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고다닌 투어

보스니아의 두 다리 (드리나 강의 다리/라틴 다리)

원평재 2012. 9. 9. 21:12

 

이제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를 떠나서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사라예보로 향하면서 마음 속에는

두개의 다리가 어른거렸다.

이보 안드리치가 써서 노벨 문학상까지 탄 "드리나 강의 다리"와 제1차 세계대전의 진원지가 된

"라틴 다리"가 그것이었다.

 

버스는 우선 베오그라드에서 계속 사바 강을 끼고 달리더니 마침내 국경이 가까워 오면서

"드리나 강"을 새로운 벗으로 삼아 질주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강을 건너 국경 초소를 넘어갔다.

아름다운 드리나 강은 수도 사라예보를 향하는 노상에서도 오래동안 따라왔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의 자연국경이기도 하다.

 

드리나 강상에는 수많은 교량이 있었는데 국경을 넘을때는 이 다리를 이용하였다.

이제 세르비아가 원대한 "대 세르비아" 공화국을 꿈꾸며 인종청소를 할 때에 가장 큰 피해를 본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로 들어온 것이다.

일단 평화가 찾아온 지금은 보행자들이 비교적 쉽게 통과 되었고 우리가 탄 버스도 시간은 좀

걸렸지만 개인 검사는 없이 국경을 넘었다.

 

사진의 이 다리는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는 아니다.

이보 안드리치가 배경으로 쓴 소설 속의 다리는 한번 폭파되어 사라진 후 다시 태어났지만 어느 특정 지역의

고유한 다리라기 보다 보통명사의 다리이자 누구나 사로잡혀 있는 편견의 양안을 건너야하는 그런 상징의

다리로 보고싶다.

마침내 드리나 강을 건너서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로 들어왔다.

지금 보이는 건물은 십자가의 모양을 보아서 정교회 같다.

보스니아에는 무슬림이 가장 많이 살지만 과반수는 아니며

로마 가톨릭이 그 뒤를 바짝 좇고, 동방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유태교까지

이 땅 이 지역에 몰려살고 있다.

 

 

평화가 찾아오고 보니 이곳에도 새로 또 다리를 놓는 공사가 시작된 모양같다.

 

드리나 강의 다리

 

 

이보 안드리치가 그린 이 다리에는 여러가지 긴 이야기가 따른다.

그의 소설에서도 많은 이야기들이 소상하다.

보스니아의 "비세그라드라"라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드리나 강의 다리와 그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치 서사시처럼 쓰여졌다. 강과 다리와 그 주변 사람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역사

모두가 주인공이려니---.

이보 안드리치는 이 작품 <드리나 강의 다리>로 196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드리나 강의 다리"는 1577년에 만들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 때 폭파되었으며 이후 복원되어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다리를 만든 터키의 재상, '메흐메드 파샤'는 원래는 보스니아 출신이지만 어린시절 터키로

징집되었고 나중에는 재상의 자리에 올라 고향마을에 다리를 건설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이 다리 주변에는 이슬람,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유대교 등 다양한 종교와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몇달 전에는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유고 내전때, 그러니까 보스니아 학살때의 희생자를 위한 추모식이 열렸다.

10여년 전에 희생된 66구의 시체가 이근처에서 댐 공사 도중 발견되었다고 한다.

전체 희생자들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다.

 

보행자들은 이제 국경을 쉽게 건너는 모습이다.

 

이보 안드리치는 보스니아에서 태어났지만 양친 모두 크로아티아인이었다.

그가 태어날 때의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속했다.

안드리치는 드리나강의 다리 1940년대 전반기 독일 점령 하의 베오그라드에서 썼다.

전후에 그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정치지도자로 활동했으나, 은퇴한 뒤 베오그라드에서 죽었다.

 

안드리치의 조국은 크로아티아도 보스니아도 아닌 유고슬라비아라는 말이 맞다.

그의 소설은 보스니아를 주된 배경으로 삼고 있긴 하지만,

역사와 문화와 인종이 교섭하고 뒤섞이는 발칸 전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드리치의 소설 문장은 크로아티아방언과 세르비아방언을 자유롭게 오갔다.

그의 마음의 고향은 평화가 오가는 발칸지역 전체일수 밖에 없다.


 

 

아름다운 드리나 강 물줄기, 삶의 젖줄기

 

 

 

 

 

보스니아 내전(1992-1995년)의 상흔

 

 

사라예보로 들어오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즐거운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나라가 1973년 이 에리사가 주축이 된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단체전 우승을 한 도시가 바로 사라예보가 아니던가.

