡가의

작품을 넣겠다고 하면서 접근을 한 것이다. 난색을 표명하던 문정관이 미국

작곡가 부분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연주회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미국 작가의 작품을 넣겠소."

그가 제안하니까 문정관이 "That's a good idea!"하면서 그렇다면 지방의

미국 공보원에서도 가끔 연주를 해주면 어떻겠느냐고 하여서 이번에는

금난새가 "That's a good idea!"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연주의 기회와

공간이 덤으로 더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국내에는 지휘 분야가 불모지였고 대학에 지휘관련 전공도

없었기에 독학으로 매진한 금난새는 지휘봉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우리 풍토에서는 "돌팔이"라는 접두어가 매섭게 따라다녔다.

2년후 공보원 문정관은 이임하면서 본국 정부의 훈장을 받았고 금난새도

작은 상을 받아서 베를린 음악대학으로 수학하려 갈 때에 도움이 되었다.

두사람이 상을 받은 공적은 모두 미국 음악을 선양했다는 것이었다.

베를린 음대에서는 마침내 지휘를 전공하였고 돌팔이 타이틀도 뗐다.

 

 

베를린 대학으로는 지휘 공부라는 "나무"를 보러 간 것이었는데 그곳에서

그가 보다 많이 본 것은 "숲"이었다.

연주나 공연회에는 무료 티킷을 받아서 가야 위신이 서는 국내 풍토에

익숙한 그에게 2-3년 전에 이미 베를린 필 예매가 2/3에 달하고 객석은

항상 만석이라는 사실도 그가 본 숲의 한 부분이었다.

카라얀 지휘 콩쿨에서 4위를 하고 그는 귀국하여 KBS 교향악단을 오래

맡았다.

 

5공 때는 전두환 전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교향악단을 불렀다.

들어가기 전에 연습량을 스스로 늘리는 단원들의 모습이 좀 놀라웠고

어쨌든 사람들은 무언가 모티베이션이 있으면 저렇게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청소년을 위한 공연과 지방 공연 같은 데에도 열의를 더 내자고 단원들을

독려하는 데에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음악에 대해 뭘 좀 알까 싶지도 않은 대통령한테가서 연주할 때의 열의 못지않게

청소년들에게도 공을 들이자,

그 대통령 보다 훨씬 나은 미래의 고객들이 아닌가---.

(장내에 웃음이 나왔다.)

 

 

수원시향을 맡을 때에는 KBS에서 짤렸다는 소문에 시달렸다.

사실은 수원 시향이 당시 파산, 좌초의 상태였는데, 그런 파선된 배를 인양해내서

정상화 시키는 데에 보람과 의미를 찾고 싶었고 정열을 불태우고 싶었다---.

수원에 가서 보니 단원이 80명에 청중도 80명, 그나마 1부가 끝나면 청중의 반이

사라지는 형국이었다.

마침 새해 시무식이 있는 날, 시청의 로톤도 광장에서 때 맞추어 연주를 하여

시장의 감동을 자아내고 보너스를 400%에서 100% 더 인상받는 계기가 되면서

오늘날 수원의 상징이 수원갈비가 아니라 수원 시향으로 바뀌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수원시향에 있으며 마라톤 연주회(7시간 반 연주)도 해냈다. 언론 플레이를

목적으로 한 건 아닌데 언론도 타고 한국 음악사의 한 페이지도 장식하였다.

한편 예술의 전당 등, 국고를 보조받는 음악당에서는 연간 10일 정도의 공연 서비스

기간이 있는데 <금난새와 함께하는 청소년 세계 음악 순례 프로그램>을 만들어

무료에 가까운 2000원 씩을 받았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2000원 정도를 투자하여서 자식에게 면목을 세우니 너도나도

티킷을 구입하여 아이들에게 자랑스레 주었다.

9일간 전회 매진 기록이 쉽게 나왔다.

음악회는 공짜 티킷이 아니라 돈을 내고 들어야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진정한 자격을 갖춘다는 의식을 청소년에게 심어주자는의도였고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그 <청소년--- >프로그램에서는 여러가지 특이한 기획도 삽입하였다.

1회, 2회, 하는 고식적 프로그램 일정의 타이틀 부터 바꾸어서 러시아 음악날,

미국의 날---, 등등으로 바꾸고

중간 휴식시간에는 단원들이 악기를 들고 나가서 청소년들이 만지고 연주도

해보는 기회를 주선했다.

해설도 작품을 해체하여 다시 조립하는 방식을 취했다.

예컨데 모찰트가 바이얼린 콘체르토를 작곡 할 때에는 먼저 바이올린을 위하여

작곡을 하고 그 다음에 비올라, 첼로 등을 거기 맞추어 손을 보았을 것이고

마침내 목관으로 마지막 화장을 했다는 식으로---.

6년을 계속했는데 계속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999년 <유라시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했을 때는 첫번째 타깃을

POSCO로 잡았다. 마침 강남의 그 거창한 사옥은 막 준공을 마치고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다만 컨벤션 홀 같은 곳은 음악인들에게

차례가 오지 않고 이미 무게있는 행사들로 연중 계획이 꽉찬 상태였다.

대외 행사 담당자에게 운을 띄어보니 그곳에서의 공연은 어림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저기 입구의 로비가 유럽의 대성당 같습니다."

