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기행의 끝 순서는 갈매못 순교 성지였습니다.
아래 기사는 위키디피아를 참고하였습니다.
보령 갈매못 천주교 순교지(保寧 갈매못 天主敎 殉敎地)는 충청남도 보령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천주교 순교지이다.
2013년 2월 12일 대한민국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188호로 지정되었다.[1]
보령 갈매못 천주교 순교지는 1866년 3월 23일 천주교 병인박해 때 서울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보령에 있는 충청수영으로 이송된 다섯 성인이 1866년 3월 30일 수영 근처의 바닷가 모래사장
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한 장소로 현재 순교자기념비, 기념관, 사제관, 수녀원 등이 건립돼 있다.
갈매못 성지는 역사적으로 병인박해(1866년)때 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송되어 순교한 곳 일뿐
아니라, 다블뤼 주교의 유품과 유물이 소장돼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성지이다.
찾아가는 길
충남 홍성에서 보령시(대천)로 이어지는 21번 국도를 따라 광천읍을 지나 주포면 소재지인
보령리에 닿으면 삼거리로 갈리는 길목에 갈매못 성지 안내 푯말이 보인다.
여기서 6km 정도 가면 홍보 주유소가 있는 삼거리가 되고 좌회전하여 다시 6km 정도 바다를 끼고
가면 길 왼쪽으로 갈매못 성지가 나타난다.
평론가 유재엽 교수와 함께
갈매못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연못(渴馬淵)"이라는 뜻이라고~.
이곳을 강화도 쪽으로 잘못 안 프랑스 함대가 들어온 데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뜻으로 형장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마침 고종이 세자일 때에 결혼 날짜를 받아놓았기에 경사를 앞두고 목을 친다면
400리 밖에어야한다는 무수리의 말을 따랐다고 합니다.
이 참혹하고 부끄러운 일에는 구노의 아베 마리아가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와 함께
우리의 상처난 심정을 다독여줍니다.
신동이라고 불린 구노는 빠리 외방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는데
같은 학급에는 구노가 따라잡을 수 없는 ’음악 천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였고 선의의 경쟁자였다.
세월은 흘러 두 사람은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되었다. 당연히 그 친구가
음악을 하리라고 생각했던 구노는 신학교에 들어간 친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사제가 된 그 친구가 빠리 외방 선교회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구노는 들었다.
구노는 그 친구를 만나보고 싶었으나 중국으로 발령받아 갔다는 소식만 접하게
된 것이다.
==============================================================================================
신앙심이 깊었던 구노는 그 친구를 위해 틈틈이 기도를 했다.
가끔씩 학교 게시판에는 붉은 글씨로 ".... 순교" 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어느날 이었다. 게시판에 그 친구의 이름이 나왔다. 빨간 글씨는 아니어서 안심을
했지만 내용을 읽어본 구노는 경악스러웠다.
그 친구가 "조선 대목구 주교"로 임명되어 죽음의 땅 "조선"으로 발령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구노는 눈앞이 캄캄했다. 당시 중국과는 달리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기 힘들다는,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는, 차라리 순교하기 위해서 조선으로 들어간다는 말까지
있는 바로 그 "죽음만이 기다리는" 조선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이었다.
구노는 날마다 주님과 성모님께 그 친구가 제발 무사히 돌아와 단 한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어느 주일날이었다.
가족들과 학교 정원에서 산책을 하던 구노는 요란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삼종 시간도 아닌데 이렇게 요란하게 종이 울린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불안한 마음에 달음질 쳐서 뛰어간 구노는 실신지경이 되었다.
게시판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다블뤼안 주교 조선에서 순교"
눈물이 앞을 가려 서 있을 수 조차 없던 구노는 정신없이 뒷동산으로 뛰어갔다.
언제나 변함없이 자비로운 눈길로 우리를 내려다 보시는 성모상앞에서 구노는 목놓아 울며
성모송을 바칠 수 밖에 없었다.
