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날 오후, 몽환의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였지만 지속적이었다.
백제나 고구려의 혼들이 부르는 소리였는지 알 길 없었으나
하여간 발길을 끄는 소리가 있었다.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때까지의 발걸음이 헛걸음 같았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저기 한강 건너 북쪽의 "널나루 구역"(廣津區)의 너른 마당에서
젊은이들과 호흡하며
학기가 시작되거나 끝날 때쯤이면 세미나의 끝을
이곳 찻집에서 마련했었건만
그때는 이곳을 걸어 돌아다니지는 않았나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미진했던 잔영을 다 털지 못한체,
하여간 겨울 어느날 홀로 이곳을 한바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의식은 아득한 가운데,
부르는 소리가 이 움집 구들장 어디에서 흘러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장끼인가 까투리인가, 멀리 보였다.
세월 저편에서 나타난듯 싶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무들 비탈에 서다",
예전 사상계에 실렸던 황순원의 장편 연재가 생각났다.
지금도 젊은이들은 비탈에 서있다.
이 대공황의 차가운 겨울날---.
아까는 들어오는 문이었고 이제는 나가는 문이다.
이제는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다---.
우리가 안고 딩구는 꿈은 무엇인가.
몽촌토성에서 생각해본다.
몽촌 토성
사적 제 297호. 토성 내의 마을이름인 '몽촌'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1984~89년에 걸쳐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했다.
이 토성은 가락동과 방이동 일대에 발달한 표고 50m 내외의 자연구릉지의 일부분을 이용하여 축조한 타원형에 가까운 마름모꼴의 성곽이다.
그 입지조건을 보면 북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남한산이 솟아 있으며, 그 사이에 비교적 완만한 구릉과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 구역 안에 석촌동 고분군을 비롯하여 풍납동토성과 같은 백제 초기의 유적들이 소재하고 있어, 일찍부터 토성의 가치가 주목되어왔다.
성은 본성과 이보다 작은 외성으로 되어 있는데, 성의 외곽둘레는 방어용 하천인 해자(垓字)시설과 성의 방비를 위한 목책(木柵)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내부에서 백제 초기의 움집터와 기와 및 토기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성곽의 전체둘레는 2,285m이며 총면적은 21만 6,000㎡이지만, 외성을 합할 경우 총면적은 30만 2,500㎡에 달한다.
성벽은 자연지물을 이용한 판축법(板築法)으로 축조되었는데, 8,000~1만 명 정도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그리고 성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는 모두 9개소인데, 북문터·동문터·남문터의 존재가 확인된다. 성 안에는 남북을 잇는 도로와 동·서를 연결하는
도로망이 대체로 바둑판 모양의 직교식(直交式) 형태를 띠고 있는데, 고구려 왕성이었던 국내성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도로 설계에 있어서 조직적인 배열을 갖추도록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토성 내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와당류·토기류·
석기류·철기류 및 갑옷편, 그리고 일반 공구들이 보인다.
토기류 가운데는 광구장경구형호·흑색마연연질토기·무개고배류 외에 백제의 대표적 토기라 할 수 있는 삼족토기(三足土器)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몽촌토성이 백제의 성곽임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특히 서진(西晉 : 266~316)의 전문자기편(錢文磁器片)이 출토되어 몽촌토성의 축조시기를 3세기말에서 4세기초로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동진(東晉)의 청자편 및 육조 시기의 벼루 등이 출토된 바 있는데, 이는 백제와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의 산물로서, 몽촌토성이 그 중심역할을
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토성에서는 5세기 중엽 이후의 고구려 토기들도 출토되고 있어, 고구려의 한강유역 진출에 의한 몽촌토성의 장악과 그에 따른 백제의 남천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몽촌토성은 백제의 초기 왕성인 하남위례성으로 비정된다.
하남위례성은 백제가 한강 이남으로 거점을 옮긴 후, 그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던 성곽인데, 그 위치를 몽촌토성으로 비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 몽촌토성이 삼한 소국 지배층의 일반적 거주지인 구릉지토성이라는 점과 그 인근의 석촌동에는 왕릉급 고분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삼국사기〉의 하남위례성에 관한 기사와도 부합된다.
특히 한성 말기 백제 왕성에 관하여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았는데 그 안에 궁실·누각·대사를 만들어 장려함이 극에 달했다"
라고 했는데, 토성이라는 점에서 몽촌토성과 부합되고 있다.
그러나 발굴 결과 몽촌토성이 왕성임을 뒷받침해주는 확실한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및 조경지(造景池)로 추정되는
연못지의 흔적이 밝혀져 지금까지 출토된 각종 중국 도자기 및 와당 등의 유물과 더불어 왕성의 가능성을 증대시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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