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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 3-4월호 (도미니카와 아이티에서 얻은 이야기)

원평재 2014. 3. 20. 06:11

 

 

 

 

 

 

 

 

 

 

 

 

 

 

 

도미니카와 아이티에서 얻은 이야기

 

                                                                                                                       김 유 조

 

 

 

일 년 전 도미니카와 아이티를 방문하였다. 아이티에 대 지진이 일어나서 20만 명이 죽은

대참사 후 일 년 즈음이었다. 두 나라는 같은 섬에 있다.

첫 기착지는 도미니카의 수도, 산토 도밍고.

 

물라토라고 하는 흑인과 백인의 혼혈족들이 가득 탄 비행기가 심한 요동을 치며 공항에

착륙하자 승객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다. 반세기 전쯤 우리들이 타고 다니던 비행기

풍경 같아서 마음이 오만해지려다가 그들의 순진무구한 얼굴빛을 보니 내가 도로

심각해졌다.

순수 그 자체~!

우리가, 혹은 내가 잃고 있는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8박 9일의 두 나라 여행이 성사된 것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한인 문학 동호회 덕분이었다.

여러 해 그곳 교민 자제들의 글짓기 대회를 메일로 심사하고 평가를 해주며 정이 들었는데,

한번 방문하여서 문학 강연과 직접 시상 등의 행사에 나서면 격려가 되겠다는 초청이 온

것이다. 말은 쉽지만 힘들고 벅찬 일을 경명애 문인회장의 간곡한 정성이 마침내 엮어내고야

말았다.

 

도미니카에는 한때 수만 명의 교민들이 봉제의류 산업으로 대미수출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는데 최근에는 현지 사정이 열악하여져서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인근 과테말라와 아이티로

모두 떠나고 겨우 1500명가량의 교민들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유는 아이러니 하게도

그 사이 국민생활수준이 높아져서 그 곳 정부의 외국인 투자 보호 정책도 줄어들었고 특히

인건비가 상승하여 노동집약의 메리트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에서 문학 동호회가 먼 곳의 문학교수를 초빙하여 강연회를 갖고 또 인접했지만

아이티까지 여행을 주선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으랴.

 

가서보니 물심양면의 힘든 공간에 한인 석세스 스토리 두 줄기가 환한 빛으로 신화처럼 존재

하고 있었다. 그 첫째는 최상민 ESD(전력회사) 사장의 드라마였다. 20여 년 전 도미니카에서

봉제공장을 시작한 부모님을 따라서 들어온 그가 겪은 좌절과 석세스 스토리는 국내 매스컴

에서도 이제는 많이 다루어서 키 워드만으로도 검색이 되기에 여기에 다시 부연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역경 끝에 이룩한 엄청난 성취를 자만하지 않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앞장 서는 그의 인간미를 직접 가까이에서 보고 느꼈다는 사실이다.

내가 지진의 대 참사 아래 신음하는 아이티를 지프차를 타고 달리며 피부로 체험하도록 주선해

준 최상민 사장의 호의는 바로 이런 성품의 소산이었다.

 

방문 일정에 따라 첫날 도미니카의 수도 산토도밍고에서 여장을 푼 곳은 World Grace

Mission Center였다. 센터 건물은 열대 수림 속에 넓고 크게 자리하였는데, 알고 보니 이곳은

그간 세계방방 곡곡의 기독인들과 나아가서 불신자들까지 두루 모아서 영혼이 다시 반짝이게

한 비영리의 명소였다.

그리고 그 주체는 놀랍게도 오래전 한국을 떠난 삼미 철강 그룹의 전 회장, 김현철 선교사와

부인 이은혜 권사였다. 병마와 가족사의 어려움을 이겨내며 독실한 신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온 김 선교사와 부인은 그동안 해외에서 사업에 다시 성공한 후 이제는 세상에 신앙의 빛을

전하는 사람으로 거듭나 있었다.

 

도미니카와 아이티는 하나의 섬에 들어서 있는 두 나라이지만 도미니카는 백인 쪽에 더

가까운 물라토들이 히스패닉 어를 쓰며 살고, 아이티는 거의 흑인에 가까운 까만 피부의

사람들이 프랑스어의 중남미 방언 크레올 어를 쓰며 살고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곳에도 있어서, 중남미에서 가장 먼저 독립을 한 아이티는 한때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독립에도 큰 도움을 준 선진국이었으나 세습 독재자 때문에 망가져서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연명하는 나라가 되었다. 거기에다 최근의 지진은 마지막 펀치까지

먹였다고나 할까.

못살게 된 아이티 사람들은 도미니카로 밀입국 하여 가정부나 단순 노동직에 종사하는 것을

성공으로 여기고, 반면 아이티에 온 도미니카 사람들은 비즈니스를 잘 하면서 상류 생활을

누리는 형편이 되었다.

