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한(Burkhan) 바위에 있는 붉은 이끼는 푸른 이끼가 수천년 지나서 변형된 종류라고한다.
그러므로 붉한 바위라는 이름은 "붉은 이끼가 낀 바위"라는 음운상의 추론도 가능하지 싶다.
붉한(Burkhan)은 느슨하게 풀어서 /부르한/ 이라고도 발음 하지만,
Burkhan 이라는 표기가 명증하듯 원래 [붉한] 인 것으로 추정이 된다.
/붉한/을 /붉은 하/ 혹은 /붉은 해/의 뜻으로도 보면 강변일까.
고대 알타이어에서는 "해"를 "하" 라고 발음했고 과연 일본어로 건너가서는 "해"가 "히"가 되지 않았던가.
아사히(朝日)처럼.
하여간 현장에서의 감성으로 느끼기에는 "붉은 태양처럼 붉은 바위" 라는 뜻의 이름에 다름 아닌것 같다.
붉은 이끼가 그 바탕에 있음도 물론이지만 우리는 항상 밝고 붉은 태양을 좇아온 북방 기마민족이
아니었던가.
그 시원에 붉은 바위를 두고 떠나왔다는 현장감은 천혜이기만 하다.
아주 먼 옛날 사냥꾼 하이도리는 알혼섬을 돌아다니다가 바이칼 호수에 내려앉는 백조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 백조들이 호수에 내려앉자마자 아름다운 아가씨로 변하더니 옷을 벗고 호수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었다.
하이도리는 그 중 한 아가씨의 옷을 감추었다.
목욕이 끝난 아가씨들은 모두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한 아가씨만은 땅에 남아 하이도리와 결혼을 한다.
이들 둘 사이에서 열한명의 아이들이 태어나고, 이들은 부랴트인들의 선조가 된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행복한 삶을 산다.
여전히 아름다운 아내는 어느 날 하이도리에게 백조의 옷을 한번만 입게 해달라고 조른다.
이제 나이도 들었고 아이가 열한명인데 무엇이 걱정인가하고 하이도리는 아내에게 옷을 준다.
옷을 입은 아내는 백조로 변했고 연기가 빠져나가는 유르트의 천장 구멍을 통해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바이칼의 ‘백조와 사냥꾼’과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 설화에 무지개같은 가교가 놓이는 순간이다.
시베리아의 중심, ‘영혼의 집’이라 불리는 바이칼 호수 알혼섬과 우리 동네의 아름다운 선녀 호수가
오색영롱하게 이어진다.
저기 두 봉우리 사이에는 원래 깊은 동굴이 있었고 그 속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이 곳도 역사상 인도 불교의 영향을 받게 되는 지역이었다.
그 동굴이 여러해 전에 이 곳에 잦은 지진으로 무너졌다고 한다.
불상도 저 돌더미 어디에 아직 들어있을 것이다.
붉한 설화와는 큰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이다.
하지만 예로부터 내려오는 설화의 본질도 만고강산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켜켜로 새로운 신화소가
현실적 여건과 함께 추가되고 있음을 느끼게해준다.
"붉한 바위" 혹은 "불한 곶"은 호수 위에 불쑥 솟은 두 개의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말로는 ‘밝은 칸’이라는 뜻도 내포하여서 천신이자 단군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주변에는 우리네 당산나무랄 수 있는 "세르게"가 있고 그 "세르게"에 걸어둔 색색의 헝겊 "자아라"가
바람에 미친듯이 나부낀다.
어릴때 동구밖 서낭당을 지나면 미친년 널뛰기 하는듯한 천쪼가리가 바람에 날고
신접이라도 될 것 같은 불온한 생각에 몸이 떨렸다.
그러나 그 떨림은 또 뜨거움이 되어 몸과 마음을 담금질 하였지---.
붉한 산 건너 쪽으로는 말을 닮은 바위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붉은 이끼가 그 주변을 둘러싸서 이곳에 있는 말 숭배의 분위기를 한껏 연출해 주고 있다.
우리 민족의 시원에는 북방 기마민족의 웅혼함이 신화소의 하나로 이렇게 자리하고 있었다.
마침내 나도 몸과 마음이 뜨거워져서 민족의 시원, 그 신성한 물, 성수 속에 발을 담그고야 말았다.
여기까지 내려와서 발을 담근 일행은 거의 없었다.
내가 혼자 달려올라가니 모두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붉한 바위를 뒤로하고 내려오려는데 열한개의 세르게가 잠시 발목을 잡는다.
바로 이곳을 바탕으로한 선녀와 나뭇군, 시조 설화에서 보면
자식이 "열 하나"였다.
동으로 내려간 우리 민죽의 시원, 코리에 해당하는 세르게는 위에서 어느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
이곳 부랴트 사람들 사이에는 먼 옛날 동쪽으로 이주한 코리족의 전설이 전해 온다.
이들이 칭하는 코리를 우리 학계에서는 ‘고리’, ‘맥’의 동음어라 생각한다.
고리는 ‘동명’이 출생한 나라로 ‘북부여’의 다른 이름이고 그가 세운 나라가 부여이다.
그런데 동명은 고구려의 ‘주몽’과도 겹친다. 부여와 고구려는 시조설화에서 동일하다.
시대와 나라가 다른데 시조설화는 같다.
이 혼란스러움은 브랴트인들이 이야기하는 코리를 역사적으로 정리하면 명확해진다.
먼 옛날 바이칼에서 대흥안령까지 이어지는 초원지대의 코리족이 만주지역까지 내려와 나라를 세우니
바로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고리국’이다.
그 고리국에서 탈출한 동명이 부여를 창업하고, 고구려는 부여에서 출원하였으니 동명에 대한 설화는
코리족들의 전매특허였던 것이다.
우리 민족 형성에 큰 지분을 가진 코리족의 ‘백조와 사냥꾼’ 설화는 농경사회로 진입한 오늘의 우리에게
‘선녀와 나무꾼’으로 윤색되어 이어오는 것은 아닐까?
이 곳은 지금 백야의 계절이어서 밤 열시가 되어도 해가 있다.
늦은 황혼에 해가 마지못해 뉘엿거리는 가운데에서도
인간의 통시적 그리고 공시적 끈은 이렇게 이어진다는 듯, 실루엣이 의미심장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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