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우, 학우 몇사람이 DMZ 관광을 다녀 왔습니다.
제3땅굴도 다시 들어가 봅니다.
여러해 전보다 관광객들에게 편리하도록 다듬어져 있었는데
붐비는 관광객의 거의 대부분이 중국 사람들이라는 데에 아이러니랄까
낭패감조차 일어납니다~~~.
중국 관광객들이 제주도에서 밤새 슬롯 머신이나 돌리다가
명동으로 와서 우리 화장품과 명품 몇가지를 사 갖고 떠나는 줄로 만 알았더니
(혹은 그렇게만 믿고 싶었는데)
우리의 속살을 다 들여다 보고 간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화정역까지는 지하철을 타고가서
학우가 갖고온 승용차로 임진각으로 출발하는 일정인데
서울 북부의 경치들이 낯설게 닥아옵니다.
헤이리 쪽으로 가서 유명하다는 "커피 팩토리"에 들러
간단히 요기를 합니다.
뉴욕의 EATLEY도 들어왔다던데 찾지는 못합니다.
산중의 허리에 배가 한 척 들어앉아 있는데 저기도 무슨 유명한 밥집, 찻집이라고 합니다.
도라산 전망대에도 몇차례 왔는데
감회가 새롭습니다.
영어와 한자로 설명이 부연된건 관광객을 위한듯 합니다.
왼쪽 편으로 도라산 역이 보입니다.
개성 공단과 관련한 모든 입출입이 여기서 이루어집니다.
푸른색 철탑은 우리가 보내는 송전선의 남뽁 비무장 지대에 속한 것이고
회색 빛 송전탑은 북한 쪽이라고 합니다.
수리독수리는 이런 사정을 모르는체 먹이 찾기에 열중한 모습니다.
여기서 부터 땅굴로 들어간다는 표지입니다.
위의 설명처럼 비스듬한 이 터널은 땅굴로 들어가기 쉽게 우리쪽에서 새로 뚫어놓은 접근로입니다.
땅굴 속의 지하수로 목을 축입니다.
다이너마이트를 심었던 자국
땅굴의 끝이 아니라 일단 우리쪽에서 막아 놓은 차폐 벽입니다.
땅굴 견학을 마치고 나와서 영상 전시관 등을 둘러봅니다.
장단 마을에서 검정 서리대 콩으로 만든 두부와 쌀 동동주 반통을 네사람이 나누어 마십니다.
다시 돌아온 임진각입니다.
차이코프스키 / 장엄서곡 "1812"
Tchaikovsky, Pyotr Ilyich (1840-1893 R)
Slovak Philharmonic Orchestra
director: Libor Pesek
차이코프스키
Tchaikovsky, Pyotr Ilyich (1840-1893 R)
Ouverture Solennelle '1812', Op.49
교향곡 제6번 <비창>으로 널리 알려졌던 차이코프스키는 광산 기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 서 부터 그는 음악적인 재질이 뛰어났지만 정규 교육은 받지 않았으며
처음에 법률을 공부한 후 잠시 관리가 되었다가 다시 안톤 루빈시타인 음악 학교를 졸업.
그는 다음 해에 모스크바 음악 학교의 교수로 취임해서 작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메크 부인의 도움을 받아 13년간 원조를 받게 되자 11년간의 교단 생활을 청산하고
자유로운 창작 생활을 . 그의 작품은 독일 낭만파의 계통을 밟았는데, 당시 성행하던 러시아
국민악파와는 그리 가깝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에는 소박한 향토색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음악은 러시아적인
민족성에 입각했으면서도 특히 독일 고전파와 낭만 형식을
계승하여 훌륭한 교류를 그의 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편 그 자신의 타고난 성격으로 인해 그의 음악에는 항상 깊은 애수와
어두운 면이 감돌고 있습니다. 때로는 몽상적이고 서정적인데 열정을 겸해
극히 세련되어 있으며 러시아적인 정취가 풍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가르쳐 절충식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은 6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무용 모음곡 <호도까끼 인형>,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
오케스트라곡 <이탈리아 카프릿치오>, 서곡 <1812년>, <슬라브 행진곡> 등 여러 분야입니다.
그는 교향곡에서 그의 특성을 잘 나타냈습니다. 그것은 정서적인 긴장을 극적으로
대치시키면서 감정의 활동과 대조가 최대한으로 힘차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러시아의 심포니즘의 주류가 될 뿐만 아니라 베에토벤의 심포니즘의
후계자로 가치가 있어 그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Ouverture Solennelle '1812', Op.49
1812년 9월, 나폴레옹 60만 대군이 모스크바 공격에 나섰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모스크바를 초토화 시켜버림에 결국 나폴레옹 군대는 강추위와
굶주림 속에 완패를 당하고 겨우 3만 명의 패잔병이 파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곡은 러시아 군대의 승리를 그린 묘사음악으로 프랑스 국가 “마르세예즈”와
러시아 선율 4개가 나옵니다. 이 곡이 초연될 당시 대편성의 관현악이 동원되었는데
큰북 대신 포병대의 대포가 쏘아졌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 곡은 일종의 대규모적인 묘사음악입니다.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침공하였으나, 러시아군과 추위와 기아로 인해 완전히
패퇴한다는 내용을 오케스트라로 묘사한 것입니다.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청년장교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점점 두각을 보여, 어느덧 만군을 호령하는
장군의 지위에 올랐고, 드디어는 세계제패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멀리 이탈리아와 이집트에 원정하여 국민의 신망을 한 몸에 모았고,
그해 5월에는 국민투표에 의해 세습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렇게 그의 전성기는 1812년 까지 계속됩니다. 1812년 무적의 대육군을 자랑하는
나폴레옹군은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 그 결과 동년 9월 14일에는
당당히 모스크바 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그러나 러시아 국민들은 모든 가옥을
불태우고 식량마저 없애 버리는 등 초토전술로 맞섰기 때문에 나폴레옹군은
잠자리와 식량에 고통을 받고 불과 1개월 후인 10월 19일에는 퇴각을 시작 합니다.
혹심한 추위와 집요한 게릴라의 반격으로, 그토록 기세를 떨치던 대군도
뿔뿔히 흩어지고 간신히 프랑스의 니멘강에 이르렀을 때에 불과 2만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군은 실로 58만을 잃고만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패전을 고비로 내리막길에 접어들어서 결국 몰락하고 맙니다.
이렇게 1812년이라는 해는 러시아 국민에게 있어서 기념할 만한 해가 되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여기에 프랑스 국가가 된 1893년 국가로 됨, 마르세예즈와
러시아의 4개의 주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러시아의 주제가 번갈아
가면서 마르세예즈를 침묵시키므로 러시아의 승리를 묘사하도록 되어 있으며,
화사한 곡이어서 일반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이 곡이 작곡된 동기에 대해서 2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당시 모스크바
음악학교 교장이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권유를 받고 작곡되었으며,
1882년 8월 8일 중앙 대사원의 재건을 축하하는 축전에서 공연되었다는 설입니다.
큰북 부분도 포병이 실제로 대포를 쏘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권했다는 것은 같은데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린 산업예술박람회의 축전음악으로서 작곡되었다는 설입니다.
그런데 그 산업예술박람회가 1882년 중앙 대사원 헌당식과 함께 열렸던
것을 감안하면 두 가지 다 맞는 것 같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에 대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며,
불과 10여일 남짓한 동안 작곡하였습니다. 사실 이 곡은 부분적으로 시끄럽고,
위대한 예술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근 100년 동안 관객을 끌어모으는 인기 레퍼토리가 되어 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작곡가 자신의 평가보다는 뛰어난 작품임이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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