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늦가을의 산사, 개심사(開心寺)에서 일행들은 모두 마음을 다 열어재치고 시간도 잊으며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보니 빗방울은 후두둑인데 때는 벌써 오정(午正)을 훌쩍지나치고 있었다.
모두 배들이 고팠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으나 역시 문인, 문우들의 모임인지라
그래도 "마애삼존석불"부터 보고 나서 "해미 읍성"의 밥집을 찾아가야한다는 주장이
우세하였다.
중론을 따라서 버스가 급히 목적지로의 길을 찾아 달리는데 왠걸 큰 길가에 긴 성채가 보이고
그 성채의 마즌편에는 어느 틈엔가, 밥집 간판이 크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바로 저 유명한 "읍성 뚝배기" 밥집이었다.
횡재수가 따로 없었다.
아니면 스케줄이 조금 허술했거나---.
오후 두시에 찾아들어간 밥집은 이미 여러 매스컴에서 "놀랄 놋자"로 보도를 한 유서깊고
맛갈 깊은 그런 곳이었다.
더불어 추억의 언저리에 마당 깊게 자리한 그런 밥집의 모양새 자체가 물씬 사람의 마음을
파고든다.
<문학과 의식>의 안 주간께서 미리 안내문에서 "탁월한 선택의 밥집이 되리라"고 자신한
그 입맛이 바로 현실화, 현재화 되는 순간이었다.
국밥과 함께 나온 눌린 고기머리에 소주 몇잔이 들어가니 시장끼의 해결은 물론이고,
조선 팔도에 부러울게 없는 행복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양산 되었다.
이윽고 밥을 먹고 길을 건너니 바로 그 "해미 읍성"이었다.
바다에서 먼 곳은 아니라서 "해미"의 한자가 "海美"인 것이 이해는 가더라도 이 땅에서 가장 큰
읍성이 이곳에 있다고 자랑하는 데에는 의문이 생긴다.
북방이나 남방 해변가도 아닌곳에 왜 국내 최대의 읍성인가---?
알고보니 이 읍성은 남쪽의 "고창 읍성"처럼 모두 왜구의 침노를 대비하고 세운 대 구조물이었다.
왜구들은 서해안 일대는 물론이고 중국의 양자강 곡창지대에도 출몰하여 경작은 물론이고 가을에
추수와 수확까지 모두 도모하여서 자국으로 반출한 기록들이 많다.
우리나라의 삼남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진왜란때 일본의 인구가 2000만 내외, 우리나라의 인구는 250만명 전후였다는 것이 과학적
데이터로 나오고 있다.
우리 인구가 일본 인구의 1/10에 불과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유성룡이 상소문에서 "이 나라가 나라가 아니라고" 한탄한 사정이 이와 무관치 않다.
해미읍성은 그러니까 이 나라가 외침을 막은 최전선이었던 셈이다.
태종 때에 축성하여 세종 3년에 완성을 한 당대의 큰 역사에 속하였고 존재의 의의와 가치,
좀 고상을 떨어서 표현한다면 "레종 데트르"가 충만한 구조물이었다.
이렇게 왜구의 침노를 막는 최전선에 있다보니 근세사에서 서양문물이 종교의 이름으로
이땅에 들어오자 이땅에는 일종의 패러노이아, 집단 편집증과 집단 히스테리 현상이 생기고
박해라는 이름으로 방어기제가 생성 되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왜구를 막던 해미읍성은 이제 천주교 박해의 땅이자 순교의 성지가 되고야 만다.
막을 것은 막고 받아 들여야할 것은 받았어야하는데 이런 논리가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던
역사적 오류를 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읍성의 회나무에 1500여명의 순교자들 머리가 매달렸고 그 쇠고리가 아직도 보인다고 하는데
현장에서 나는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간혹 비까지 뿌리는 날씨가 차라리 이 순교 성지를 서성거리기에는 올바른 날씨만 같았다.
마애석불의 존재론도 그러하였다.
지금은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애삼존석불의 바로 발 아래까지 도달하여 저 이름난
"백제의 미소"를 지척에서 접할 수 있지만 처음 마애석불이 가다듬어질 때에는 쳐다보기에도
힘들 정도로 높은 곳이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첫째는 몇년에 한번은 닥치는 홍수 때문에 낮은 곳에 부처님을 모실 수 없었고 그보다 더한
이유는 침노하는 왜구들의 헤코지를 피하려면 그렇게 높이 모셔야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군청에서나온 해설사는 젊은 여자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곳에서 우리가 올 줄을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찬바람에 곱아드는 손으로
마이크와 스피커를 부여잡고 하나라도 더 설명하고 싶어하는 자세가 백제의 딸 같이 느껴졌다.
끝내 비바람에 끝막음을 다 하지 못하고 내려오는 길에는 보원사지가 발굴되고 있었다.
창건과 소실의 연대는 불명이나 백제의 유적이라고 한다.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의 유물들이 나와서 불교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생성과 소멸이 모두 문학이 육화, 체현하려는 가장 큰 주제라고 할 때에 폐사지의 존재는
만감을 문우들에게 안겨주었다.
산 마을에 저녁이 일찍 찾아와서 일행은 간월도의 굴밥집으로 저녁 요기를 하러 달렸다.
비바람 몰아치는 서해 바다는 더이상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 그냥 검은 장막으로 일행의
앞을 가로막을 따름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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