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고다닌 투어

"다차"에서의 하룻밤

원평재 2009. 8. 19. 06:39

 

 

알혼 섬에서의 하룻밤은 "다차"에서 지냈다.

"다차"가 무엇인가?

원래는 모스크바 등지의 대도시에서 7-80킬로 미터 내외의 근교에 일종의 텃밭이 딸린

별장, 혹은 전원주택을 일컬음이었다.

사회주의 소련 시절에는 대도시에 아주 작은 아파트나 연립주택 같은 것을 내주고

지위나 가족의 규모에 따라서 교외에 땅이 넓은 주택을 따로 무상 분배하였다.

당 간부나 고위관리, 저명한 문화예술인들에게는 텃밭 뿐만 아니라 잘 지은 별장 수준의

개인 주택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름은 똑같이 ‘다차’였다.

좁은 도시 주택에 따른 불만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제격이었는데

사회주의가 해체되고 자유경제 질서가 도입된 러시아에서 먹거리를 해결하는 문제에

이 보다 더한 기초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각 가구가 자신들의 노력에 의하여 다차에 딸린 밭을 개간하고 가꾸다보니

생산성과 소출이 이만저만 향상된게 아니었다고 한다.

 

다차(Dacha)’는  러시아어로 '주다’라는 의미의 동사 ‘다찌’와 어원이 같다.

그래서 무상 배급 받은 교외별장, 여름농장, 주말농장, 텃밭 등등의 뜻이 함축되어있는듯 하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쓴다"는 공산주의 이상론이

현실에서는

이기적 DNA를 소지하였기에(아니 소지하도록) 이만큼 진화하고 살아남은 

호모 날라리쿠스, 호모 욕심꾸러기우스, 호모 아가리쿠스, 호모 귀차니수스의

형상을 띈 우리 호모 사피엔스들에게

먹혀들리 없었을 것이다.

밀로반 질라스의 탁견을 더 인용하고 싶지만 우리는 지금 여행길에 있다.

 

 

 

 

공산주의가 해체된 지금 "다차"는 더 이상 공공재가 아니고 국가가 무상으로 대여해 주지도 않는다.

어디까지나 사유재산이며 자가용을 굴릴 수 있는 새로운 계급이 나타나서

이제는 아예 이곳을 주거지로 삼고 출퇴근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 알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다차는 이제 사유재산이며

주 거주지이고 우리의 펜션같은 역할도 하는 일석 삼조가 되었다.

 

한때는 몰려드는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여관을 대신하다가

지금은 또 새롭게 몰려드는 한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숙박업을 하면서 짭짤한 재미를 보고있다.

우리가 들렀던 다차의 주인은 억척같은 안주인 덕분에 딸들도 좋은 대학에 보내며

아주 흐믓한 만년을 보내고 있었다.

부부가 얼마나 부지런한지 유기농으로 가꾸는 농산물 소출도 이만 저만이 아니라고 한다. 

  

 

 자기들의 밭에서 나오는 농산물로 거의 밥상은 차려지며

이곳 바이칼 호수에서 나는 특히 "오물"이라는 물고기를 튀기고 찌고 볶고 하여서

맛있는 반찬으로 만든다.

저기 보이는 육류 구운것은 양고기이다.

원래 양고기, 돼지고기, 소시지는 물론이고 감자와 양파 등을 함께 긴 나무나 철사에 꽂아서

구워먹는데 보드카는 기본적으로 겻들인다.

이 집에서는 아예 고기만 잔뜩 구워주었는데 오히려 먹기에 아쉬움이 따랐다.

 

 

 

 

  

   

 

 

 

 

 

 

 

 

 

 

이 곳은 물이 귀하여서 비만 오면 물을 받는 도구와 장치가 아주 잘되어있다.

이곳에서 샤워는 감히 엄두도 못내고 화장실도 푸세식이었다.

밤중에 모기가 많다고 준비를 단단히 하여서 갔는데 전혀 필요가 없었다.

밤중에는 조로아스터 교도처럼 배화의 의식으로 캠프 파이어를 즐기고 감자를 구워 먹었다. 

 

 

 

 

 

옆집의 노부부도 다차를 관광객들에게 내 놓았는데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하는듯 하였다.

  

 

 

 

 

 

 

 여기는 동네마다 있는 현충탑이다.

관리가 허술하다.

밤이면 이 곳에서 동네 젊은이들과 관광객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며 즐기는데 우리가 갔던 날은

비가 와서 그런 여흥이 다 깨어졌다.

 

 

 

 

 

 

 

 

 

 

 

 

 

 

 

 

예전의 동네 물통 탑, 공공재였다고 한다. 

 

 

 러시아도 이제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 사회로 들어오면서 오랜동안의 잠을 깨는듯 싶다.

오래 방치되었던 공공재가 밀려나고 개인의 자산으로 등록되는 새집들이 새로운 내일을

꿈꾸며 들어서고 있었다.

자작나무 껍질은 아닌듯하고 침엽수림 계통의 이름모를 수피가 인상적이었다.

 

 

 

 

 

 

 

 

저기 쟁반에 담긴 요리는 이곳 바이칼 호수에서 지천으로 잡히는 물고기, "오~물"을

밀가루 반죽과 버므려 찐다음에 가지 나물로 롤을 말아서 쪘다.

맛도 좋고 든든하였다.

 

 

 

   

  

 

 

이 아주머니에게 하나님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우리가 떠날때는 문 밖까지 멀리 나와서 작별을 하였다.

동방적인 정서가 함께하는 부인이었다.

우리는 다시 우아직을 타고 알혼섬 선착장에 도착하여

우스찌아르딘스크로 가는 연락선을 기다렸다.

 

 

 

 

  

 

 

 

 

   

 

 

 

  

 

  

 

 이 마을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아보았다.

 

 

    

 

 

  

  

 

  

 

  

 

 

알혼 섬을 두고 떠나는 마음이 못내 착잡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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