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고다닌 투어

운현궁 거닐기

원평재 2008. 9. 11. 23:07

한가위를 며칠 앞두고 어떤 대학의 운니동 캠퍼스에 갔다가

운현궁도 둘러보고 왔습니다.

운현궁은 점심 시간 중 무료 개방이 됩니다.

 

또한 추석 연휴에는 아침 11시 부터 저녁 5시까지 무료개방되고

여러가지 전통 놀이 축전이 있고

 직접 참여하여 체험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운현궁 고궁 산책 기록을 올립니다.

 
운현궁
 
 

 

 운현궁을 찾기 위하여 피맛골 부터 걷습니다.

이곳도 곧 사라질 운명입니다.

 

 헐리우드 극장 건물 위에 사-춤이라는 광고가 이채롭습니다.

"사교춤"의 약자라기 보다 에둘러 부르는 것 같습니다.

 

교동 초등학교 옆이 덕성여대이고 같은 공간에 운현궁이 있는 셈입니다. 

 

 

 

 

 

 

 

 

 

 

종    목 사적  제257호
명     칭 운현궁(雲峴宮)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터
수량/면적 9,413.23㎡
지 정 일 1977.11.22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운니동 98-50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학교법인덕성학원
관 리 자 서울특별시,학교법인덕성학원
일반설명 | 전문설명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아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한옥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리잡고, 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북쪽에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잡고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고,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0여년간 정치를 하면서 세도정치의 폐란을 제거하고 인사·재정들에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하였고,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경북궁을 다시 짓기도 하였다.

지금은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 대학으로 사용되고 있고 방송국 시설이 있기도 하다. 이로 인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도 헐려 나가고 영화루와 은신군·남연군의 사당도 모두 없어졌다.

 

 

 

 

 

 

 

 

 

 

 

 

 

 

 

 

 

 

 

 

길건너 천도교 수운 회관 

 

 

 

 

 

 

 

 

운현궁 공식 안내 사이트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운현궁 출입문
매표소를 통과해 오른쪽으로 수직사가 있고 여기를 지나 정면으로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운현궁의 사랑채가 보이는데 이 건물이 노안당이다.

 

운현궁 전경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1863년 12월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부터 부근의 고개이름(운현(雲峴)) 또는 관현(觀峴)를 따 운현궁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수직사
정문 우측에 위치한 수직사는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 궁에서 파견된 경관들과 관리하는 인원이 많았다.

 

수직사 내부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궁에서 관리가 파견되는 등 거주 인원이 많았다

 

이로당
이로당은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 바깥 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입 구(口)자' 모양으로 된 건물로 가운데 중정이 있다.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여자들만 살 수있게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로당의 안주인은 운현궁 전체 안살림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이로당
이로당은 노락당이 고종의 가례장소로 사용된 후 흥선대원군 일가에서 노락당을 안채로 더 이상 사용하기 어려워지게 되자 안채 용도로 새로 건립한 건물이다. 주로 여성들이 거주하며 살림하던 공간이기 때문에 남자들이 쉽게 드나들지 못하도록 'ㅁ'자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이로당
이로당은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 바깥 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입 구(口)자' 모양으로 된 건물로 가운데 중정이 있다.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여자들만 살 수있게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로당의 안주인은 운현궁 전체 안살림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노안당
운현궁의 사랑채로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우리나라 한식 기와집으로 처마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遮陽)을 단 수법은 그 시대적 특징이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일상에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역사적 장소이다.

 

노안당
'노안당'이란 현판은 '노자를 안지'하며 에서 딴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으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스스로 흡족하다는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노안당 내부
운현궁에서 사랑채로 쓰였던 노안당은 대원군의 일상거처였으며 파격적인 인사정책, 중앙관제복구, 서원철폐, 복식개혁 등 국가주요정책을 논의했던 곳이다.

 

노락당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 10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고종 3년(1866) 삼간택이 끝난 후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자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가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노락당
노락당은 정면 10간 측면 3칸으로 노안당(정면 6칸 측면 3칸)보다 상당히 크고 웅장하며, 툇마루 좌우에 방이 아홉 간이나 있을 정도로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노락당 내부
노락당은 고종과 민비의 가례와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각종 중요행사 때 사용되었다.

 





五友歌(다섯 벗의 노래) - 윤 선도
내 벗이 몇이냐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떠오르니 그것이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소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많은지라
좋고도 그칠 때가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찌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은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피고 추우면 잎지거늘
소나무야 너는 어찌하여 눈과 서리를 모르느냐
땅속 깊이 뿌리가 곧은 줄을 그것으로 하여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러고 사철을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비추니
밤중에 밝은 빛이 너만한 것이 또 있겠느냐
보고도 말이 없으니 내 벗인가 하노라. 

 

 

한가위 잘 쇠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