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여정의 끝은 도담삼봉 답사였다.
1984년에 충주댐이 완성 되면서 도담삼봉은 정상부분들만 물위에 들어낸
절묘한 경치를 연출한다.
댐이 완공되기 전에는 등산객들이 도담삼봉을 모두 오르내렸다.
나도 한번 그렇게 했던 기억이 난다.
도담(嶋潭)은 못 속의 섬이라는 뜻이니 예부터 그렇게 점지되었던 모양이다.
"삼봉"이라고 하면 역사적 감회가 생긴다.
이 근방이 고향인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젊은날 학문을 닦던 시절
도담 삼봉을 자주 찾아 혼란스러웠던 당대에 대한 개혁 의지를 불태웠고,
아름다운 경치에도 흠취하여 자신의 호도 "삼봉"이라 하였을 정도였다 .
도담삼봉에는 97년 11월 부터 7억여원의 사업비를 들여 국내 최초로 노래방식 음악분수
시설 설치공사를 추진 98년 5월 25일 부터 본격 운영하고 있다.
음악분수는 최첨단 컴퓨터 프로그램 방식으로 노래를 부르면 음정에 따라 36가지의 다
양한 모양으로 분수를 분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토록 시설되어 관광객의 음악참여
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용요금 : 한 곡당 2,000원/ 접속곡(메들리) 1만원
누가 노래 한곡을 권했으나 사양했는데 지나놓고 보니 좀 섭섭한 감이 든다.
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때 떠내려와 지금의 도담 삼봉 이 되였으며
그이후 매년 단양에서 정선군에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어린 소년 정도전은 정선군 원님을 찾아가 우리가 삼봉을 떠 내려오라고 한것도 아니고
오히려 물길를 막아 피해를 보고 있으니 세금낼 이유도 없고 하니 도로 가지고 가든지
하라고 한뒤에는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하는 설화도 전해내려온다.
정도전의 사람됨됨이를 기리는 고향 사람들의 간절한 뜻이 빚어낸
설화라고 하겠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조선을 건국하는데 있어서 1등공신이 된다.
정몽주와 이방원의 라이벌로 알려져 있는 정도전은 그 학문적 사상에는 높은 평가를 받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이름만큼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와 경쟁하고 대립 하였던 정몽주는 고려의 충절이라는 말과 함께 선죽교라는 단어들로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건국의 최고 1등공신이었던 정도전은 조선에서 조차 버림 받고
그의 무덤하나 남겨져 있지 않은 채 오늘날을 살고 있다.
파워 게임의 냉엄함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필요한 덕목이 된 충절에 대한 조선 왕조의 강조,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학문적인 사상이나 개혁정치 같은 것 들이
저 평가 되어 왔다고 할 것이다.
위대한 개혁가로서의 정도전, 조선 개국과 함께 펴려고 한 그의 개국 의지는
어떻게 하여 지리멸렬되고 말았는지---.
이 시대 위대한 개혁가를 자처한 사람의 치사한 추락을 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도담삼봉을 바라보며---.
등산로에 살짝 숨은 석문은 신묘한 아름다움을 문득 드러낸다.
당연히 몇가지 설화가 전래되지만 여기서 더이상 소개할 겨를은 없다.
석문 저 아래쪽에는 만만치 않은 동굴도 있다고 하는데 탐사하기에는
시간이 몹시 빡빡하였다.
주차장에는 대형 버스가 즐비하였다.
그중의 하나, 큰 여유와 유머를 풍기고 있는 문중 버스를 카메라 앵글에
잡으며 이번 여정도 마침표를 찍습니다.
<끝>
'Photo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록예찬 2 (도심 속의 오솔길) (0) | 2009.05.06 |
---|---|
신록예찬 1 (봄비에 젖은 날) (0) | 2009.05.05 |
온달산성에서--- (0) | 2009.04.30 |
장승들의 고향 (0) | 2009.04.26 |
단양 가는길(곤지암 소머리 국밥집에서) (0) | 2009.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