Ave Maria는 성모송이다.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이제껏 성 엥베르 주교를 기리며 만들어진 노래라고 알려져
왔으나 사실은 다블뤼 주교의 기록으로 보면 된다.
구노(1818-1893). 성 다블뤼안(1817-1866), 엥베르 신부(1796-1830)의 연대기를 짚어보면
확실할 수 밖에 없겠다.
구노(Charles Francois Gounod) 는 19세기 프랑스의 대작곡가이다. 아버지는 유명한 화가이며
어머니는 피아노를 잘치는 예술적 환경에서 자라난 그는 한때 사제가 되려한 열심한 신자이었다.
1841년에는 미사곡을 로마에서 초연하였으며, 레퀴엠 등의 종교곡을 작곡하였다.
1851년 "사포"를 작곡하고 1859년 "파우스트"로 대성공하고, 1867년 "로미오와 줄리엣"을
작곡하는등 사회적 명성을 얻었으나, 1855년 성녀 세실리아 장엄미사를 작곡하고는 세속적
명성을 버리고 종교 음악에 전념케 되었다한다.
1870년 일어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에는 런던에 피난하여 5년 동안 그곳에서 작곡활동을
하였다. 1875년 파리로 돌아온 뒤로 오페라를 작곡하였으나 대부분 실패하고 만년의 10년간은
조용한 생활을 즐기며 종교에 심취, 3개의 오라토리오 ≪토비≫≪속죄≫≪죽음과 삶≫등을 작곡하였다.
빠리외방전교회 성가대장이었을 때, 당시 조선에서 전교하던 빠리외방전교회의 사제들이
순교하는 소식을 듣고, 영감을 받고 성가를 작곡하였다
기념관 입구 계단옆에 세워진 안토니오 다블뤼 신부님의 조각상이다 "예수님을 가진자가 모든 것을 가진자이다" 라는 말씀으로 좌우명을 삼으셨다고..
기념관 안에 모셔진 이 그림은 병인박해 당시,국혼이 치뤄질 예정때문에 도성에서 떨어진 보령의 갈마연(갈매못)에서 참형시키기위해 다섯 분의 성인께서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모습에 애절한 마음이..
다블뤼 신부님의 목을 반만 내려친 망나니가 고통속에 괴로워하시는 신부님을 두고 판관에게 거래를 했다고.. 수고비를 더 달라는.. 이에 오메트르신부님께서 어서 빨리 끝내라고 소리치셨다 그리고 신부님은 다시 내려친 칼에 선종하시었다 다리뼈는 으스러져 붙여모아 겨우 걸어내려 오셨다는데 측은지심은 커녕 신앙을 떠나서라도 같은 인간끼리 어찌 그럴수가 있었는지..
정말 끔찍한 다섯 성인의 군문효수 그림이다 피로 물들었을 모래사장과 바닷가.. 주님을 향한 이 분들의 마음을 백분의 일이라도 닮을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님은 황석두 루가 회장댁에서 선교를 위한 서적을 함께 저술했다
소성당의 제대 십자고상의 가시관을 바라보며 예수님과 다섯 성인의 고통을 잠시 묵상드렸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유해
신부님 말씀처럼 당시 경제대국이었던 프랑스에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사제로서 미개한 아시아로 선교하러 오신 신부님.. 선교하다 순교하기를 자청한 많은 사제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펼친 분이다
성지에서 바라 본 앞바다의 고요한 풍경
|
'에세이, 포토 에세이, 포엠 플러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빈계산 둘레길 산행과 유성 장날 (0) | 2014.11.08 |
---|---|
아단 문고와 내 친구 K 교수 (0) | 2014.11.05 |
『관촌수필』은 소설입니다. (0) | 2014.10.25 |
PEN 헌장비 제막식과 문학기행 (0) | 2014.10.24 |
"리투아니아 여인" 번역 소식과 문학의식 기행문 (0) | 2014.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