 

이제 한마디로 아이티는 온 나라가 폐허이고 기아와 걸식이 일상화 되어 있었다.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의 NGO들이 구호와 재건을 위하여 들어와 있었는데 우리나라로

부터도 수많은 단체와 개인이 들어와서 대학건물까지 짓고 있는 데에 놀라움과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리고 단비부대!

우리나라 국군 공병대가 태극 마크와 UN 휘장을 달고 시내를 달리며 구호와 치안 유지에

나섰는데 그 광경,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특히 한국동란을 겪은 세대, UN 데이를

공휴일로 쉬었던 세대, 구호물자를 받아먹어 본, 나 같은 세대의 사람들에게 그 벅찬 감격은

필설로 그려낼 수가 없는 경지였다.

마침 ESD에서 내준 지프로 나를 안내한 한국 NGO 청년의 주선으로 우리 단비부대에

들어가서 음식과 음료를 대접 받을 때의 감회란!!! 부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은

부랑자와 폭도들로 접근 불가지역인데 우리 단비부대 안은 경음악과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단비 부대를 나와서 지프차는 폐허 속에서도 배움의 움막을 지어놓은 천막 학교로 달려갔다.

새카만 피부에 눈망울이 반짝이는 어린이들은 “아베세대(ABCD)”를 익히다가 “마리”라고

하는 여선생님의 지시로 모두 일어나더니 프랑스풍의 동요를 불러주는 것이 아닌가. 고국으로

돌아가시면 교육 관련의 여러 가지 기자재를 보내주기 바란다는 간곡한 소원과 함께---.

 

대통령 궁까지 폭삭 내려앉은 이 나라에 난민촌 아닌 데가 없었지만 그 어느 곳이던가 연을

날리는 소년의 모습이 전란의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했던 어떤 영화의 한 장면같이 뇌리에

았다.

학교가 있고 연을 날리며 꿈을 먹은 어린이가 있는 한 희망은 아직 남아있으리라.

 

도마나카로 돌아오는 비행기도 갈 때처럼 출발시간은 멋대로 였다. 말하자면 나 같은 VIP가

모두 타야 프로펠러기는 출발을 하는 것이었다. 저 아래 국경이 되고 있는 산맥의 꼬불꼬불한

산길로는 먼지를 일으키며 고물 버스들이 달리고 있었다. 국경에서의 검열은 아주 엄중하다고

한다.

 

도미니카에서의 문학 행사는 이번 여행의 주제이자 하이라이트였다. 이 머나먼 섬나라에

감수성 예민한 우리 어린이들이 이렇게 많고, 또 우리말을 그토록 잘 구사할 줄이야.

그들이 쓴 글 속에 아이티로 구호활동을 다녀온 글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으니 내 마음은

다시 한 번 감동으로 벅차올랐고 심장의 동계도 요동을 쳤다. 유소년들과 하이틴들은 우리글만

잘 쓰는 게 아니라 우리말도 아주 잘했다. 미국에 사는 내 손자 둘과 외손녀 셋이 우리말에

아주 서툰 경우와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성인이 된 조카와 질녀들도 우리말이 서툴다.

내가 진심으로 그런 일을 부끄러워했더니 어떤 젊은 엄마가 웃으며 말하였다.

“여기 엄마들은 모두 직업이 없거든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 우리말을 함께 쓰는 시간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가정교육이 무섭고

중요함을 깨우치는 에피소드였다.

 

8박9일의 마지막 이틀 밤은 문학 동호회 경명애 회장의 개인적 호의로 산토도밍고 최고의

“암바사도르” 호텔에 머물며 대사관저에서도 문학 강연을 하였다. 또 하루 저녁은 동호회장이

베푼 앵글로-아메리칸 소사이어티의 파티에도 참석하였다.

경 회장의 백인 부군은 Sea-Land의 이쪽 책임자로 오래 일해 왔는데 곧 은퇴를 하여 함께

고향인 플로리다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나도 이제 도미니카와 아이티는 문자 그대로

먼 나라가 되고야 말 일인가.

 

다음날 아침이었다. 뉴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시간이 바튼데도 최상민 회장으로부터 오찬

제의가 왔다. 시간을 감안하여 경 회장의 댁에서 자리가 마련되었다. 뜻밖에도 ESD 그룹

차원의 “문학상 제정”과 장래 대학의 설립에 관한 폭넓은 의견을 요청하였다.

문학상은 도미니카 쪽으로는 히스패닉 어, 아이티 쪽으로는 크레올 어, 그리고 우리말

문학상을 꼭 넣어달라고 제안하였고 대학 설립부분은 두고두고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였다.

도미니카와 아이티와의 인연이 끈을 이어가는 순간이었다.

 

<끝>

 

  

 

 

 

 

 

 

 

 

  

 

 

  

 

 

  

페르귄트 모음곡 op. 46 – 아침

 

모음곡 페르귄트

 

 

 

 

페르귄트 모음곡 op. 46 - 오제

 

Berliner Philharmoniker / Herbert von Karajan, C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