구기종목 최초로 우리나라가 세계선수권 단체전을 제패한 역사적인 곳이다.

사라예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로 인구는 40여만명이다.
처참한 상흔이 아직 도시 곳곳에 남아있지만

차츰 극복해 가는 모습이다.

 

지금은 현대 자동차와 삼성. LG 등이 이곳에서 큰 역할을 하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아주 좋다고 한다.

 

 

사라예보로 들어오면서 하루밤을 자고 이튿날 쉴틈도 없이 일찍부터

제1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된 라틴 다리를 찾아나섰다.

역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비중으로 보면 이 강(?)과 다리는 거창하고도

장엄한 수준이어야 어울릴지 모른다.

하지만 현장은 몇십년간이나 나를 지배해온 고정관념을 순식간에 깨고만다.

이런 작은 개천 수준이 그토록 많은 인류의 피를 흘리게한 역사적 현장이라니---.

 

 

 

역사의 현장에 늦게나마 서보았다.

다리의 폭이 좁지만 차량은 건너다녔다. 

버스를 기다리는 보스니아인들은 무심할 뿐이다.

근처의 비들기들도 무심하긴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동네라서 다시한번 시선을 끌었다---.

다리 아래에는 코카콜라 펫트 병들이 이곳에서 떠나가질 못하고 역사의 현장을 멤돌 따름이었다.

송사리 떼?

멀리 모스크의 돔 지붕과 미나렛 첨탑이 이곳의 복잡한 현주소를 보여준다.

 

 

 

도로는 고치고 있으나 지붕은 아직 포격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곳 모스크 사원 앞으로 젊은이가 지나간다.

이 다리 근처 지역에는 모든 종교가 모여있다고 한다.

 

 

모스크 앞에는 유서깊은 우물이 보존되어있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역사의 현장을 담은 작은 박물관이 나타난다.

벽면에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 사진과 글이 있다.

그 전말은 기억 속의 역사 교과서로 대치하고 더 이상의 설명이나 감상은 생략하고 싶다.

 

보스니아 (보스니아어: Bosna 보스나, 세르비아어: Босна 보스나)는 북쪽과 동쪽 국경을 만드는

사바 강과 드리나 강 그리고 파노니안 평야의 남쪽 국경까지 이르는 지역이다.

디나르알프스 산맥을 끼고 있다. 남쪽의 지중해쪽은 헤르체고비나 지역이다.

1908년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뒤 1914년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Sarajevo)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암살되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구성하는 공화국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1992년 3월 분리 독립하였다.

 

 

 

 

 

 

이제 역사적인 다리를 떠나서 구 시가지의 공방이 즐비한 곳으로 도보 탐방을 하였다.

우리의 인사동과 북촌을 합친듯한 곳이다.

설명이 크게 필요없었다.

사진이 설명을 대신하였으면 싶다.

 

 

 

 

 

 

 

곳곳에 오스만 터키 지배 시절의 유적이 남아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각종 종파의 기독교 교회들이 서있다.

 교회 내부 사진 촬영이 다소간 어려운데 마침 이 정교회 건물은 내부 수리중이어서 사진을 쉽게 찍었다.

 

 

 

LG 제품의 에어컨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사라예보 대학의 도심 캠퍼스, MBA 등의 과정 같다.

 

 

 

 

 

 

 

크게 부서진 건물 못지 않게 벽이나 기둥에 남아있는 총탄의 자국이 전쟁의 참상을 보여준다.

 

내전과 파괴의 흔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도시 전체와 사람들은 아름답게 마음에 와닿았다.

 

 

터키 장인들의 거리에 들어왔다.

 

 

터키 국기는 바탕이 붉은데 바탕이 파란 색갈은 이슬람 수도원의 표현이라고 한다.

 

 

오스만 터키의 점령시절에 이곳을 지배한 술탄의 집으로 올라가 보았다.

 

 

 

 

 

 

 

 

 

 

 

 

아랍 형식의 동네 구조여서 가운데에는 공동 우물이 아름답게 서 있었다.

 

 

 

 

 

 

 

 

여러가지 건축 형태에 관한 설명을 들었으나 귓전으로 흘렸다.

 

 

The Old Bazzar 표지가 미나렛과 잘 어울려 미학적이다.

부부가 전을 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매물로 나온 철모는 공연히 스산한 풍경이다.

 

 

어린이들의 소풍 행렬인가---.

관조---

 

 

 

 

 

이제 헤르체코비나의 수도였던 모스타르로 떠난다.

짓다가 만 골조가 전몰의 상징으로 보인다.

 

 

비니압스키의 "전설"이 문득 듣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