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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울레이의 십자가 언덕 (리투아니아)

원평재 2014. 6. 3. 08:18

 

 

 

 

 

 

트라카이 호수 성과 크나우스를 떠나

리투아니아의 북부 시울레이에 있는 십자가 언덕(Hill of Crosses)으로 향한다.

리투아니아의 독립 전잰사 중에서도 최근세사인 1918년의 희생이 계기가 되어

이곳 야산에는 십자가 동산이 생겼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는 리투아니아의 독립의지를 꺾고 기독교 신앙을 말살코자

낮이면 불도저가 언덕을 밀었고

밤이면 사람들이 다시 세우는 십자가의 전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독립을 이룬 지금은 개인적인 추도의 뜻과 기원을 담아서

십자가를 이곳에 심으려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온다고 한다.

 

 

몇 년전만 해도 규모가 지금의 1/3정도였는데, 최근의 추산에 따르면

십자가 수가 5만여에 이른다는 집계도 나왔다.

 

 

1993년 로마교황 성하의 방문으로 더 유명해졌다.

 

일단 발길은 트라카이 호수 섬을 떠나 리투아니아의 시골 길을 달린다.

아기를 물어다 준다는 황새가 길섶에 보인다.

이곳도 인구가 줄어든다는데 황새가 더 열심히 분발해야겠다.

시울래이가 250리 길인가 보다.

  

  국경을 넘나드는 고속도로의 규모이다.

우리나라의 국도 수준에도 못 미친다.

  

  얕은 산(?)이 보인다.

이보다 높은 데를 보지 못하였다.

  

 

  농목축업이 주요 산업인데 양떼를 이제야 본다.

  

  

  농기계가 대량 보급되고 있다고 한다.

녹슬고 이끼낀 지붕이 카메라맨의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풍차가 있는 중간 휴게소에 멈추었다.

목공예와 해성암 조각이 눈에 띈다.

 

            

풍차의 동력 전달축이 이채롭다.

크랭크 축 아래에 둘러앉는다.

  

돌 하루방?

 

  마침내 시울레이 시로 들어왔다.

폰 부스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점심 요기를 하러 들어간 전통 식당

 

 

 

  리투아니아 생맥주도 한잔 하였다.

맛이 좋았다.

 화장실을 알리는 남녀 픽토그램이 재미있었으나 여유가 없어 올리지 못하고

내부 공간만 올려본다. 

 

다시 시울레이 거리

1993년 교황 성하께서 이 도시를 방문한 기념 문구들이 곳곳에 있다.

구 시청사를 오래전 결혼식장으로 개조하여 담당 공무원이 입회하에

결혼식이 많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호화결혼식이 판을 치는 우리가 본받을 만 하다.

 

결혼식장에서의 부모 마음은 어디나 비슷하달까

특히 딸을 여의는 아버지 마음이 새록새록하다.

   

 

 

 

  결혼식장의 친지 하객들이 구경꾼이 들이민 카메라에 더 열광하였다.

이들도 식이 끝나면 십자가 언덕에 들린다고 한다.

1970년에 시청사에서 개조되었다는 예식장

 

 

 

  드디어 십자가의 언덕 입구에 도달하였다.

이곳에서 십자가를 구입, 글을 새겨서 언덕으로 올라간다.

 

 

 

 

 

 

 

 

 

 

 

 

 

 

소멸과 생성의 사이클을 생각케한다.

 

 

 

 

            

 

 

 

 

 

 

  

 

 

 

  

 

 

 

 

 

 

 

 

 

 

 

1993년 교황 성하께서 방문한 이후 지은 기념 성당이 언덕너머 서 있다.

지금도 미사집전이 활성화 되어있다.

 

  

 

 

아까 결혼식을 올린 커플 중의 하나같다.

 

            아쉬움 남기며 이제 에스토니아로 넘어갑니다.


 
01 Rinaldo: "Lascia Ch`Io Pianga"(George Friedrich Handel)
02 "Vocalise"(Sergei Rachmaninov)
03 Ave Maria(Giulio Caccini)
04 Cantata Bwv 21 "Seufzer, Tranen, Kummer, Not"(Johann Sebastian Bac
05 "Bachianas Brasileiras"(Heitor Villa-Lobos)
06 "How Fair This Place! From Twelve Songs Op.21-7"(Sergei Rachmaninov)
07 Der Freischutz: "Kommt Ein Schlanker Bursch Gegangen"(Carl Maria Von Weber)
08 Tosca: "Vissi D`Atre, Vissi D` Amore"(Giacomo Puccini)

 

 

 

▲이어듣기 카치니의 '아베마리아'하면 으레 떠오르는 이름 하나가 있다.
이네싸 갈란테.
그녀는 이 단 한 곡만으로도 세계의 비평가들의 귀를 사로잡아 버린 우리시대 최고의
소프라노중 한명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그녀의 이름을 세계무대에 널리 알리게 된 이네싸 갈란테는 라트비아의
리가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던 어머니와 테너가수였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음악은 숨쉬는
공기와도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음악적 재능 또한 천부적이었다.
처음 그녀는 음악가의 길을 가기보다는 의사나 철학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우연히 그녀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게 된 한 음악가로부터 음악을 할 것을 제의받으면서

성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네싸 갈란테는 1977년 리가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Rachel Shulov에게 사사했고 학생 시절부터

리가 오페라 하우스에서 활동을 했다.

리가를 위시하여 주변의 동구권 국가들에서 연주를 했으며 Kirov Opera에서 정규 소프라노 가수로

활동하게 되면서 모스코와
키에브, 오데사로 그 활동영역을 넓히게 된다.

미국과 캐나다의 순회공연은 비평가들에게 그녀의 존재에 대하여

주목을 하게 만들었으며 예후디 메뉴인경과 주빈 메타는 그녀에게 서부 진영
으로의 데뷔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공산진영과 민주진영의 대립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그녀의 서부 진영에서의 활동을 제약하는 요소였다.
1991년 라트비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면서 그녀는 비로소 세계무대로의 데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92년 독일 만하임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파미나 역할의 연주를 필두로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오페라 [카르멘]에서 돈 호세의 버려진
애인 미카엘라역을 호연하면서 그녀는 비평가들에게 그리고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95년 Campion Record에서
제작된 [Debut] 앨범의 선풍적인 인기는 세계무대에 그녀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이네싸 갈란테는 1996년 10월 스코틀랜드 왕립 오케스트라와의
공연으로 영국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고, 1997년 세계적인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70회 생일을 기념하는

에비앙 페스티벌에 마지막 날 공연에서 오프닝을 하였으며

뉴포트 뮤직 페스티벌과 뉴욕 바드 뮤직 페스티벌에서 오프닝을 맡으면서 미국에 데뷔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