그의 아첨에 담당자가 조금 움직였다.

"저기를 공연장으로 하고 일단 우리와 문화 공연 계약 하나 합시다."

금 단장의 제의에 담당자는 미심쩍어하면서 그런데에서도 공연이 가능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럼요, 유럽은 대공연을 모두 성당에서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선 공연 하나가 성사되었다.

 

새천년이 시작되기 전날, 포스코가 종무식을 겸하여 음악회를 하는 날이었다.

거룩한 행사는 컨퍼런스 홀에서 하고 연주는 툭터진 로비에서 하기로 되었다.

접는 의자 1000석이 마련되고 선곡은 베토벤의 합창, 70분짜리로 정하였다.

헌년이 가고 새년이 오는 그순간에 장엄한 합창은 포스코 로비를 울려퍼지고

회장과 사장과 수많은 계열사 임직원들의 가슴 속을 파고 들었다.

공연은 대 성공이었다.

<로비 연주>의 시대가 이땅에서도 개막된 것이었다.

 

본래 연주자들에게 최대의 찬사는 "참 좋았다!"라는 말 보다도

"다음 공연 날짜는 언제로 할까요?"라는 제안이다.

공연이 끝나고 며칠간의 신정 연휴가 끝나던날이었다.

"다음 연주는 언제 무얼로 할까요?"

기다리던 최고의 찬사가 포스코 쪽에서 나왔다.

"네, 포스코 처럼 중후장대한 회사는 베토벤 처럼 무겁고 거대한 쪽으로

선곡을 해야합니다."

"아, 그래요? 그럼 전 곡을 다 하시지요."

담당자가 계약서를 내 밀었다.

금난새는 베토벤이 원망스러웠다. 교향곡을 어이 아홉곡만 지었을까.

한 백곡쯤 하시지---.

 

그렇다고 하이든의 대작 100곡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다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차이코프스키 6곡, 브람스 6곡, 드보르작---, 이런 순서로 연주는 계속

되었다.

얼마후에 담당자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금 단장을 불렀다.

 

"문제가 발생했어요---."

"문제라니요?"

"아, 포항과 광양의 포스코 사람들이 지방 차별하느냐고---. 그래서 거기에서도

좀---."

작은 성공은 또다른 성공을 갖여온다는 잠언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유라시언은 이제 대학을 돌아다니고 있으며, 전곡 시리즈라는 새로운 지평도

열었고 음악 마케팅이라는 새 장도 이땅에 도입하였다.

포스코에는 연주마다 개근을 하는 고전음악 애호가가 400명은 되어서 이제는

너무 고정 팬으로 객석이 고착되는 것을 방지코자 국악과 재즈 등으로 저변을

넓혀서 유라시안 만의 고정 광장은 아닌 분위기로 전환했지만 차라리 다행스러운

진화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변경을 개척하고 있다---.

 

 

그동안 유라시안은 120회에 달하는 연주 기록을 세웠고 로비 연주의 새 전통도

정착한 셈인데 이제는 박수치는 전통도 이루어 나가고 있다.

(이 대목에서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후 박수는 끊이지 않았다.)

박수는 연주자에 대한 애호와 존경의 뜻을 넘어서 연주에 compliment로서의

역할도 한다는 것을 그는 객석에 심어주었다고 한다.

박수 치는 에티켓과 그 효용을 역설하면서 기침을 할때는 심벌즈가 터지는 순간을

포착하라고 겯들여 알려주면 객석에서는 저항없이 잘 따라서 해준다.

 

또한 연주가 끝나면 지휘자에게 쏟아지는 박수 소리의 음향에도 조금 손을 보았다.

사실 연주는 지휘자가 한게 아닌데, 지휘자가 퇴장을 하면 어쨌든 박수 소리는

작아지게 마련이어서 그는 반드시 단원들을 파트별로 먼저 퇴장시키고 자신은 맨

나중에 나가는 새로운 방식도 도입하였다.

 

열띤 강연에는 Q & A도 열기를 더한다.

로비 콘서트를 대규모 건물의 로비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공장지대의 작은 작업장으로

진출하시라는 노동문제 연구자의 제안을 이 거장은 선뜻 수용하였다.

 

또다른 질의자는 오늘날 장수 현상이 지휘자 세계에게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는데

존경하는 금난새 지휘자는 올해 몇살인지, 그리고 윤이상 씨와의 관련도 오묘하게

물었다.

나이를 묻는 결례가 오묘하게 포장되어 나와서 62세라는 고백이 쉽게 나왔고, 고향이

통영이어서 아버지와도 교분이 두터웠던 윤이상 씨와는 베를린에서의 대면은 몇 번 

있었으나 그분이 일부러 거리를 두어준 셈이었다는 신변잡사도 나왔다.

 

음악은 영혼의 표현이니 연주자들이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는 연주가 아니라

따로따로 뿔뿔이 흩어져서 120명이 120군데의 병원을 찾아서 음악 치료의 기회도

갖여보라는 제안도 심리치료사로 부터 나왔다.

 

이날의 휘날레는 과연 백두권 원장의 제안대로 박수 바이러스가 장내에 일렁이며

열기 속에서 "휘날레 비바체"로 끝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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